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슬레이의 친구들
“한 번 보겠습니다.”
젠킨스의 명령서를 건네받은 로바드.
그는 찬찬히 안에 담긴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정말 그 모습은 자신이 알던 칠칠맞은 로바드가 아닌 위엄 있는 보스 그 자체.
‘정말 로바드 맞아?’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다시 보고 두 번 봐도 로바드가 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역변할 수도 있군요.]
짹짹이도 처음에는 마차에서 내린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었다.
[다이어트가 최고의 성형이란 말이 틀리진 않았나 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구절이 이렇게 와 닿는 것은 거의 처음이다.
“흐음……. 전부 저희가 해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동태 파악은 무슨 뜻입니까?”
“슬레이가 흑마법사에게 붙을지 아니면 인간 동맹군에 들어올지 알아야 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필립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죄하자 로바드가 그를 뜯어말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피아 식별은 중요하죠!”
로바드는 부하가 가져온 맥주를 한 입 들이켜고는 말했다.
“저희가 갱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악의 편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인간으로 남아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안 그랬으면 갱단 대장 노릇도 오늘이 끝이었을 텐데.”
“…….”
로바드는 등 뒤로 흘러내린 땀을 느끼며 연신 맥주를 홀짝였다.
뭔가 맨정신으로는 이 사람 앞에서 대화가 안 될 것 같았다.
“이 통신망 부분은 준비해 온 것이 있으십니까?”
“네. 간단하게 이것만 받아주시면 됩니다.”
필립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연락용 수정구입니다. 저와 데카드를 비롯해 장관님과 연결되어 있죠.”
“그, 그렇군요.”
“……왜 목소리를 떠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데카드까지 연결돼 있다는 말에 놀랐을 뿐이다.
이러면 24시간 저 인간 쓰레기의 노예란 말 아닌가.
“걱정하지 마. 내가 너한테 연락을 자주 하겠냐? 원래 얘 아니면 여기 올 일도 없었어.”
귀신같이 로바드의 속내를 알아챈 데카드가 말했다.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무슨 걱정을……. 하하…….”
로바드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데카드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마법이라도 한 게 아닌가 불안해졌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텔레포트 기계 건설.
“이건 아직 슬레이에 남은 기계들을 이용하면 되겠군요.”
“그게 망가지지 않고 살아있습니까?”
필립이 놀라서 묻자 로바드는 웃으며 말했다.
“예. 저희 쪽 뛰어난 엔지니어 덕분이죠. 그분이 있었기에 데카드님도 루비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일이 훨씬 더 편해지겠습니다. 근데 그 엔지니어 분은 누구 신지…….”
“불러 드릴까요? 지금은 아마 한가하실 겁니다.”
“그래. 불러봐.”
이곳까지 왔는데 로바드만 보고 갈 수는 없다.
그리고 세이칼은 특히 더 고마운 사람이니 확실히 그 인사를 해두고 싶었다.
“연락을 드렸으니 이제 곧 오실 겁니다.”
다른 연락용 수정구를 만지작거리던 로바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수정구도 전달해 줬고 세이칼을 만나면 여기서 할 일은 끝이 났다.
“세이칼 오면 인사하고 가자.”
“벌써 가시는 겁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
“됐다. 난 내 집이 편해.”
데카드가 벗어놨던 겉옷을 다시 주섬주섬 입으려고 하자 필립이 그의 손목을 잡으며 귓속말했다.
“하룻밤만 여기서 자자.”
“왜 또. 할 거 남았어?”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는 살짝 망설이는 듯 시선을 딴 데로 치웠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부인이랑 싸웠어. 그래서 오늘 급하게 임무 잡아가지고 나온 거란 말이야.”
“그럼 너만 여기서 자.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데?”
“에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한 번만 도와줘라.”
“편하게 있다 가셔도 됩니다. 성에 방은 많으니.”
데카드는 굳이 여기서 자고 싶지 않았다.
훨씬 좋은 집과 가족
같은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부담스런 눈 좀 치워봐.”
