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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132)

6화.

에녹은 그런 황제의 행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제는 황태자가 중년이 되면 가질 법한 외양을 고스란히 하고 있으면서 정작 황태자와는 성격이 매우 많이 달랐다.

‘황태자는 아가사 노빌리스에게 꽤 정이 든 것 같았지.’

그러나 황제는 정보다 이득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하긴, 정말로 아꼈다면 아프다는 지금도 정략혼을 떠올렸을 리는 없나…….’

문득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피에 젖은 얼굴로, 떨리는 손에는 검을 꼭 쥔 채.

아가사 노빌리스는 전장 한복판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가녀린 낯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 의외로 당당했던가?

열이 올라 끙끙거리는 상황에서도 뒷수습에 신경을 쏟던 여자였다.

약간 들뜬 얼굴로 아가사의 다음 남편감을 고심하던 황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태자는 물러가도 좋다. 아라투스 후작, 그대도 수고가 많았네. 내, 후작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금 3,000카르를 내리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에녹은 그길로 황태자와 함께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안토니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당분간 안전해지나 했더니. 내 이럴 줄 알았지.”

“…….”

“아, 후작. 그대는 그만 물러가도 좋아. 아가사가 회복하면 같이 또 보도록 하지. 오늘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전하.”

에녹은 발길을 돌려 천천히 황제 궁을 빠져나왔다. 이미 아가사 노빌리스의 습격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탓에 주변에는 온갖 궁인들과 귀족들 일색이었다.

“주군!”

황제 궁 밖에서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아라투스 기사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전투를 끝마치고 곧장 이동한 탓에 그들은 전부 흙먼지투성이였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별다른 일은 없으셨고요?”

에녹은 제1부단장, 레온 타크란에게서 말고삐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바로 돌아가자.”

“예!”

수많은 시선 속에서 에녹 아라투스는 기사단을 이끌고 저택으로 귀환했다.

그로부터 하루 뒤.

아라투스 가문이 아가사 노빌리스의 은인이 되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을 뒤덮었다.

그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로 늘 넘치리만큼 대가를 지불해 왔던 것이 노빌리스 가문이었으니.

그것은 황제가 습격자의 배후를 파내기로 했다는 결정보다도 더 대단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곧 아라투스 후작가로 귀족들의 서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퍼진 지 단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 *

아가사는 꼬박 3일을 앓다 일어났다. 낙마하면서 어디 부러진 곳이 없다는 것은 천운이었지만 그 여파가 고스란히 덮친 탓이었다.

고열이 겨우 내려가고 상처가 아물어 적당히 운신이 가능해졌을 즈음.

아가사는 황태자, 안토니 록시바와 궁 후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예정된 일정은 아니었다. 안토니가 갑자기 들이닥쳤을 뿐.

“조금만 있다가 가세요.”

“왜. 누가 와?”

“아라투스 후작을 초청했어요. 오겠다는 답장도 왔고요.”

아가사의 앞에는 피를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 약차가, 황태자의 앞에는 황금빛의 과일차가 놓였다. 안토니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제 겨우 일어났잖아.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지금도 늦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귀족이랑 결혼하지 않으려면 빠르게 움직여야죠.”

정신을 차린 아가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상황 파악이었다. 노빌리스의 유일한 상속녀가 죽을 뻔했으니 황제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예상대로 황제는 이번 사건만큼은 넘어가지 않겠노라 천명했고 또 많이 일렀지만 이 사건을 핑계로 아가사의 결혼을 언급했다.

아마 며칠 내로 직접 결혼 얘기를 꺼내러 오지 않을까 싶은데.

“후보들은요?”

“뽑히고 있어. 아바마마께서 이번에는 동대륙과의 무역 쪽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야.”

안토니는 찻잔 입구를 문지르며 냉소를 지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항구와 영토를 가지게 된 황제는 이제 교역을 통한 세수입을 탐내고 있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동대륙이면, 거점으로 쓸 섬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지. 그러니 그쪽에 영토를 가진 귀족을 눈여겨봐야 할 거야. 네 뜻대로 결혼을 틀 거라면 대체품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절대자의 의지를 꺾는 일이다.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하려면 흡족할 만한 대안을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가사가 웃으며 깃펜을 들었다.

“이번에도 도와주실 거죠? 정확한 후보가 나오면 제게 꼭 알려 주셔야 해요.”

“황태자를 밀정으로 써먹다니 제법이야.”

“원하시는 말도 미리 드렸는데 사냥은 하지도 못했잖아요. 그거 대신 해 준다고 생각하세요.”

“젠장. 그놈들 때문에 일을 두 번 하게 생겼네?”

