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지금도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자 없는 대출과 상단의 도움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제 목숨에 금 10만 카르의 가치도 없을까요?”
“…….”
엄청난 규모의 돈 소리에 그의 보좌관이 숨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당사자인 에녹도, 아가사도 서로를 덤덤하게 응시 중이었다.
‘물론 진짜 덤덤한 건 그뿐이겠지만.’
아가사는 미미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감췄다.
“……이건 제가 먼저 청해 놓고 후작님과 아라투스 기사단을 호위로 고용할 수 없게 된 파기 사유로 책정된 금액이기도 해요.”
잠깐 생각하던 사내가 그제야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이제 호위가 필요 없어지셨습니까.”
“네. 제가 곧 결혼을 하게 될 것 같아서요.”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아가사는 현 상황을 빠르게 인정했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틴다고 될 문제도 아니었고 또 이렇게 된 이상 이참에 남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남자가 일곱 번째 결혼 상대자가 될 확률도 가늠 중이었다.
그는 이미 한 가문의 가주였고 가족은 여동생 한 명밖에 없었다.
본신의 무력도 뛰어난 기사에 강한 기사단을 거느렸고.
막 수도에 입성했기에 아직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손버릇이 나쁘다는 소문도 들어 본 적 없었다.
‘분명 가신들이 준비해 올 명단에 포함되겠지.’
그럼 이번에는 이 남자에게 결혼을 제안하게 될까?
‘아직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여태껏 선택하기만 했지, 선택받는 상황에는 단 한 번도 놓여 본 적이 없는 아가사가 생소한 상태에 빠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록스바드 제국의 태양, 워밀라이 2세 폐하께서 드십니다!”
찰나, 인상을 찌푸렸던 아가사는 에녹과 시선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소 이른 등장이긴 했지만 황제의 행보를 알 수 있는 것은 황제뿐 아니겠는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후원으로 들어서던 황제가 에녹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췄다가 빠르게 다가와 앉았다.
“일어나라. 짐은 아가사를 보러 온 것인데, 아라투스 후작도 함께 있었군?”
“예. 영애의 초청을 받아 다과를 드는 중이었습니다.”
“차 좋지. 잠깐 짐도 머물렀다 가도 되겠느냐, 아가사.”
“그럼요. 제게 오히려 영광인 일입니다, 폐하.”
새 다과가 준비되는 사이 황제는 아가사의 몸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욕심이 많아서 문제였지, 기본적으로 황제도 아가사를 아끼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대녀를 향한 것인지, 노빌리스의 유일한 상속녀를 걱정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바쁘신 와중에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가요?”
“일은. 감히 짐의 대녀를 건드린 자들의 배후는 잘 찾고 있으니 이후의 문제를 논의하려고 들렀느니라.”
“아하.”
예상 밖의 이른 등장이었지만 아가사는 황제의 계획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신호라 여겼다.
이미 그녀를 건드린 흉수들의 본거지를 완파하고 거기서 찾은 증거로 배후 가문을 쫓고 있다는 소식은 귀족들을 통해 전해 들은 바였다.
이로써 강경하게 그녀의 목숨을 노렸던 친족 몇 가문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수월하게 황권의 지엄함을 세운 황제가 관심을 기울일 것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황제가 대놓고 아가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가사. 소식은 들었겠지? 흉수들은 모두 처형했고 습격을 사주했던 귀족들도 내,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잡아들이고 있느니라.”
“그럼요. 폐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는걸요.”
“그래서 말인데, 아가사야.”
온다. 안토니와 꼭 닮은 황제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슬슬 다음 결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냐? 이런 일이 있고 나니 네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이르기는. 이혼한 지 두 달이나 되었잖느냐? 네 상황이 이러한데 그 정도면 충분히 예의는 차렸다고 볼 수 있지.”
아가사는 황제를 의식해서 돌아보지 않았지만 찰나 곁에 있는 에녹을 의식했다.
귀족들은 사정에 의해 배우자가 죽은 바로 다음 날에 식을 올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놓고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 그녀의 상황을 숨김없이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가사가 생긋, 웃었다.
“혹시 생각하고 계신 상대가 있으신가요?”
“그럼! 내 벌써 후보들을 몇몇 찾아 놓았지! 네가 좋다 하면 당장 자리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럴 줄 알았다. 교역을 통한 세수입을 탐낸다더니, 벌써 심중에 후보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며칠 내로 안토니가 정확한 후보 명단을 가지고 찾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가사가 처연히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폐하.”
