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어서 오십시오, 아가사.”
무심한 낯을 해서는.
그러고도 잘생긴 사내는 꽃마저 아름답게 소화했다.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다정한 음색과 불시에 들린 이름이 아가사의 귓불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건, 반칙이야.’
분명 수도 없이 많은 꽃을 받았었는데.
이토록 가슴이 뛰고 기쁜 것은 처음이라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에녹?”
“네. 준비한 꽃이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당신과 어울리는 것을 다 고르다 보니 꽃다발이 생각보다 훨씬 커져 버렸지 뭡니까.”
그가 성큼, 다가와 건네준 꽃다발은 확실히 아가사가 품 안에 받아 들기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컸지만.
“……딱 좋아요.”
비강을 가득 채우는 진한 꽃향기가 이 남자처럼 묵직하고 좋았다. 사뭇 다정하게 입가를 휜 남자가 그대로 아가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뒤에 서 있던 측근 하녀들도, 황궁의 궁인들도, 뒤따라왔던 황가의 기사들도.
모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가사.”
그가 깊이 아가사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비록 우리가 만난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지킬 준비가 되었음을 맹세합니다. 그러니.”
“…….”
“내 청혼을 받아 주겠습니까?”
그가 겉으로 결혼을 언급한 이유는 뒷공작을 펴고 있을 그의 친족들을 조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뿐인 청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리도 진중한 청혼이라니.’
아가사는 그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겼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맞잡은 채 그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충분할 것 같다고 했잖아요.”
살짝 발돋움해 가까워진 남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서 달콤한 소리가 울렸다.
“그 청혼, 받아들일게요.”
아가사는 미동도 없이 짙게 내려다보는 사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행복한 결혼이 될 것 같았다.
아가사는 가장 크고 예쁜 꽃병을 골라 꽃다발을 아름답게 장식해 두었다.
개중 종류별로 한 송이씩 골라 분류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액자로 만들 거니까 곱게 말려 줘. 알겠지?”
“예, 아가씨.”
에녹은 청혼이 받아들여진 이후로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물끄러미 닿아 오는 시선에, 아가사는 그의 팔에 손을 얹고 궁 밖으로 이끌었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 몸 상태도 나쁘지 않으니 황궁의 화원에라도 나가 볼 생각이었다.
“산책, 괜찮으시죠?”
정원에 나오니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이 익숙한 아가사도 눈치챌 만큼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 에녹이 정식으로 청혼했다는 소문이 벌써 파다하게 퍼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가사는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을 겪어 왔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았다.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지.
구경꾼들을 없는 사람 취급 하며 움직이자 에녹도 아가사의 의도를 눈치채고 따라 주었다.
아가사의 궁에서 화원은 멀지 않았다. 따스한 햇볕과 늦봄의 꽃, 초여름의 꽃이 어우러진 화원은 색색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곳곳에 있는 분수대에서 시원한 물이 솟구쳤다.
묵묵히 그녀를 에스코트해 온 에녹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은 겁니까?”
“그럼요. 이렇게 돌아다닐 만큼 멀쩡한걸요.”
에녹의 걱정 어린 한마디에 아가사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걱정해 주시니 기분이 나쁘지 않네요.”
생각 같아서는 이 기분을 더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가사는 손짓으로 수행원들을 멀찍이 물린 뒤 미리 챙겨 두었던 서류를 에녹에게 내밀었다.
“보실래요? 폐하께 바칠 대안책이에요.”
“이게 전에 말씀하신 동대륙 교역 건입니까.”
“네.”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천천히 종이를 넘겨 보던 찰나.
에녹의 시선이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춰 섰다.
“마이뉴코르 제국과의 협상에 그대가 직접 나서는 겁니까?”
“초반에 관계 정리할 때만요. 웬만하면 섬만 제공하고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폐하께서 원하시는 조건에는 제가 나서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그대가 나서야 할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말해야 하나 찰나 고민했지만 결혼할 사이이니 숨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다 조금만 알아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지금 마이뉴코르 제국과 우리 제국의 관계가 미묘해진 이유는 저와 페르난드 황자의 이혼 때문이에요.”
“…….”
“물론 거의 10년 전 일이고 그쪽에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제가 나서는 게 여러모로 보기 좋아서요. 협상에도 유리할 거고…….”