아가사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채워 나갔다.

가신들에게 새로운 동대륙과의 무역로로 쓰일 뱃길을 상정해 보라는 것과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노빌리스령에 있는지, 있다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등을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드러운 백금발을 늘어뜨린 채, 방만한 자세로 대놓고 서신을 응시하던 안토니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누구와 결혼하려고?”

“글쎄요. 이렇게 빨리 결혼하게 될 줄은 몰라서.”

“마음에 드는 남자는 있고?”

“…….”

이 질문만큼은 아가사도 무심하게 넘기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

그런 어중간한 단어가 아니라 훅 빠져든 사내가 이미 있었다. 열이 올라 판단이 흐려졌을 때와는 달랐다.

문득 그 남자를 떠올렸고.

햇빛 아래 청금처럼 비산하던 머리칼과 야성미와 수려함이 어우러진 얼굴이 생각날 때면 저도 모르게 귀가 붉어졌다.

때때로 나직하던 음성도 기억났다.

-이 와중에도 그런 걸 걱정하는 겁니까.

무심하고 냉정하던 손속과 달리 달콤한 기색도 있던 사내였다.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에녹 아라투스를 떠올린 아가사는 미세하게 뺨을 붉히고 나서야 생각을 끊어 냈다. 어느새 편지를 쓰던 손도 멈춰 있었다.

“뭐야, 아주 없진 않은가 봐?”

“조용히 하세요.”

“뭔데? 누군데? 언제는 나 포함해서 제대로 된 남편감 따위 없다더니?”

아가사는 무시하고 서신을 마저 채웠다.

측근 하녀의 손에 완성된 편지가 들려 나갈 때까지,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하던 안토니는 맥이 탁 풀린 표정이었다.

“됐다. 알아서 해. 나는 정확한 후보 알려 주는 것 외에는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요.”

에녹 아라투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지는 그녀의 몫이다.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혹은 이 감정을 제대로 정의하고 싶어서 초청하긴 했지만 아가사는 곧 황제를 상대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확인도 해 보고 싶었다.

이 감정이 죽을 위기에서 잠깐 느낀 흔들림 정도는 아니었을까?

“영애. 초대하신 손님이 도착하였습니다.”

“이쪽으로 모셔 와.”

아가사는 옷차림을 정돈하고 시종장의 뒤를 따라 들어선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깊이 후드를 눌러쓰고 기사단 정복을 갖추었던 그때와 달리 사내는 단정한 예복 차림이었다.

‘……정장도 잘 어울리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땅을 딛는 발은 단단했고 한눈에 봐도 다리가 길어서, 금방이라도 이쪽에 닿을 만큼 보폭이 큼직했다.

보지 않아도 전신이 근육으로 다져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피부는 기사답지 않게 흰데 뺨을 가로지르는 자상 때문에 누구보다도 야성적이었다.

검을 들 때면 피비린내가 풍기면서, 지금은 무덤덤한 잿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금욕적인 분위기의 사내였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수고해, 아가사.”

“……살펴 가세요, 전하.”

홀린 듯 그를 쳐다보던 아가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은 귀 기울이지 않아도 이미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게 한순간만 지나가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토니가 후원을 가로질러 가며 에녹과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침착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아가사가 익숙하게 미소를 띠었다. 곧 테이블로 다가온 사내가 아가사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초대 감사합니다, 영애.”

“어서 오세요, 후작님. 제가 너무 늦게 초대장을 보냈을까요?”

“오히려 생각보다 일렀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많이 괜찮아졌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금방 황태자가 앉았던 자리가 정돈되고 새 다과가 준비되었다. 일전에 그가 둘러 주었던 망토는 감사 인사와 함께 에녹과 같이 온 보좌관, 존 위트니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아가사는 우선 준비해 온 목숨값부터 테이블에 올렸다.

“오늘 후작님을 모신 건 그때 도와주셨던 것을 보답하고 싶어서예요. 먼저 읽어 봐 주세요.”

“…….”

잠시 응시하던 사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팔락, 단정한 손가락이 서류 첫 장을 넘겼다.

그 안에는 아가사가 아라투스의 현 상황에 맞춰 준비한 보상이 들어 있었다.

금 10만 카르.

그 외 이자 없는 대출도 제공하고 노빌리스의 상단을 통해 올해 밀 수확 때까지 아라투스의 각 영지에 적정가의 곡물 공급과 나아가 특산물까지 매입하겠다는 제안이 정리되어 있었다.

“일단 제가 생각한 건 여기까지인데 따로 필요하신 정보나 물품이 있다면 요청해 주세요. 힘닿는 데까지 들어 드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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