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밝혀진 개미 소굴
데카드는 자리에서 일어서 모두가 자신을 볼 수 있게끔 방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켈른과 키이라, 라이아의 눈에서는 깊은 신뢰가 묻어나왔지만, 그와 반대로 오츠만의 눈에서는 의심이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안 그래도 처리할 게 산더미인 자신을 이 먼 무인도까지 오게 만들고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으니.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옆에 세 종족의 지도자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츠만이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니 이제 원하는 것을 줄 때다.
“아까 말했다시피 여러분을 이 섬으로 부른 이유는 각각 다릅니다.”
데카드는 한쪽에 몰려있는 이종족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들에겐 제 사유지를 피난처로 제공하기 위해서이고.”
그대로 시선을 오츠만에게로 돌린 데카드.
“폐하에겐 이분들이 왜 루비아에 들어와야 했는지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
“설마 드워프와 엘프에게도 저희와 같은 일이…….”
라이아가 깜짝 놀라 키이라와 켈른을 바라보자 둘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이다. 허허.”
그때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키이라가 손을 들었다.
“탈리스의 황제에게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도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하십시오.”
누가 설명하든 딱히 상관없으니 데카드는 바통을 키이라에게 넘겨주었다.
“먼저 저희 엘프의 마을인 시르가를 포함해 드워프들의 니다벨리. 그리고 아까 얘기를 들어보니 나가들도 똑같은 일을 겪은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저희 엘프의 경우를 본보기로 말해도 별 상관이 없을 겁니다.”
“맞소.”
“동의합니다.”
라이아와 켈른은 고개를 끄덕였고 키아라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침공을 받았습니다. 그 주체는 당연히 흑마법사들의 언데드 군대였죠. 하지만 그들을 쳐부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숲의 마법과 엘프 전사들이 힘을 합친다면 이깟 언데드들 열 배가 몰려와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비단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언데드들을 모두 죽이고 저희가 승리에 기뻐할 때. 이변이 일어났죠.”
모두가 공감하는 듯 나가와 드워프의 지도자는 눈을 감고 그때를 회상했다.
“뼈들과 살점이 허공으로 떠올라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고 그곳에선 정말 악몽과도 같은 존재가 튀어나왔습니다.”
“우리 드워프들은 일단 흑기사라고 명명했소.”
“그 흑기사가 마을에 등장하고 단 10분 만에.”
주먹을 쥐고 손톱이 살에 파고들어 피가 날 때까지 키이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희 시르가는 불타 버리고 말았죠.”
이것은 산호성과 니다벨리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패배하고 저흰 당장 도망쳐야 했는데 기억나는 곳이 귀인이 있는 루비아밖에 없더군요.”
“우리도 마찬가지였소.”
“그래서 부득이하게 그대의 땅을 침범하고 말았습니다. 이 점은 사과하지요.”
“미안하오.”
키이라와 켈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하자 오츠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대들같이 뛰어난 지도자와 그 종족을 짧은 시간이나마 보호할 수 있게 되어서 나야말로 뿌듯했소.”
서로를 향해 사과를 주고받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게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 뭐 그런 건가?
어쨌든 이제 자신이 알아낸 것을 말할 차례다.
“흑기사는 제가 알아본 바. 총 넷. 모두가 어마 무시한 강함을 갖고 있죠. 그리고 제일 중요한 탑주의 위치 말입니다.”
데카드가 뜸을 들이자 모두의 목울대에서 꿀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최근에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흑마력을 역추적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치를 찾으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연히 끝내러 갈 겁니다.”
악몽과도 같은 이 시대를.
장내에 있는 모두가 데카드의 말뜻을 파악하고 침음을 삼켰다.
“귀인 혼자서 갈 생각은 아니겠죠?”
솔직히 그것도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자신과 마수들만 흑탑에 가야 마음에 제일 편하기 때문이다.
괜히 전력 증강하겠다고 부원들을 데리고 갔는데 만약 그들이 죽으면?
