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새로운 별명
“주변국의 소식은 어떠한가.”
오츠만은 지도와 병사들의 급보를 번갈아 보면서 신하들과 병사들의 배치를 정하고 있었다.
“그, 그것이…….”
그러던 도중 급보 하나를 들고 온 병사 하나가 황제의 질문에 말하기를 어려워했다.
또 얼마나 나쁜 소식이길래 병사가 이리 떨고 있는 건가.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병사를 재촉했다.
“어서 말해 보아라.”
급보를 전하러 온 병사는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바이올로프를 비롯해 주변국의 주요 도시 몇 개가 한 마법사에 의해 전부 수복되었다는 급보입니다.”
“반나절 만에?”
“그, 그렇습니다.”
지금 병사가 말한 나라들은 소국이고, 도시도 작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시다.
반나절 만에 몇 개씩이나 탈환할 정도로 작지 않다는 뜻이다.
“흑마법사가 흘린 거짓 정보가 아닐런지요.”
신하의 의심에 병사가 대신 답변했다.
“저도 그것이 의심되어 몇 번이나 다른 통신병들을 거쳐서 알아봤는데 확실합니다.”
“흐음……. 그렇다면 그 정체불명의 마법사는 대체 누구일까요……?”
“그자의 특징은 따로 온 것이 없느냐.”
“이것도 몇 개 듣긴 했는데 너무…….”
“괜찮으니 어서 말해 보아라.”
병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에 커다란 칠흑의 날개를 달고 까마귀를 몰고 다니며 불과 물의 휩싸인 동물들과 함께한다고 합니다.”
그 정체와 같이 특징도 참 미스테리하다.
“……일단 알았다. 물러나 보아라.”
“넵!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물러가고 신하들은 그 마법사에 대해 얘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법부에서 보낸 이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수복 속도는 불가능합니다!”
“아니면 마도사단장이 한 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전쟁 지역과 매우 가까우니.”
방금 말한 신하의 발언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노, 농담은 넣어두시오.”
왜냐하면 지금 이 신하는 궁정 마도사단장이 위법을 했다고 주장하는 거니까.
다른 신하마저 오츠만의 눈치를 보며 말렸다.
“증거가 없다면 입도 뻥긋하지 마라.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니.”
결국 오츠만이 찌릿하게 눈빛을 보내자 신하는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황궁이 회의에 회의를 계속할 때 데카드는 집으로 돌아갔다.
“땀으로 샤워를 했네.”
굳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다가 기분 타서 너무 열심히 해버렸다.
“조금 무리하셨습니다.”
“맞아요! 7서클 마수들을 너무 많이 불러내셨다고요!”
“…….”
마수들의 질책이 이어지고 데카드는 살찍 미소 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나와 봐. 샤워하러 가게.”
자신을 둘러싼 마수들의 어깨 사이를 지나간 데카드는 샤워실로 가던 도중 엘리스를 보았다.
그녀도 이제 막 샤워를 끝낸 듯 젖은 머리에선 진한 샴푸향이 났다.
“어? 언제 오셨어요?”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엘리스가 데카드를 발견하고 반갑게 그를 맞았다.
“방금.”
“얘기한 시간보다 일찍 오셨네요! 그런데…….”
엘리스는 데카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와 같이 실시간으로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엘리스.
데카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번에 알아챘다.
“왜 거지꼴을 하고 왔냐고?”
옷은 진흙 밭에 구르고 온 사람처럼 흙투성이에다가.
머리는 누가 샤워를 끝내고 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좀…… 심하게 놀다 왔다고 해야 하나?”
적당한 표현으로 둘러댄 데카드는 엘리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저녁은 먼저 먹어.”
“네, 네!'
샤워실의 문이 쾅 닫히고 엘리스가 다시 복도를 나가려고 할 때 그 끝에서 바람처럼 달려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와!”
그것은 엘리스를 점프로 넘어선 후 샤워실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흰 머리에 독사같이 날카로운 송곳니.
딱 봐도 요르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조용히 해……! 집중에 방해되니까.”
샤워실 안에 있는 데카드는 들리지 않도록 소리치듯 작게 말한 요르는 다시 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누가 보면 면벽 수련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정말 말 그대로 벽만 쳐다보고 있는 요르는 가끔 실실 웃거나 침을 뚝뚝 떨어뜨렸다.
치이익- 치익-
침은 산성으로 되어있는 건지 그걸 아무 보호 없이 맞은 바닥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엘리스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 물어도 요르는 벽면 바라보았다.
“이, 이건……!”
요르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이던 엘리스.
그녀는 결국 정답을 찾아냈다.
벽에 나있는 작은 구멍.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구멍이었다.
“설마…….”
