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저지
“킬킬킬……. 이거 너무 쉬운 것 같습니다, 형님.”
“그러게 말이다. 아우야. 대륙의 강국이 어쩌고 하더니 괜히 무서워했다.”
지금 엔티티의 외곽 성문으로 흑마법사 군대가 진격 중이다.
이제까지는 연전연승.
무패의 기록을 찍고 있던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크크큭……. 어제 마법부 마법사들도 꽁지 빠져라 도망친 거 보셨습니까? 진짜 볼 만했는데.”
이 군대를 이끌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긴장 따윈 아예 놓은 채로 맘 편안히 전진을 거듭했다.
“그런 모습이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왕이든 마법사든 기사든 모두 다르지 않다. 한낱 인간이지.”
흑마법사들은 우월감에 취해 있었다.
자신들의 손짓 한 번이면 성이라도 단숨에 함락시키는 병력이 움직이고 무수한 사람이 죽는다.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흑마법사들은 밀림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님. 피해 갈까요?”
“흐음…….”
흑마법사들의 조장은 지도를 펼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길을 선택하면 너무 돌아가게 된다. 길이 거칠더라도 뚫고 지나간다.”
“알겠습니다!”
“전진하라!”
숲이 우거지고 연이은 폭우로 축축해진 땅을 밟아가며 해골 군대는 앞으로 걸어갔다.
밀림의 초입에 들어선 흑마법사의 언데드 부대.
“워우……. 굉장히 많네요.”
그 모습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퇴마부에게도 똑똑히 보였다.
“괜찮아. 우리가 할 일은 저들을 모두 전멸시키는 게 아니라 힘을 빼놓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게릴라 전술의 핵심은 이기는 게 아니다.
본진이 이길 수 있게 힘을 빼놓는 것.
최대한 군대의 주체인 흑마법사를 죽일 수 있도록 노력해 볼 테지만 워낙 거대한 군단에 둘러싸여 있어 쉽지 않아 보인다.
데카드가 생각이 많아지고 있을 때 군대는 어느새 코앞까지 도착했다.
다행히 언데드들은 데카드가 알려준 호흡법 덕에 부원들을 찾지 못했다.
“시작!”
고드윈의 양손에 백염이 타오르고 데카드의 구호에 맞춰 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염의 파도!”
백염이 자신의 존재감을 완전히 드러내고 고드윈이 양팔을 크게 휘저었다.
화르르르르르륵-!!!
하나의 거친 파도처럼 백염이 물결쳤다.
단숨에 쓸려나가 불타버리는 해골들.
좀비들 또한 그 열을 견디지 못하고 썩은 살이 모두 재로 변했다.
“뭐, 뭐냐!”
“기습입니다! 모두 전투태세!”
그래도 베테랑이라는 건지 흑마법사들은 빠르게 대비하며 고드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한 암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우리도 간다.”
“알았어.”
“내려가자!”
근접전이 주류인 벨린다, 카론, 엘리스가 각각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다시 한번 군단을 흔들어버렸다.
“이, 이놈들은 또 뭐냐! 지금 떨어진 놈들을 먼저 견제해라!”
아무래도 근접 무기를 쓰는 습격자들이 더 상대하기 쉽지 않겠나 싶었는데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사자 탈춤!”
“강철 바람.”
“그림자 찢기!”
벨린다와 카론은 원래가 마법사.
자신의 공격에 마법을 둘러 원거리 못지않은 공격 리치를 뽐내고 있었다.
“저년은 도대체 뭐야!”
엘리스는 아까부터 흑마력을 두른 가면을 사용한 채 단검으로 좀비들을 썰어버리고 있었다.
“젠장……! 저주는 준비됐나?”
“됐습니다!”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갈겨!”
흑마법사들의 손에서 마법진이 나타날 때 데카드의 눈이 번뜩였다.
“소환!”
소환 마법진이 촤르륵 나타나며 허공을 메꾸었다.
그가 소환한 마수들은 쉴드 타우로스.
단단한 가죽을 바탕으로 항마력이 높은 전문 탱커들이다.
“저, 저주가 막혔습니다!”
“이, 이게 무슨……!!”
저주의 과녁을 순간적으로 바꿔 마수들을 맞히게 했다.