만약 탑주를 이긴다고 해도 데카드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만약 제가 8서클에 올라선다면 혼자서 갈 생각입니다만. 주변인들이 가만두지 않겠지요. 그래서 다른 이들과 가게 된다면 소수 정예로 흑탑을 오를 생각입니다.”어지간한 잔챙이들은 목숨만 내다 버릴 뿐 별다른 도움이 안 된다.
“흐음……. 약한 흑마법사들은 마법 한 방으로 쓸어버릴 수 있으니 많은 인원은 필요하지 않다는 거군.”
켈른이 정리한 대로다.
마법사에게 상대가 얼마나 있는지는 중요치 않다.
양보단 질의 문제.
“생각해 둔 멤버가 있는가?”
“일단 마법부 장관님은 무조건 참여하실 거고……. 마탑의 총장과 집행부장 그리고 저와 팀원들을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그때 이 회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토스가 끼어들었다.
“그 멤버에 나도 끼워주게. 걸림돌은 되지 않을 거야. 이거 하난 약속하지.”
“엄청 위험할 텐데.”
매초와 매 순간 하나하나 사경을 헤맬 거고 죽음과 제일 근접할 것이다.
“상관없다.”
그의 눈에서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이런 건 꺾을 수 없지.
“알았어.”
아토스를 시작으로 세 종족의 지도자 또한 손을 번쩍 들어 자원했다.
“나도 끼겠네.”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요!”
이게 소풍이 아니라는 건 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고.
한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목숨을 내던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후회하지 마십쇼.”
켈른이 그의 말에 껄껄 웃었다.
“내 인생에 지금까지 후회란 없었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키이라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귀인에게만 그런 무거운 짐을 지게 할 수 없죠! 저도 할 거예요!”
“전 마수왕을 따를 뿐입니다.”
자연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두 명과 최상위급 전사 한 명.
“든든하군요.”
어깨에 메어있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다.
“제가 할 말은 끝났습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오츠만은 지금까지 무겁게 닫아두었던 입을 열었다.
“없네. 자네의 생각이 뭔지도 알겠고.”
“궁금하셨던 점이 조금은 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다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만족하네. 그럼 난 먼저 일어나겠어.”
거리낌 없이 일어난 오츠만은 다른 지도자들에게 한 번씩 인사하고 아토스의 곁으로 갔다.
“이동하지.”
“네.”
슈욱-!
탈리스의 황제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데카드는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별 이유는 없다.
그냥 작은 변화를 목도한 게 나름 만족스러웠을 뿐.
오츠만의 눈에 일던 의심이 작은 신뢰로 바뀌었다.
“그럼 모두들 잘 계십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잘 가시게.”
“다음에 또 봬요!”
데카드는 날개를 펼쳐 산호성의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주인님. 이대로 마법부까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짹짹이는 저택에 두고 온 까마귀들로 우편함에 온 편지를 열어보았다.
[젠킨스가 손가락에 관해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흑마력을 추출해 낸 건가?
마침 이쪽도 마법부에 볼 일이 있었는데 잘 됐다.
데카드는 섬에 텔레포트 기계로 가 마법부가 있는 아사이드까지 순간 이동했다.
* * *
“절 찾으셨다고요?”
오랜만에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젠킨스가 그를 맞아주었다.
“잘 왔네. 일단 앉게나.”
젠킨스가 안내한 의자 앞 책상에는 꽁꽁 묶이고 봉인돼 있는 손가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간인 둘은 느끼지 못했지만, 마수들은 방 가득히 퍼진 흑마력의 냄새에 코 대신 입으로 숨을 쉬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둘 중 뭐부터 알려줬으면 좋겠나?”
고르기 어려운 질문인데?
“으음…… 저는 나쁜 소식으로 하겠습니다.”
“나쁜 소식은 그 손가락에서 흑마력을 뽑아내느라 마법부의 실험관이 거의 반파되었다는 거야.”
“그럼 좋은 소식은 뭡니까?”
