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가사는 여자에 환장한 두 번째 남편의 추태에 천천히 질려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저건 누구지?’
새하얀 은발에 탁한 자주색 눈을 가진 사내아이 하나가 궁전 홀 중앙에 서 있었다.
기가 막혀 물었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페르난드와 비슷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아이는 그의 사생아임이 틀림없었다.
‘비 저하, 저하께서 신경 쓰실 만한 신분이 아니옵니다.’
‘황자 저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페르난드가 처리해야 할 만한 일이라는 소리로구나.’
여자와 뒹구는 것 외엔 하는 일이 없는 사내가 신경 쓰는 일이란 뻔한 것이었다. 아가사는 필사적으로 페르난드를 변호하려 드는 입들을 막았다.
‘되었다.’
그길로 방으로 돌아가 대부, 워밀라이 2세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페르난드가 들이닥친 것은 그 편지가 막 완성된 직후였다.
‘아가사, 나의 어린 비.’
헝클어진 머리에 대충 셔츠만 걸친 모양이 침대에서 막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코끝으로 그와 함께한 여성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스쳤다. 역한 향수 냄새를 맡은 아가사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아단 녀석을 봤다면서?’
페르난드는 낄낄 웃으며 아가사의 책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네 눈에 띄게 하지 말라고 말해 두는 걸 깜빡했네. 그렇지만 아가사, 나도 피해자야.’
그러더니 변명도 되지 못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 깜찍한 것이 날 속이고 애를 낳았다지 뭐야. 어찌나 깜짝 놀랐던지!’
그는 자신도 피해자라며 우는 시늉을 했다. 아가사가 들은 것 중 가장 뻔뻔한 망발이었다.
‘놀라셨다고요.’
‘정말 그랬다니까?’
페르난드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아가사의 손을 잡아 제 가슴께에 올렸다.
‘놀라서 쿵쿵대는 게 느껴지지 않아?’
말과는 달리 심장은 평온하기만 했고 손바닥에 닿은 체온은 아가사의 화만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마이뉴코르 제국의 계승권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평생 이런 인간과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래서 아가사는 황제에게 보낼 편지에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
「저는 반드시 이혼해야겠어요, 폐하.」
그리고 몇 달 뒤 아가사는 록스바드 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두 번째 이혼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에서 빠져나온 아가사는 불쾌감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결혼식의 피로연이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선 웃으며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아가사가 안토니와 춤을 추는 동안 에녹은 다른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대다수는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었다.
가장 큰 거물은 제국에서 제일 넓은 곡창 지대를 소유하고 있는 테아르 백작이었다.
제국 최대의 성, 수도에서 소비되는 식량의 반이 테아르 백작의 손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궁에도 테아르 백작의 곡식이 들어오는 만큼 황제의 신임도 두터운 자였다.
아가사는 그 테아르 백작이 에녹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떼었다.
“에녹, 오래 기다리셨어요?”
황태자와의 춤을 끝낸 피로연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테아르 백작을 위시한 중앙 귀족들의 표정이 변했다.
현재 명문가로서의 세를 회복 중인 아라투스도 좋은 교류의 대상이었지만 노빌리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여섯 번째 이혼 후 벌써 석 달.
궁정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노빌리스가는 중앙 귀족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관심과 친교의 대상이었다.
“아닙니다, 부인.”
에녹은 자연스럽게 아가사의 손에 팔을 내어 주고 그녀를 대화 가운데로 이끌었다.
“테아르 백작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는군요.”
“어머, 그래요?”
백작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에 제가 드린 결혼 선물이 바로 재배에 성공한 그 작물이었습니다, 후작 부인.”
아가사가 백작을 바라보자 그는 새 작물의 장점을 늘어놓으며 노골적으로 자랑을 거듭했다.
“남부 지방에서 자생하던 밀을 들여와 개량에 성공했지요.”
보통 밀보다 알곡이 훨씬 크고 달다며 한참 떠들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혼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첫 수확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이 곡식을 계기로 더 좋은 소식이 들린다면 그것 또한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가사는 테아르 백작이 새 작물을 핑계로 아라투스에, 더 나아가 노빌리스에 선을 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국 제일의 곡창 지대에서 대거 수확한 곡식량이 적을 리가 없었다.
요즘 노빌리스 상단에서 엄청난 양의 밀을 사들여 기존 아라투스 영지와 새 아라투스 영지에 공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리 나오는 것일 터.
