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분담 작업
우린 계속 전진했다.
하지만 탑주가 장난이라도 쳐놓은 듯 층을 올라갈 때마다 흑기사가 한 명씩 나타났다.
첫 번째는 고오른.
두 번째는 요르.
세 번째는 티이라.
네 번째는 레오가 흑기사를 전담했고 젠킨스와 데카드, 짹짹이는 마지막 층.
탑주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흑기사를 처음부터 부수고 올라가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너무 많은 힘을 빼고 갈 것 같아 기각.
결국 일행 중 가장 메인 전력인 이 세 명이 가장 온전한 상태로 탑주에게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섯 번째 층을 오른 셋의 눈에 흑색 옥좌에 앉아있는 리치, 탑주와 그를 보좌하는 제미니가 들어왔다.
“기사를 한 명씩 마크하고 나머지 인원이 층을 오를 줄이야.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
“그것들에 준하는 무력을 가진 이가 이렇게 많다는 것 또한 정보의 부족이었습니다.”
제미니가 덧붙이자 탑주는 어쩐지 빙그레 웃는 것처럼 보였다.
“뭐 상관은 없다. 어차피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질 터이니.”
“유언은 그게 끝이야? 조금 더 길게 해도 상관은 없는데.”
“크하하하……. 네놈은 보면 볼수록 웃기구나. 좋아, 너는 정신만 뽑아내 가둔 후 평생 갖고 놀아주마.”
“해골바가지랑 친구 먹는 취미는 없어서 사양하지. 소환!”
방을 빛 무리로 가득 채운 소환 마법진들.
무우우우-
크아아아아-!!
크롬 엘리펀트와 엠버틱 와이번.
워낙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마수들이라 각각 세 마리만 소환해도 방이 꽉 찼다.
“호오……. 마수 소환사라. 이렇게까지 성장한 소환사는 보기 힘든데 말이야. 희귀한 걸 보는군.”
“잘 봐둬라. 네 더러운 인생에서 마지막 볼거리니까.”
데카드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 신호에 맞춰 와이번들의 전신이 뜨겁게 불타오르며 갑옷을 만들었고.
엘리펀트 또한 강철의 상아를 날카롭게 들이밀었다.
“가라.”
두구두구두구-
마치 북을 치듯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달려간 여섯 마리의 8서클 마수.
이것들로 한 방에 승리를 가져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타격은…….
“쓸데없군.”
스아아아아아아-
탑주가 손을 움직여 전방을 크게 쓸어내렸다.
그와 함께 뻗어 나간 흑무.
마수들은 그 흑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워하더니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데카드는 빠르게 마수들의 몸을 마나로 확인해 보았다.
“인간계로 소환하면서 만들어낸 마나의 육체를….”
먹고 있었다.
흑무 안에 담긴 아주 미세한 흑마력 입자들이 마수들의 마나를 마구잡이로 먹어치웠다.
그러니 마나를 원료로 움직이는 마수의 입장에선 쓰러질 수밖에.
“너희들의 마법 또한 이 마수들과 다르지 않다. 어떤 고서클의 마법을 쓰더라도 나에게 닿으면 한낱 먼지로 뒤바뀔 뿐이지.”
탑주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하면서 눈을 번뜩였다.
이제 곧 절망에 빠질 놈들의 얼굴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하하하!!”
그러나 데카드는 탑주의 예상을 뒤엎고 오히려 깔깔 웃었다.
같이 온 젠킨스와 짹짹이도 눈을 껌뻑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계속 웃던 데카드는 한 번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모든 웃음기를 지워버렸다.
“이런 상황은 수도 없이 겪어봤어. 고작 마수를 이용한 공격이 안 먹힌다고 좌절하면 내 천 년의 세월이 운다고.”
“천 년?”
데카드는 씨익 웃으며 짹짹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결국 육탄전이 되는군요.”
짹짹이가 코트로 변해 데카드에게 걸쳐졌다.
이런 흔치 않은 광경에 흥미로워하는 탑주.
“호오……. 이렇게 연구해 보고 싶은 인간은 처음이다.”
사람이 물건으로 변했다?