타이밍과 마나의 흐름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기예.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고!”
쉴드 타우로스의 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콰아아아앙-!!
자신이 받은 충격을 머리에 모아 그대로 발산.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 레이저는 언데드들을 그대로 부숴버렸다.
“젠장! 그래도 네놈들은 포위됐다!”
“크크큭……! 이제 죽을 차례란 뜻이지!”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언데드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크하하하!”
이제 곧 비참하게 죽을 습격자들을 볼 생각에 함박웃음이 나오려던 찰나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 뭐냐!”
“테, 텔레포트 스크롤인 것 같습니다.”
“스크롤 방지 결계도 안치고 뭘 한 것이야!!”
“그, 그것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만…….”
조장 흑마법사는 아파오는 머리를 매만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게 고작 여섯 놈이서 한 짓이란 말인가…….”
부서지고 깨져서 난리가 난 언데드 군대.
전체 부대 중 30%가 죽어버렸다.
“다시 되살릴 수도 없게 아주 철저히도 부숴놨군. 그것도 주력부대를.”
그중 소생 가능한 언데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습격이 또 벌어진다면…….”
엔티티 성벽으로 가기도 전에 자신들은 궤멸당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공격의 주축을 담당할 공성용 언데드들이 전부 부서졌는데 더 이상의 피해는 무조건 막아야 한다.
“방범용 결계를 치고 먼 길로 돌아간다!”
결국 흑마법사들은 안전한 길을 택했고 습격 요소가 적은 길로 움직였다.
정말 고작 여섯이서 대군의 방향을 틀고 준비할 시간을 벌어버렸다.
그 성공의 주역인 퇴마부는 지금 미리 설정해 둔 대피 장소에서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후우…… 진짜 위험했어요.”
“엄청 스릴 넘쳤어!”
상반된 반응에 고드윈과 아스카는 뒤로하고 데카드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네.”
전투 중에서도 조금씩 확인해 보긴 했으나 이렇게 한 번 더 봐야 마음이 놓인다.
“네. 그보다 부장님의 전략이 생각보다 훨씬 잘 먹혀들어서 놀랐습니다.”
“놈들이 방심한 덕분이지.”
연이은 승리로 흑마법사들은 자만과 오만에 빠졌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런 피해는 주지 못했을 거야.”
이걸로 엔티티는 언데드들을 상대하기 훨씬 쉬워졌다.
자신들의 역할을 아주 완벽히 수행한 셈.
그럼 이제 좀 쉬어볼까 하는 생각에 부원들이 기지개를 켠 순간 데카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뭐 해? 빨리 다음 전장 가야지.”
부욱- 슈욱-!
텔레포트 스크롤이 찢어지고 퇴마부는 어딘가로 또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하는 일은 엔티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들이 올 것 같은 길목에서 대기.
때가 오면 기습.
빠른 템포의 전투로 적들의 주요 병력을 깨부수고 다시 후퇴.
이 루틴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한 세 번째부터 부원들은 말이 없다가 네 번째가 됐을 때는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꺼내는 한마디.
“조금만……. 쉬었다가…… 하아……. 하아……. 가면 안 될까요?”
“여기 각성제랑 체력 포션 가져왔어.”
라고 말하며 부원들의 힘을 끌어올렸다.
“…….”
다섯 번째가 되었을 때는 부원들의 말이 사라졌다.
입을 쉬지 않고 놀리던 아스카도 바닥에 드러누울 뿐 입은 꾹 다물었다.
“……이제 진짜 못 움직이겠어요.”
“오늘은 이제 그만할 거야. 모두 훌륭히 자신의 할 일을 해주었어.”
데카드는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된 장소들을 브이 표시로 바꿔주었다.
“거대한 대군이 움직인다고 예고됐던 곳은 우리가 다 부숴놨으니까 성들이 무너지진 않겠지.”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데카드는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지 쓰러진 부원들을 일으켰다.
“얼른 일어나. 잠은 집 가서 자.”
마지막으로 루비아 용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자 저택까지 순간 이동했다.
“얘들아, 정신 좀 차려봐라.”
“에에? 피곤해서……. 다리가 안 움직여요…….”
