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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32)

22화.

다그닥, 다그닥-

천천히 대로를 가로지른 마차는 수도의 외성벽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속력이 붙었다.

너른 들판과 농장, 목초지 등을 지나면 군데군데 형성된 마을이 눈에 띄었는데.

근처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며 사는 평민들의 마을이었다.

때때로 행상이나 상인들이 머무는 탓에 저런 곳에는 숙박을 받는 곳이나 여관이 있었다.

아마 저런 마을 중 하나가 오늘 저녁, 그들이 머물 둥지가 될 것이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잠깐 멈춘 것을 제외하고 꼬박 반나절을 쉼 없이 달린 행렬은 해가 저물기 전, 제법 큰 규모의 마을에 닿았다.

미리 선발대의 연통을 받은 마을 앞에 촌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저희 마을에 묵어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여관과 숙박 가능한 집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좋아. 여기 여관은 어디 있나?”

“이쪽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밖에서 기사 하나가 촌장과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곧 마차가 움직이더니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주군. 마님.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부단장인 휴버 경이었다.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아가사는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낡았지만 평범한 2층의 중급 여관이었다.

순간 주위에서 약간 긴장된 공기가 느껴졌다. 에녹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차에 잠자리를 마련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괜찮아요. 저도 장거리 여행은 제법 익숙한 편인걸요.”

가끔 영지 순회를 하거나 국외에서 결혼해야 했을 때.

늘 좋은 여관, 귀족의 저택에서 묵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불가피한 상황일 경우, 아가사도 이런 여관에서 묵거나 야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게 된 것은 야숙보다야 건물이 낫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전을 따졌을 때도 객실이 나았다.

“기사들이 경계를 서기에도 제가 객실에 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제 방은 어딘가요?”

“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님. 이쪽입니다.”

조금 편안한 얼굴이 된 휴버 경이 앞서서 여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1층은 식당 겸 여관, 2층은 온전히 여관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약간 삐걱거리는 계단에 에녹이 아가사의 팔을 조심히 붙들었다.

휴버가 안내한 곳은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의 끝 객실이었다.

“여기가 가장 좋은 방이라더군요. 또 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전을 살피기에도 길목이 좁은 곳이 좋을 것 같아 이 객실로 준비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제시?”

“예, 마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측근 하녀들을 비롯한 노빌리스의 하녀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객실을 다시 한번 청소하고 내부 물품을 교체하는 작업이었다.

바닥에는 보드라운 카펫을 깔고.

창가에 커튼도 달고 침대의 침구마저 아가사가 즐겨 쓰는 것으로 바꾸자 객실에 제법 아늑한 기운이 돌았다.

“기다리는 동안 저녁을 들면 될 것 같아요. 남편 방은 어딘가요?”

“아, 그, 주군의 방도 저쪽 끝 객실입니다.”

휴버가 얼떨떨한 얼굴로 반대쪽 끝 방을 가리켰다. 시선을 받은 아가사의 측근 하녀, 제시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후작님의 객실도 확실히 살펴 두겠습니다.”

“그래, 제시. 부탁할게.”

아가사는 에녹의 팔을 잡고 뒤돌아섰다. 점심은 들판에 앉아 저택에서 챙겨 온 간단한 샌드위치로 때웠기에 저녁은 제대로 먹고 싶었다.

“저는 오늘 저녁은 통구이가 좋은 것 같아요. 당신은요?”

약간 생소한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와 같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요리사에게 그렇게 일러둘게요.”

그날 저녁은 신선한 재료가 듬뿍 들어간 버섯 수프와 으깬 청을 넣은 샐러드, 닭구이와 흰 빵, 후식으로 나온 과일과 와인 한 잔이었다.

주위에 앉은 아라투스가의 가신들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아가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막 안주인이 입성하면 흔히 생기는 문제지.’

시간이 지나서 바뀐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저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존재에 적응할 것이다.

그 증거로 곁에 앉은 에녹은 별말이 없었다.

“맛있네. 요리사에게 잘 먹었다고 전해 줘.”

“예, 마님.”

식사를 마치고 정리가 끝난 방으로 돌아온 아가사는 문 앞에서 에녹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앞으로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약 열흘.

그 여정 중에 성은 세 곳밖에 없었고 한 곳은 배를 탈 항구 도시였으니 앞으로의 여정은 대부분 야숙이라 보아야 했다.

“잘 자요, 에녹.”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가사.”

종일 마차를 타느라 피곤했던 아가사는 금방 씻고 잠이 들었다.

