소설리스트

33화. (33/132)

33화.

“그렇습니다, 폐하.”

“음…….”

아가사는 나긋하게 다과를 들며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침음을 삼키던 황제가 드디어 입을 뗐다.

“협상을 잘 끝낸 기념으로 황궁 무도회를 아주 크게 열 계획이다. 본래 예정되었던 마지막 여름 황궁 무도회까지 연결해서 이틀간 아주 성대하게 열면 공식적으로 선포되지는 않아도 모든 이들이 짐이 너와 아라투스 후작을 위해 연 연회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으십니다.”

공식적으로는 록스바드 제국이 아닌 노빌리스 가문과 마이뉴코르 제국 사이에 체결된 협약서이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네 일곱 번째 결혼을 기념하여 짐이 금 50만 카르를 하사하지 않았더냐? 거기에 더해 이번 황명을 잘 수행한 것을 치하하여 금 50만 카르를 추가로 하사하겠노라.”

“이번에 함께 간 기사들에게 상여금을 주어야겠습니다. 다들 밤까지 경계를 서느라 고생하였으니 기뻐하겠지요?”

“……네가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궁정에 처음으로 입성한 아라투스 후작은 짐이 친히 상석에 앉혔느니라. 정확히 각 부처의 대신들이 앉는 첫 번째 열이었지.”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은 아가사가 흥미를 보였다.

궁정 회의는 태양의 홀에서 열린다.

중앙의 가장 높은 상석에 앉은 황제와 황족의 자리 아래 반원으로 세 개로 나뉜 구역에 귀족들의 자리가 배정되었는데 이 자리를 보면 궁정에서의 위상과 황제의 총애를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구석 자리를 주셨나요?”

“아니! 중앙에 자리를 주었느니라.”

황제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전쟁 영웅의 칭호를 받은 명문 아라투스가의 가주이며 노빌리스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한 에녹이니 첫 번째 열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중앙에, 그것도 황제가 직접 앉혔다는 게 중요했다.

황제가 조금 신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조회에 올라온 안건마다 아라투스 후작의 의견을 꼭 물어보았지. 분명 궁정에서 후작의 위상이 치솟았을 것이다.”

“그 외에는요?”

“……아라투스 후작의 기존 영지에 면세 혜택을 주랴?”

황제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은 물음에 아가사는 환하게 웃으면서도 이제 되었다,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 가지를 빼놓으셨어요, 폐하.”

“무엇 말이냐.”

“다음에도 저를 그 자리에 보내실 건가요?”

전남편이 나오는 그 자리에.

마이뉴코르 제국과 노빌리스 가문이 사전 협약을 맺었고 록스바드 제국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으니 이번 가을이 되면 마이뉴코르 제국에서 협약의 존재를 정식으로 선포하고 이행하기 위해 공식 사절을 보내올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마이뉴코르 제국의 황제는 또 제2황자를 보내오겠지.

‘겉으로 또, 문제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물론 오든 말든 무시하면 상관없기는 했으나 아가사는 더 이상 사절단맞이든 뭐든 하고 싶지 않았다.

에녹도 싫어할 것이다.

“가을에 방문할 마이뉴코르 사절을 제게 맞으라 하지 마세요.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거로 생각하지만, 이번에도 저를 또 그 자리로 보내실 건 아니시지요, 폐하?”

황제, 워밀라이 2세는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허나, 마이뉴코르 제국에서는 네가 맞아 주기를 바랄 터인데.”

“폐하.”

“아, 알았느니라. 대신 환영 무도회에는 참석해야 한다. 응? 그것도 아니 하면 마이뉴코르 제국에서도 협상 결과에 불만을 가질 것이야.”

아가사는 정말 마지못해 받아들인다는 듯 수긍했다.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어쩔 수 없지요. 남편과 참석할게요.”

저도 모르게 안도하던 황제가 이윽고 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짐의 대녀는 어찌 성격이 이리 확실하단 말이냐? 거, 대부가 한 번 실수할 수도 있지, 정말 너무하는구나.”

두 번 실수했다간 무슨 사고를 치려고.

아가사가 정색했다.

“솔직히 폐하께서 제게 마이뉴코르 측 사절단 명단을 미리 주시고 위로만 해 주셨어도 제가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정말이냐?”

“…….”

아가사는 모른 척 찻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지금의 반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물론 그때 일은 그때 일이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빤히 보던 황제가 한숨을 폭 내쉬고 편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되었다. 이번 일은 짐의 실수였으니 이렇게 하고 넘어가자꾸나. 그래, 다른 일은 없었고?”

“네. 정말 좋았어요.”

말해서 무엇 할까.

지금껏 다녀왔던 신혼여행 중에서 결단코 가장 좋았노라, 아가사는 단언할 수 있었다. 살포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본 황제가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짐과 오찬을 들겠느냐? 그리 좋았다니, 식사하면서 새 영토와 팔라비 섬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에녹과 점심 약속이 되어 있는데.’