어느덧 보고서에서 시선을 뗀 남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이미 여섯 번이나 결혼하고 이혼했던 그녀라도 청혼받은 날, 전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일 뿐인데도 말을 마무리하기 어려웠다.
“음, 그래서 한번 그 섬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제 예상으로는 폐하께서 빠른 시일 내에 그곳에 다녀오라고 하실 확률이 높고요.”
“……그렇군요.”
놀랐을까?
아가사가 미동도 없는 그의 낯을 조용히 살펴볼 때였다.
“영애.”
인기척을 내며 가까이 다가온 황실 기사가 멀찍이 선 시종을 가리켰다. 시중부 소속의 시종이었다.
“아라투스 후작님. 노빌리스 영애.”
차례로 예를 갖춘 시종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이틀 뒤 오찬을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옆에 계신 아라투스 후작님도 함께 초청하셨습니다.”
“그래?”
분명 에녹이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리라.
일단 알현을 허락받은 이상 계획의 9부 능선은 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시종을 물린 아가사가 활짝 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잘됐네요. 그럼 이틀 뒤에 폐하의 궁에서 보도록 할까요?”
“아니요.”
빠른 부정에 아가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잠시 내려다보던 그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데리러 갈 겁니다. 그날 준비하고 궁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
반응을 살피듯 떨리는 자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사내가 뺨에 입을 맞췄다.
말랑한 입술이 보드라운 피부에 촉, 닿았다 떨어졌다.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아가사.”
아가사는 떨리는 눈동자를 긴 속눈썹 아래로 감췄다. 방금 전, 그녀도 스스럼없이 했던 짓이었건만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청혼은 이목이 적은 궁에서 이루어졌지만 입맞춤은 탁 트인 화원에서 받았다.
소식은 순식간에 거대한 해일이 되어 수도 전역을 강타했다.
아가사 노빌리스의 일곱 번째 결혼 소식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수도 아라투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평소처럼 말을 몰아가면서도 에녹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금 한 행동에 대한 생각이었다.
충동적으로 뺨에 입을 맞췄다.
반지 대신 약지에 입을 맞췄던 그때와 달리 정제되지 않은 접촉이었다.
뺨에 입을 맞추고, 미묘한 불편함이 기묘하게 만족감으로 뒤바뀌는 것을 느끼며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스스로 당혹감을 느꼈었다.
생각해 보면 첫 만남 때부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던 여자였다.
지치고 가녀린 낯을 하고서는.
검을 채 놓기도 전에 뒷수습을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어색하게 얼굴을 쓸어내리던 에녹은 긴장이 풀리자마자 또 문득 떠오르는 장면에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가 청혼했을 때. 그녀가 살짝, 웃으며 발돋움해 오던 순간.
뛰어난 기사의 동체 시력은 사르르, 접히던 눈가와 고운 입술, 환하게 반짝이던 그 모든 것을 찍어 내듯 그림처럼 담아냈다.
떨리던 눈동자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마지막으로 표정을 감춰 버렸던 긴 속눈썹의 움직임까지.
‘그렇게 예뻤던가?’
아가사 노빌리스가 아름답다는 것은 분명 알고 있었는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와닿던 순간이었다.
“……신경 쓰이는군.”
“예?”
순간 뒤따라오던 아라투스의 기사들이 귀를 쫑긋 세웠지만 에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수도에 쫙 퍼진 아가사의 일곱 번째 결혼 소식에 열불이 터진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3개월 전, 아가사가 여섯 번째 이혼을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던 네우타 선선대 공작 부인, 네우타 선대 공작 부인, 네우타 영애였다.
현 테오도르 네우타 공작의 어머니이자 일명 네우타 대부인이라 불리는 선대 공작 부인이 테이블을 세게 쳤다.
쾅!
“이혼한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또 결혼이라니!”
갑작스러운 이혼 소동에 휘말려 3개월째 네우타 공작 저에서 칩거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개중 가장 흥분한 대부인이 소리쳤다.
“어머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이러다 테오도르의 이름이 웃음거리가 될 판이에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가.”
그에 맞서 부드럽게 타이르는 사람은 현 공작의 할머니인 일명 네우타 노부인이었다.
“아가사, 그까짓 것이 제정신이라면 그럴 수가 있겠느냐? 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은 어림도 없지.”
“물론 저야 어머님을 믿고 있지만, 아가사 그 애의 세력도 만만치 않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