“좋은 소식은 흑마력 추출에 성공했다는 거지.”
젠킨스는 품에서 시약병 하나를 꺼내 데카드에게 던졌다.
“이것이…… 탑주의 흑마력.”
시약병을 받아든 데카드는 그것을 눈높이까지 들어 보았다.
검은 연기 같은 모습은 척 봐도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희망의 상징.
‘부탁한다. 얘들아.’
데카드는 시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뭐, 뭐하는 건가!”
드물게 젠킨스가 놀라며 벌떡 일어섰지만, 지금은 그에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흑마력이 시약병에서 탈출하려고 하자 데카드는 그것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모았다.
그러고는 흡수.
그의 몸으로 들어간 흑마력은 날뛰기 시작했으나 아주 미약한 소량이라 데카드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네요!]
[으윽…… 빨리 하고 끝내자!]
마수들은 데카드의 안에서 흑마력을 부여잡고 그대로 역추적을 시작했다.
기계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흑마력에 민감한 마수들은 가능하다.
고오오오오-
가감 없이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려 했던 흑마력은 자연스럽게 특정 방향과 장소를 노출시켰다.
“찾았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이 바퀴벌레 같은 놈.
데카드가 역추적에 성공했을 때 탑주 또한 그것을 감지했다.
“크하하하……. 놀랍군, 놀라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왜 그러십니까?”
작전을 검토 중이던 제미니가 물어도 탑주는 잠시간 가만히 앉아있었다.
타닥타닥-
“후후후…….”
이따금 웃으며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치는 것을 빼면 그는 다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제미니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탑주가 저렇게 신나 하는 모습은 정말 처음 보기 때문이다.
“준비해라. 제미니. 곧 손님들이 오실 거다.”
“손님…… 말입니까?”
“그래. 아주 귀한 손님들이지. 영 심심했는데 드디어 재미 좀 보겠어.”
탑주는 고개를 돌려 방 한쪽에 늘어서 있는 네 명의 흑기사를 보았다.
“너희들도 조금은 놀 수 있겠구나. 크하하하…….”
탑주의 웃음소리가 허공을 맴돌다가 흑탑에서 부는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 * *
“알아냈습니다. 탑주의 위치.”
“어, 어디에 있는 건가?”
데카드는 탑주의 방에 걸려있는 거대한 세계 지도에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대륙을 벗어나 바다에서도 정말 외딴곳에 있는 섬.
가끔가다 보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존재감 없는 섬이었다.
“저기 있습니다.”
젠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겠네.”
“저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데카드는 결연한 눈빛으로 젠킨스를 바라보았다.
“자네 설마…….”
그의 예상대로다.
나는 오늘 올라설 것이다.
“8서클에 도전할 겁니다.”
다른 서클도 아니고 8서클은 장난이 아니기에 이번에는 젠킨스도 그와 같이 내려왔다.
“굳이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
“만약 자네가 8서클에 올라선다면 굉장히 기념비적인 일인데 어찌 안 올 수 있겠나.”
데카드가 성공하는 그 순간 대륙에 8서클 마법사는 두 명이 된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겐 희망이 되고 탑주를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게 된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진 위에 앉은 데카드는 마수들을 내보내고 가부좌를 틀었다.
“이, 이분들은 누군가?”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일단 인사하십쇼. 얘들도 흑탑에 갈 겁니다.”
마수들과 젠킨스는 악수하며 서로 인사했다.
“나는 티이라다!”
“요르야.”
“고오른이다!”
“…….”
마지막으로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젠킨스가 말했다.
“젠킨스네.”
서로에 관한 인사가 끝났을 때 데카드는 이미 공사를 시작했다.
몸에 모든 마법 기관을 부수는 대공사.
7서클이 되면서 그 벽은 더 두꺼워지고 단단해졌다.
‘올라가자.’
그러나 극한의 집중력과 의지 앞에서 부술 수 없는 것은 없다.
데카드의 심장에 여덟 번째 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