짹짹이를 보던 탑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크큭……. 사람이 아니었군. 어쩐지 내뿜는 마나의 파동이 인간과 다르다 싶었어.”
[아직 완전한 정체를 파악해 내진 못했지만 여기까지 알아낸 것도 저자가 처음입니다.]
‘저 새끼도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이 아닌 리치가 되면서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마나 감지력을 얻어낸 게 아니었다면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공간 절단.”
데카드에게 쏠려 있는 시선을 이용.
젠킨스가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쩌어어엉-!!
탑주 주변의 공간이 그대로 갈라지다가 그에게 닿기 직전 무언가에 걸려 멈춰버렸다.
결계인가?
하지만 결계라고 단정 짓기에는 놈의 흑마력이 움직였다.
“이 정도로 뛰어난 공간 제어라니……. 내가 없는 사이 인간 세상에는 흥미로운 것이 참 많아졌군.”
탑주는 이것 또한 즐거운 유희 취급을 하며 작은 입김을 불었다.
공기를 들어마실 폐가 없을 텐데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입 안에서 나온 흑무.
그것은 잘려 나가려고 하는 공간 자체를 덮어버렸다.
“자아……. 이제 다음 공격은 뭐지?”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공간 속성의 공격도 탑주는 손쉽게 막아내었다.
아직 데카드와 젠킨스 모두가 전력을 낸 것은 아니었으나 둘의 공격 모두 탑주에겐 거의 통하지 않았다.
“더 없나?”
탑주는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마술을 구경하러 온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을 높였다.
“이제 보여 드리지.”
쿠웅- 슈우욱-!!
젠킨스가 한쪽 발로 바닥을 찧었다.
그러자 다섯 번째 층 자체가 섬의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크흐흐……. 장소를 옮긴 건가. 뭐……. 함정 따윈 없었지만 지레 겁먹었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텔레포트 도중에 다 부서져 버린 다섯 번째 층은 이제 바닥밖에 남지 않았다.
“데카드, 잠깐 실례하겠네.”
“네?”
공격 타이밍을 재고 있던 데카드에게 젠킨스가 다가와 자신의 손바닥을 그에게 댔다.
“이건…?”
“공간 속성 재질의 마나일세. 단 한 번뿐이긴 하지만 나름의 조커로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이걸 제가 사용할 수 있을까요?”
“원래라면 어림도 없으나 8서클로 올라온 자네라면 가능하네.”
데카드는 자신의 몸 안을 떠도는 공간 재질의 마나를 느껴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메인 공격은 자네가 맡아주게. 난 서포트를 하지.”
고개를 끄덕인 데카드.
양손에는 그림자 폭풍을 달고 몸을 살짝 숙였다.
탑주는 여전히 옥좌에 앉아있었고 데카드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공간 이동.”
쿠웅-!
젠킨스가 데카드를 순식간에 탑주의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흐음……. 확실히 공간 속성은 상대하기 까다로워.”
“닥치고 이거나 처먹어!”
두 개의 그림자 폭풍이 초근접에서 터져나갔다.
카가가가가가가각-!!!
거대한 두 믹서기 사이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탑주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따위 마법은 부질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생각보다 더 열등하군.”
다시 한번 나타난 흑무는 그림자 폭풍을 에워싸더니 그대로 먹어버렸다.
[저 흑무. 많이 먹고 빠르기도 빠르지만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은 그림자 폭풍 두 개가 살짝 안 되는군요.]
방금 전 그림자 폭풍은 평소보다 마나를 더 많이 담아 넣었다.
먹을 수 있는 양이 무한대는 아니라는 것에서 데카드는 희망을 찾았다.
이제 관건은 개인이 가진 마나의 총량인데 이거 하나는 자신 있는 분야였다.
데카드는 자신의 마나 룸뿐만이 아닌 마수들의 마나 룸을 공유하기에 혼자서 8서클 마법사 다섯 명분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 소모전으로 탑주를 상대할 생각이십니까?]
‘지금은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아.’
자신이 흑무가 한번에 먹을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이 공격을 때려 박으면 결국 탑주도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장관님. 녀석의 흑무는…….”
“나도 알고 있네. 방금 자네가 눈치챌 때 나 또한 알 수 있었어.”