눈을 깜빡였으나 아가사는 수긍했다. 방금까지는 지은 죄가 있어서 은근히 약하게 굴었던 황제였으나 선은 있었다.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같이 들어도 될까요? 저보다 남편을 통해서 들으시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실 거예요.”

“군사적인 식견은 아라투스 후작을 따라갈 이가 없지. 지금 후작이 군부에 있던가?”

황제가 황좌 옆에 있던 종을 울렸다. 소리 소문 없이 나타난 황제 궁의 시종장이 예를 갖췄다.

“폐하. 부르셨나이까.”

“아라투스 후작을 불러오라. 짐의 대녀와 후작과 함께 오찬을 들어야겠구나.”

“예. 바로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아가사는 워밀라이 2세를 따라 황제 궁의 심처에 위치한 황제의 개인 다이닝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뒤, 황제의 부름을 받은 에녹 아라투스가 도착했다.

“폐하. 에녹 아라투스 후작 들었습니다.”

“들라 하라.”

아가사는 이윽고 안으로 발을 들인 사내를 보며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이 식사를 할 기회를 놓쳐서 아쉽기도 했지만.

‘황제와 개인적인 오찬을 가지면 그에게도 도움이 되니까. 참아야지.’

점심을 함께 들 기회는 이후에도 있을 터였다.

“어서 오게, 아라투스 후작.”

“어서 오세요, 후작님.”

오면서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에녹은 별말 없이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부르심을 받잡고 왔습니다, 폐하.”

“그래, 후작. 아가사에게 듣자 하니 이번 신혼여행이 그리 좋았다지 뭔가.”

찰나 에녹의 시선이 아가사를 향했다. 황제가 뒷말을 이었다.

“내, 새 영토와 팔라비 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자네를 불렀네. 아무래도 군사적인 식견으로 후작을 따라갈 자는 이 제국에 없지 않겠나? 하하하!”

아가사가 웃으며 황제에게 권했다.

“폐하. 우선 앉혀 놓고 말씀하시지요. 음식도 같이 들면서 들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

“아차, 앉게, 후작. 자,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그날, 황제의 오찬은 무려 3시간에 걸쳐 오랫동안 이어졌다. 궁정에서 에녹 아라투스 후작의 위상이 더욱 상승한 것은 덤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아가사는 에녹을 통해서 황제에게 받은 금 50만 카르와 올해 아라투스의 기존 영지에 대한 면세 혜택을 전달했는데 그 소식을 받은 행정관, 콘라드가 뛰면서 좋아했다는 소식을 휴버 경에게 전해 들었다.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

이틀에 걸친 특별한 황궁 무도회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무더위가 살짝 가시기 시작한 늦여름.

근처 산으로, 강으로, 별장으로 휴양을 떠났던 귀족들의 수도 귀환이 시작되었다.

하나둘 모이는 귀족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파벌끼리 모여 수도를 비운 사이 일어났던 일들을 교류하는 것이었다.

아가사의 결혼 이후 가장 큰 화제는 당연하게도 또다시 아가사 노빌리스였다.

마이뉴코르 제국과의 무역 협정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켜 황제를 크게 만족시켰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치하의 의미로 황궁 무도회가 이틀로 늘어났다는 소문도 빠지지 않고 함께 퍼졌다.

소문이 수도를 세 바퀴쯤 돌고 한 번쯤 더 돌자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아가사는 오전 동안 욕조에서 우유 목욕을 하고 향유 마사지를 받았다.

에녹과 부부가 되어 참석하는 첫 무도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만큼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촉촉하고 부드럽게 가꿔진 아가사가 거울 앞에 앉으며 물었다.

“그이는.”

“준비를 마치셨답니다.”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1시.

에녹의 준비가 끝났다면 이제 이쪽만 마무리하면 된다. 아가사는 안심하고 단장을 시작했다.

굵은 컬을 넣어 등허리까지 늘어뜨린 금발.

투명한 흰 피부와 화사한 색감의 눈 화장이 우아한 자색 스타티스 같은 눈동자를 돋보이게 했다.

입술에 붉은 꽃물을 들이고 긴 속눈썹까지 살짝 위로 올리자 아름답던 얼굴이 한층 화려해졌다.

“어떠세요, 마님?”

“마음에 들어. 예쁘다.”

“그럼 이제 옷을 가져올게요.”

하녀들이 미리 선택해 둔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 등을 가져왔다. 오늘 입을 것들은 전부 에녹과 함께 일전에 마담 샬레트의 의상실에서 맞춘 것들이었다.

희고 고운 원단에 자잘한 문양을 함께 수놓아 만든 것.

둥근 어깨선과 빗장뼈를 드러내고, 살짝 파인 상의가 허리께에서 부드럽게 조인 뒤 풍성하게 퍼지는 치맛단이 매력적이었다.

거울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아름다운 귀부인이 비치고 있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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