아침은 일찍 찾아왔다.

아라투스 기사단의 제2부단장, 휴버 카르웬은 아직 20대인 젊은 나이가 무색하게도 전장에서 10년을 구른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기마술에 능했고 빠른 기동과 추적 등의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 에녹의 신임을 받는 승리의 주역 중 한 명이었는데.

갓 성인이 된 나이부터 기사로서 온갖 변수와 상황에 맞닥뜨려 봤던 그는 지금 꽤 생소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님, 아가사 노빌리스로 인한 변화 때문이었다.

“부단장님. 저녁 식사입니다.”

“어, 그래.”

휴버는 기사가 가져온 음식을 받아 들었다.

큼직한 고깃덩이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수프와 잘 익은 소시지, 채소, 매콤한 소스가 뿌려진 빵이 놓여 있었다.

휴버 곁에 무리 지어 앉은 기사들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안주인께서 들어오시니 뭐가 많이 다릅니다.”

“그러게.”

휴버는 저도 모르게 동의했다.

수도를 떠난 지 벌써 여섯 날.

일견 평범한 식단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지금 허허벌판에서 야영 중이었다.

이럴 때마다 마른 음식이나 잡탕 수프 같은 것을 먹어 왔던 기사들은 이 변화가 한 몸에 와닿았다.

“처음엔 그냥 마님께서 힘들지만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휴버가 고깃덩이를 씹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주변 기사들이 반응을 보였다.

“그,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죠?”

“일 처리가 굉장하시던데. 여기까지 오는데 식수건 음식 재료건 문제가 생기는 걸 못 봤어.”

“체력 관리도 훌륭하시고.”

“음, 그것과 별개로 마차 여행이 힘들어 보이시긴 했지만.”

“어쨌든 이동에는 별문제 없고 말이지.”

어느덧 아가사 노빌리스는 아라투스의 기사들 사이에서 무척 대단한 마님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만만치 않으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완벽하시기까지 하다니!

심지어 삭막하기만 했던 주군의 상태도 안주인이 들어온 뒤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표정도 다채로워지고 분위기도 부드러워지시지 않았나.

“아무래도 우리는 엄청나게 좋은 마님을 모시게 된 것 같다.”

휴버는 다시 한번 큼직한 고깃덩이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기사들이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아가사가 생각하기에도 아라투스가의 가신이며 기사들의 분위기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무렵.

행렬은 수도를 떠난 지 8일째 되는 날, 옛 국경 지대를 통과해 새 영토에 진입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탓에 높다란 옛 국경 성벽을 기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행렬은 아직 재건 중인 마을에 들르기보다 바로 항구 도시, 성 앙트라르로 향했다.

황제가 동대륙과의 교역을 위해 최우선으로 복구를 진행하고 임시 영주 대리까지 파견한 덕에 록스바드 제국의 새로운 최동단은 거의 예전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라투스의 행렬이 성 앙트라르에 당도했을 때.

해안을 감싸며 형성된 도시의 외성 문 앞에는 임시 영주 대리, 솔라노 남작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라투스 후작님, 아라투스 후작 부인. 성 앙트라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도를 떠난 지 딱 10일째 되던 날이었다.

에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남작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곳에 노빌리스가의 함선이 도착한 것으로 알고 있소만.”

“며칠 전에 도착했습니다. 언제든 출항하실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정박해 두었습니다만, 바로 보러 가시겠습니까?”

“그러지.”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가사는 남작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며 뒤돌아섰다.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춰 온 에녹의 손을 잡으며 제 보좌관, 에셀 마스로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가는 길에 괜찮은 상인을 수배해요. 솔라노 남작의 가신에게 도움을 받으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식재료와 식수, 약초 쪽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리고 이번 호위로 차출된 제국 해군 장교가 누군지 알아보고 가문 산하 해군 명단과 선박 내부 지도도 가져다줘요.”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그 외에 측근 하녀들에게도 몇 가지 사항을 지시한 아가사가 에녹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곧 나타난 에셀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전달했다. 유쾌한 얼굴로 서 있던 부단장, 휴버 카르웬이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주군. 마님.”

곧 앞서 움직이는 남작의 마차를 따라 행렬이 움직였다.

오래간만에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달리는 마차는 흔들림 없이 매끄러웠다.

아가사는 한결 편한 안색으로 제국 해군 측 자료부터 넘겨 보았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었다.

「통솔자 : 제국 동부 해군 사령관, 카엘로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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