“응?”
“제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결혼에 자유를 주겠다 약조하셨지요.”
“그, 그랬지. 그렇지만 상황이 이러니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니? 기사단을 거느려야 습격이 와도 안전할 거고 또 남편을 대리로 내세워 친족들을 위협하기도 쉬울 거고…….”
황제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아가사도 결혼을 해 왔던 것이었고.
그러나 앞으로의 결혼 상대자는 모두 그녀가 골라야 했다. 한 번이라도 황제의 뜻에 휘둘렸다간 이후로도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가 고른 상대는 늘 그렇듯 그녀가 생각하는 남편감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아가사는 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지 않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뺨이 따가운 기분이었다.
“그건 알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결혼은 할 거예요.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점도 잊지 않을 거고요. 그렇지만 제가 좀 더 좋은 상대를 찾아 폐하께 제안을 드릴 수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해요.”
‘결혼도 할 거고, 선택권을 주면 내가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늘 그랬듯, 황제는 이 말을 기다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황제가 슬그머니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가사. 진심이겠지?”
“그럼요. 저는 항상 진심이었어요.”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짐이 이 일을 벌인 배후들을 모조리 처형할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해 보거라. 단, 짐의 마음에 차지 않으면 짐이 고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 것이야. 알겠느냐?”
“노력하겠어요, 폐하.”
아가사는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준비한 제안이나 남자가 황제의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수를 강구할 생각이었다.
시각을 확인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짐은 이만 가 보마. 몸조리 잘하고.”
“살펴 가세요, 폐하. 곧 찾아뵙겠습니다.”
“오냐. 아, 아라투스 후작. 반가웠네. 다음에 함께 식사라도 들지.”
에녹이 살짝 묵례하는 것을 끝으로 황제가 바쁘게 사라졌다. 일정 가운데 시간을 낸 것이니 이 정도면 오래 머물렀다고 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린 아가사가 한쪽으로 치워 놓았던 제안서를 도로 끌어왔다.
“그럼 이제 마저 이야기를 해 볼까요?”
“…….”
다시 앉으려는데, 남자에게서 응답이 없었다. 아가사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후작님?”
에녹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첫인상은 가녀렸고 그 이후 인상은 당찼으며 오늘은 또 황제를 쥐락펴락하는 놀라운 모습까지 보여 준 여자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무리하는 건 여전해서.
에녹은 황제와의 신경전 이후, 눈에 띄게 피부가 창백해진 그녀를 보며 선 자세에서 그대로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
“이건 제가 가져가서 다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돌아가시는 건가요?”
누군가를 붙잡는 것은 아가사로서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빤히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뺨을 툭, 건드려 보였다.
“낯빛이 좋지 않습니다. 이만 안으로 들어가서 쉬십시오, 영애.”
“……!”
멍하니 서 있던 아가사는 그가 돌아서고 나서야 뒤늦게 반응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며칠 후에 다시 초대장을 보내 드릴게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보좌관과 함께 후원 밖으로 사라졌다.
아가사는 그제야 화끈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었다.
무심한 눈을 해서는.
망토를 여며 주었던 것처럼 툭, 떨어진 배려가 이상하게 아릴 정도로 달달한 기분이었다.
“……좋은 것 같아.”
아무래도 단단히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벌써부터 다음에 만날 것이 기대되는 것을 보면.
* * *
수도 아라투스 저택으로 돌아온 에녹 아라투스는 곧장 가신들의 소집을 명했다.
집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몸을 묻은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집사가 조용히 차를 준비하고.
보좌관, 존은 책상 위에 제안서를 올려놓으려다 머뭇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깨끗하게 비워져 있던 책상에 또 어마어마한 수의 서신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향긋하게 퍼진 차향에 고개를 든 에녹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내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군.”
“예상하신 바가 맞습니다. 오늘 새로 들어온 소개장입니다.”
아가사 노빌리스가 특별할 게 아니었다. 그도 요 며칠 계속 쏟아진 결혼 적령기 영애들의 소개장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영식들의 소개장도 있습니다. 이자벨 아가씨 앞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
에녹은 말없이 집사, 벤이 내려놓은 찻잔에 손을 뻗었다.
전장이 결코 쉬웠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차라리 검을 들 때가 개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제 겨우 가문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중인 그가 이 정도인데 권력의 중심에 선 아가사 노빌리스는 얼마나 바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