“그럼 방법 또한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당연허이.”
역시 원조 천재라 그런지 척하면 척이다.
“작전 회의는 다 끝났나? 슬슬 공격다운 공격을 해보지그래. 하품이 다 나오려 하는군.”
“그건 좀 미안하네.”
데카드도 탑주와 같은 입장이었던 적이 많아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이 미안함에 대한 사과는 이걸로 대신하지!”
[짹짹이 오리지널 - 섀도우 스틸]
그의 손이 무언가를 잡아채는 시늉을 하자 탑주에게서 그림자가 뽑혀져 나왔다.
“오호라……. 나도 처음 보는 마법이로다. 혹시 오리지널인가?”
“그래.”
어느새 데카드의 손에 잡힌 탑주의 그림자.
직접적으로 만진 것은 아니나 이것의 무게는 과연 엄청났다.
그림자에게 무게가 있겠느냐마는 그 존재감의 무게라는 것이 있었다.
[주인님. 이 그림자를 이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들고 있는 게 고작이군요.]
짹짹이도 앓는 소리를 낼 정도로 탑주의 그림자는 통제하기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내 그림자를 들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원래라면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질기군.”
“크하하하……. 내 목숨 줄이 쇠심줄이긴 하다만, 그 가위는 너무 무딘 것 같구나.”
탑주가 손을 들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우우웅-
“크윽……!”
그러자 점점 끌려가기 시작하는 그림자.
데카드가 꽈악 붙잡고 있긴 했지만, 그 인력을 버틸 수 없었다.
“내놓거라.”
탑주의 그림자는 다시 스르륵 바닥을 타고 그의 뒤에 붙었다.
“이제 또 색다른 것이…….”
콰아아아아아앙-!!!
탑주의 그림자에서 일어난 거대한 폭발.
흑연기가 뭉게뭉게 일어나고 그 여파로 옥좌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
해골치곤 시끄럽던 탑주의 말주변이 급격히 없어졌다.
딱히 피해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의자가 부서졌다는 게 어지간히 화가 나 보인다.
[다행히 이게 통했군요.]
‘그러게 말이야.’
“폭탄을 넣어두었군.”
젠킨스가 말했듯이 데카드는 탑주에게 그림자를 빼앗기기 전 마나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폭탄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면 9서클이건 뭐건 알아챌 수가 없지.’
마나가 없으면 리치도 평범한 존재다.
개인의 방심도 이유가 되겠으나 새로운 공격법을 또 하나 찾게 되었다.
그리고 폭탄으로 옥좌가 부서진 후 아직까지도 말이 없는 탑주.
“아끼는 의자였냐? 미안하다. 너 죽으면 변상은 해줄게.”
“…….”
아까는 이런 비꼼 따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이젠 꽤나 타격이 가나 보다.
[이쪽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군요.]
‘그러게. 준비 좀 해야겠다.’
고오오오오-
[심상치 않은 흑마력이 느껴집니다.]
탑주에게서 울긋불긋 튀어나오는 검은 오라.
‘……그 정돈 나도 알겠어.’
[회피는 제가 전담할 테니 주인님께선 공격을 맡아주십쇼.]
‘알았다.’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분담 작업.
“……네놈들은 실수한 것이다.”
입을 연 탑주가 손가락을 까딱하고 움직였다.
후욱-!!
그대로 날개를 펼쳐 데카드를 이동시킨 짹짹이.
짹짹이가 피한 자리에는 거대한 흑염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잘 반응했네! 데카드!”
젠킨스 자신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고 사실 그건 데카드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잘했다. 짹짹아.’
[별말씀을.]
여기서 유일하게 흑마력을 느낄 수 있는 짹짹이만이 흑마법의 전조를 느끼고 피할 수 있다.
“이걸 피하다니. 그 옷의 능력인가?”
이번에는 탑주의 고개가 데카드 쪽으로 돌아갔다.
순간 마주쳐버린 그의 눈과 탑주의 눈.
“이런……!”
데카드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탑주는 씨익 웃었다.
“이미 늦었다.”
쿠우우우웅-!!
“커헉……!!”
거대한 충격이 데카드를 강타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