“요즘 밀에 관심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언제 한번 저택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후작님.”
당분간 꾸준한 밀 공급이 필요한 남편에게 제국 제일의 곡창 지대를 가진 테아르 백작은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뭐,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이니까. 마음에 찬다면 고개를 끄덕이겠지.’
예상대로 그 이면에 숨겨진 말을 다 이해했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맛일지 기대되는군. 선물 잘 받겠소, 테아르 백작.”
다녀오면 계약서를 검토해 봐야겠다.
테아르 백작을 뒤이어 우호적으로 나온 것은 재무 대신인 몰피니에 백작이었다.
“두 분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는 새 무역로가 될 영토를 확보한 에녹과 마이뉴코르 제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아가사의 결혼이 몹시 흡족한 눈치였다.
세수가 증가하면 권력이 강해지는 재무부의 특성상 재무 대신은 열정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다.
“근래에 이보다 더 멋진 결혼식은 보지 못했습니다.”
역대 재무 대신을 맡아 온 몰피니에가의 등장에 호시탐탐 끼어들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연 노빌리스 영애, 아니, 이제 아라투스 후작 부인이 되셨지요. 과연 아라투스 후작 부인이십니다.”
아가사는 에녹의 팔에 의지한 채 서서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아부를 듣고 있었다.
“아가사 부인, 저희에게도 시간을 내어 주시겠어요?”
몇 차례의 무리가 오간 뒤 다가온 것은 아가사의 최측근들이었다.
아가사는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이리스 도뮤니아 후작 부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리스 부인.”
“오늘 참 아름다우세요, 아가사 부인. 결혼 축하드립니다, 후작님.”
이리스 부인의 인사말이 끝나자 케이트 에블라인 공작 영애가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너무 들어서 새롭진 않으시겠지만 오늘 결혼식은 정말 멋졌어요.”
“호호호. 당장 다음 주부터 있을 살롱의 장식부터 모두 바뀌게 되지 않을까요?”
결혼식에 대한 칭찬에 또 다른 측근인 실리아 카멜론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급하게 준비한 결혼식인데 그리 칭찬해 주시니 기쁘네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걸요. 전 웨딩 아치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전 야외에 장식한 수정이 정말 좋았어요. 제 정원도 그렇게 꾸미고 싶은 마음인걸요.”
그 뒤로도 결혼식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 결혼식이 얼마나 멋졌는지, 신랑 신부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에 대한 소감이 오갔다.
아가사는 쏟아지는 칭찬 속에 에녹을 적절히 들이밀며 측근들에게 일곱 번째 남편을 각인시켰다.
“후작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라투스가의 가신들을 저택까지 데려와 직접 일을 거들어 주셨답니다.”
협조적인 에녹의 일화를 들은 또 다른 측근, 바네사 베아트리츠 후작 영애가 두 눈을 반짝였다.
“어쩜. 아라투스 후작님은 세심하신 분이시군요.”
“제 결혼식을 준비하던 때가 생각나네요. 어머니와 둘이서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몰라요.”
“신혼여행은 먼 곳까지 가신다면서요?”
“맞아요. 가는 김에 영지의 공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확인하고 올 생각이랍니다. 이제 무역의 중심지가 될 텐데, 조금은 신경을 써 주어야 할 것 같아서요.”
측근들은 물론 주변을 둘러싼 귀족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아직 협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돌려서 언급이 나왔다는 것은 이제부터 이 판에 끼어들고 싶다면 슬슬 조건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아, 아, 그렇지요. 참, 섬을 정비하실 때 혹시 투자는 받지 않으시나요?”
“도시 증축과 항구 정비에 많은 금이 들어갈 것 같은데요. 분명 한 손 거들 귀족들이 무척 많을 거예요, 부인.”
“글쎄요. 저는 일단 내정에 힘쓸 생각이라서요. 바깥일은 남편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순간 모든 귀족의 시선이 에녹을 향했다. 물끄러미 제 곁에 붙어 선 아가사를 내려다보던 에녹은 그녀를 조금 더 당겨 안으며 입을 열었다.
“현장을 보지 않고 결정할 문제는 아니군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 그, 그렇지요. 잘 다녀오세요.”
“재미있게 보내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그 뒤로 더 적극적이 된 손님들을 몇 시간 더 상대하고서야 피로연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