나이에 맞지 않는 필립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데카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이칼 님이 오시기 전에 방을 먼저 안내해 드리죠.”
로바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번개와 같은 속도로 부하가 밖에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최고로 좋은 방에 안내해 드려.”
“알겠습니다!”
로바드의 부하와 함께 성의 복도를 걷자 얼마 안 가 고급스러운 문이 나왔다.
“이곳은 게스트 룸입니다! 그럼 편안히 지내십쇼! 불편한 게 있으시면 방 안에 있는 종을 흔들어주시면 됩니다!”
어디서 보고 배운 건 있어가지고 호텔 서비스를 그대로 베껴왔다.
물론 호텔에선 종을 치면 깔끔한 복장에 직원이 달려오지만, 이곳은 깔끔한 복장의 깡패가 달려온다는 점.
후자 쪽이 조금 더 든든해 보이긴 했다.
어쨌든 별 영양가 없는 비교는 그만두고 둘은 방 안에 들어왔다.
“와아…… 생각보다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본인들도 냄새가 난다는 점은 알고 있는지 곳곳에 방향제를 두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가구들.
“이거 저번에 어디 상점에서 본 것 같은데.”
범죄자들의 도시에 익숙한 가구들이 늘어서 있다?
“돈을 내진 않았겠지?”
그들의 지불 방법은 범인들과 살짝 다르다.
일반인이 지갑을 꺼낸다면 이쪽은 총과 칼을 꺼낼 뿐 크게 다르진 않다.
“에휴. 모르겠다.”
집행부장으로서 원래라면 지금 성안에 있는 모두를 집행부로 처넣어야 하지만 필립은 못 본 척 누워버렸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이칼 님이 오셨다고 보스가 전해달라십니다!”
“그래.”
“엔지니어라는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냐?”
필립이 아마 그의 업적을 알았다면 아마 이런 소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텔레포트 기계를 한 번 만져본 것으로 다시 빛을 보게 한 미다스의 손.
“너 뭐 망가진 물건 있어?”
뜬금없는 데카드의 질문에 필립은 일단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아. 이거 시계가 저번에 갑자기 안 돌아가더라고.”
“그 사람한테 맡겨봐. 아마 1분도 안 돼서 고쳐줄 테니까.”
“1분?”
시계란 게 얼마나 복잡한데 아무리 그래도 1분은 너무 짧지 않은가.
필립은 데카드의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로바드의 업무실까지 도착했다.
벌컥-
문을 열자 안에선 익숙한 얼굴의 중년인이 보였다.
“허허. 오랜만이오. 그댄 얼굴이 하나도 안 변했구려.”
“이게 얼마만이야.”
세이칼과 데카드는 서로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당연하오. 대부분은 그대 덕분이지.”
“정말 건강해 보이네.”
뭔가 로바드와는 사뭇 다른 인사.
여기서는 그에겐 없었던 사람 간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세이칼. 그럼 오랜만에 봤는데 실력 좀 볼까?”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어떤 물건이오?”
“필립. 가져와 봐.”
“여기.”
필립이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시계를 건네자 세이칼은 몇 번 돌려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쿵-
탁자 위에 도구 상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올려졌다.
“잠깐 안을 보겠소.”
“그러시…….”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세이칼은 이미 공구를 손에 쥐고 있었다.
“……!”
빠르게 분해돼 가는 시계 부품들.
웬만큼 신기한 것은 전부 본 필립도 입을 쩍 벌리게 하는 분해 속도였다.
사람 팔에 헤이스트를 붙여놓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속도.
“흐음…… 이게 문제였군. 다행히 공용 톱니바퀴라 여기서 교체할 수 있겠소.”
이가 나간 톱니바퀴를 핀셋으로 꺼내 들은 세이칼은 그것을 버리고 새것을 갈아 껴 넣었다.
“좋아. 이제 되었소.”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한 시침과 분침.
죽었던 기계에 생명이 불어넣어 지는 시간은 1분 23초였다.
“역시 아직 안 죽었네.”