다리뿐만이 아니라 혀도 안 움직이는 듯 발음이 마구 꼬였다.
데카드는 양팔로 부원들을 부축하고 겨우 방까지 데려가 눕혀줄 수 있었다.
[그래도 잘 버텨주었습니다.]
[맞다! 기특해!]
[…….]
[다음에는 여섯 번으로 횟수를 늘립시다!]
마수들도 칭찬일색.
태어나면서부터 전투에 특화된 그들의 눈으로도 오늘 부원들은 굉장히 뛰어났다.
밖으로 하나둘 나온 마수들.
그중 요르가 오늘 본 부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매직 애로우 수련법 덕분인가요? 애들의 마나 숙련도가 훨씬 올라간 것 같아요!”
“맞다! 오늘 여러 번 놀랐다!”
7서클로 올라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부원들은 벌써 자신의 힘을 정확히 알고 컨트롤했다.
“덕분에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지.”
다칠 것 같으면 데카드가 막아주기도 했으나 본인들의 대처 또한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었다.
부원들의 칭찬은 이쯤하고 데카드는 여유롭게 오늘 자 신문을 보았다.
모든 신문사가 인간 동맹군의 승리를 외쳤고
“지금쯤 탑주에게 소식이 들어갔을걸? 똥줄 좀 탈 거다.”
* * *
탑주가 여느 때처럼 남자의 보고를 받는 날.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오늘 대부분의 부대가 진격에 실패했습니다.”
말하면서도 살짝 탑주의 눈치를 보는 남자.
“그렇군.”
그러나 탑주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예언자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지. 다만 그럴 것 같더군.”
지금 자신의 군대를 이루고 있는 언데드들은 훌륭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걸 이끄는 머리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다.
오만에 절여져 있는 정신머리.
하지만 그런 정신머리로도 인간들을 쳐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굳이 건들지 않았다.
“내 생각이 짧았군. 정신을 남겨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스윽-
탑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옥좌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돼서 남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인드 브링어. 모든 정신을 빼앗을 지어다.”
탑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주의 언어.
고오오오오오-
탑주의 방이 흑무로 물들고 회오리처럼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이더니 그의 손에 집결됐다.
“으윽……!”
남자는 그 흑무에 끌려가지 않도록 방의 기둥을 꽈악 잡고 놓지 않았다.
결국 바닥에 퍼진 흑무가 모두 탑주에게 흘러들어오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굳이 세보자면 10분 정도.
“지금 뭘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져간 것이다.”
무심히 말한 탑주는 손에 들어온 조그마한 검은 구슬을 굴리다가 바닥에 던졌다.
콰직-!
허무하리 만치 쉽게 부서진 구슬.
“놈들의 정신을.”
“그렇다면…….”
“어차피 졸개들이 생각이란 걸 해봤자 무엇하겠는가. 쓰레기 같은 의견을 내놓고 쓰레기 같은 작전을 짜고 쓰레기 같은 행동을 하겠지.”
그런 쓰레기들은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모이면 태산이 되기 마련.
오늘로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조금 피곤해지겠지만, 계획은 더 앞당길 수 있겠군.”
“흐음…… 그렇군요.”
짧게 대답한 남자를 내려다본 탑주.
그는 검지를 들어 올려 남자를 가리켰다.
스아아아-
아까의 흑무가 또다시 흘러나오며 남자를 감싸 안았다.
“네놈의 정신 또한 안전하지 않으니 안심하지 말도록.”
죽음의 기운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등줄기에는 땀이 미친 듯이 흘렀지만, 입가에는 어쩐지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씨익 웃은 남자.
“저, 제미니가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하긴, 네놈이 그럴 리 없지. 이 능구렁이 같은 놈.”
흑무가 꺼지고 제미니는 떨어뜨렸던 볼펜을 집었다.
“그럼 앞으로 명령 전달은 어떻게 할까요.”
“필요 없다. 졸개들의 정신이 곧 나의 정신이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는 크로우란 놈의 목을 가져 오거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탑주는 이번 진격이 실패한 이유를 크로우 때문이라고 보았다.
크로우의 방해가 있었기에 졸개들이 대처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 또한 알겠습니다. 걱정 놓으시길.”
제미니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