“하핫. 물론이오.”
“혹시 우리 모르게 마법이라도 쓴 건 아니시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소. 두 분은 분명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일 텐데.”
세이칼의 말대로 둘의 코앞에서 마법을 써놓고 들키지 않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렸다.
“마법 같은 일이지.”
마법사들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에 세이칼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가 뭐요?”
“아아. 그걸 말씀 안 드렸군요.”
세이칼의 물음에는 로바드가 설명에 나섰다.
“흐음…… 요컨대 슬레이에 있는 텔레포트 기계들을 다시 쓸 수 있도록 재가동시켜 달라는 거구만.”
“맞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어렵지 않다는 듯 세이칼은 고개를 주억였다.
“어렵지 않소. 시간과 도구, 부품만 있으면.”
“도구와 부품은 저희가 조달하겠습니다.”
마법부에 텔레포트 기계 부품은 넘치도록 있다.
“그럼 언제쯤 다시 가동시킬 수 있을까요?”
눈을 감고 턱수염을 매만지며 세이칼이 생각에 잠겼다.
“슬레이에 기계는 총 두 개이니 아마 일주일이면 가능할 것 같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전문 인력을 보내고 나면…….”
“아니. 전문 인력은 필요 없소. 내가 진행할 것이외다.”
텔레포트 기계를 전문 교육도 받지 않은 일반 정비공이?
시계를 고친 실력은 분명 놀라웠으나 이 부분에 관해선 필립은 회의적이었다.
“필립. 괜찮으니까 저 아저씨를 믿어봐.”
“아무리 그래도 텔레포트 기계는…….”
데카드는 필립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으니까 믿어.”
자신도 처음에는 끝까지 의심했었다.
기계가 다시 불을 뿜기 전까진 의심의 끈을 놓으려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텔레포트 기계는 굉장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니까.
“그, 그럼 세이칼 님만 믿겠습니다.”
“맡겨주시오. 부품만 놓고 가면 일주일 안에 고쳐 보이겠소.”
데카드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믿는 건 오랜만인지라 필립은 그래도 친구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제 일도 끝났으니 식사라도 같이 하실까요?”
“식사는 딴 거 말고 캔 요리로 하자.”
“하하핫. 역시 데카드 님이 뭘 좀 아십니다.”
슬레이의 캔 요리는 중독적일 정도로 맛있다.
그 이유는 아마 사람의 건강은 배제해서일 것 같은데 어쨌든 맛은 있었다.
“가서 캔 요리 세 개만 가져와라.”
“아니, 네 개 더.”
갑자기 캔 수를 늘리는 데카드.
“그, 그렇게 많이 드실 겁니까?”
“안에 있는 애들도 먹고 싶대서.”
물론 자신의 것이 아닌 마수들의 몫이다.
그러나 필립을 제외하면 로바드나 필립은 이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저 데카드가 하라는 대로 캔 요리 네 개를 더 주문할 뿐이었다.
* * *
“후우……. 여긴 대체 어디냐.”
무슨 밀림 같은 산속에서 본 골렘 위에 탄 채 몇 시간이나 이동 중이었다.
루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보았다.
쭉 내려다보이는 숲의 풍경.
“다음에 가면 그 년은 제일 첫 번째로 죽여 놔야겠군.”
두 번 날아갔다간 강제로 세계 여행하게 생겼다.
“저건……. 영지인가?”
루이의 눈에 보이는 회색 성벽.
그것은 마치 영지처럼 보였다.
“호오……. 마침 잘 됐군. 저기로 가서 잠시 숨 좀 돌려야겠어.”
반항하면 죽이고 아니라면 노예로 삼는다.
“강한 힘은 모든 걸 간단하게 만들어주지.”
루이는 자신의 이분법에 만족해하며 슬레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죽여주마.”
경비병이나 기사들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탈리스의 마도사단이란 것들도 일초지적이 안 되는데 감히 누가 자신에게 대적할 수 있으랴.
그 유명한 집행부장이나 지금의 표적인 크로우가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이다.
절대로.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