홀린 듯이 요르처럼 자세를 낮춘 엘리스는 요동치는 동공으로 겨우 구멍을 향해 초점을 잡았다.
쏴아아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갈수록 샤워기가 물을 내뿜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헤헤…….”
이따금 요르의 실없는 웃음소리도 들렸으나 그건 엘리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보이기 시작한 건 샤워기의 물로 전신의 흙을 닦아내는 중인 흑발의 남자.
주륵-
“으읍……!”
갑자기 코에서 흐른 붉은 액체에 엘리스는 급하게 구멍에서 멀어졌다.
“위, 위험해……!”
위험하다.
너무도 위험하다.
“더 보고 있으면 정신이 어떻게 되겠어……!”
유물이 주는 유혹도 이만큼 강렬하지는 않을 터.
“요, 요르 님은 이걸 매일 보고도 정신을 유지하시는 건가……?”
새삼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엘리스는 힘이 풀린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양팔로 바닥을 기며 점점 샤워실과 멀어졌다.
조금만 더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참아냈다.
“후우……. 후우……. 잘했어. 엘리스.”
이런 식의 욕망 분출(?)은 옳지 않다.
“아으, 시원해.”
그렇게 누군가가 내면의 자신과 사투를 펼칠 때, 데카드는 샤워 가운을 몸에 두른 채 바깥으로 나왔다.
“여기 수건이요!”
밖에서 끝까지 구멍을 보고 있던 요르는 자연스레 일어나 수건을 건넸다.
“어. 고마워.”
가운에 수건까지 두르자 몸에 딱 맞는 솜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듯했다.
“주인님. 신문 보셨습니까?”
“넌 내가 신문을 볼 것 같니?”
짹짹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손에 든 신문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질문을 잘못 했군요. 주인님이 신문에 나오셨단 걸 알고 계셨습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신문을 보지 않았기에 자신이 나온 줄은 당연히 몰랐다.
짹짹이가 준 신문을 펼쳐본 데카드.
글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는 짹짹이가 오늘 밖에서 사온 따끈따끈한 신문이다.
“와아……. 이게 벌써 신문으로 나왔어?”
전쟁이 벌어지면 정보 소통이 워낙 중요하기에 신문사들도 평소보다 몇 배는 빠르게 기계를 돌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 벌인 일이 이렇게 1면으로 나올 줄이야.
“그래도 사진은 없네.”
데카드가 워낙 신출귀몰했던 탓에 그를 찍은 기자는 없었다.
“아직 놈들에게 내 얼굴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아직 자신은 상대를 모른다.
이런 상황에선 우리의 정보는 차단하고 상대의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그리고 여길 밑을 보십쇼.”
“여기가 왜?”
“벌써 별명이 생기셨습니다.”
1면 밑에는 데카드가 까마귀를 몰고 다닌다 하여 그를 크로우라고 이름 붙인 기사가 있었다.
“크로우.....?”
“마치 히어로 같군요.”
소설 속 주인공들도 모두 별명이 있다.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또 막 나쁘진 않네.”
조금 유치한 것 같긴 하지만 마음에 든다.
크로우라…….
새로 생긴 별명을 계속 입에서 되뇌던 데카드는 문득 재밌는 생각을 떠올렸다.
“흐흐흐.”
갑자기 웃기 시작한 데카드.
“왜…… 그러십니까?”
불안해진 짹짹이가 이유를 물어도 그는 언제나 그렇듯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데카드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를 열고 그 안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적당한 거 없나?”
“찾으시는 게 있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금방 찾을 거 같아.”
금방 찾는다면서 30분을 주머니와 씨름한 데카드는 결국 애타게 찾던 그것을 꺼내 들었다.
“이거야!”
그가 손에 든 것은 그냥 낡은 흑색 천.
“제 눈에는 그냥 뭣도 아닌 천 같습니다만.”
“정답이긴 한데 조금만 기다려 봐. 소환!”
데카드는 소환술로 스파이더즈를 인간계로 불러냈다.
손바닥만 한 거미들은 능력껏 실을 짜주었고 점성이 있는 거미줄은 그의 생각대로 잘 움직여나갔다.
“다 만들었다!”
짹짹이가 책의 서론을 다 봤을 때 데카드가 벌떡 일어났다.
“복면…… 입니까?”
“그래! 앞으로 크로우의 아이덴티티가 될 물건이지!”
영화를 보면 정의의 슈퍼 히어로는 이렇게 복면을 쓰고 다닌다.
자신은 정의롭지도 않고 히어로도 아니지만 슈퍼한 것은 맞으니 쓰고 다녀도 괜찮을 것이다.
거미줄로 붙일 건 붙이고 자를 건 자른 복면은 나름 멋들어지게 잘 만들었다.
“어때?”
“흐음…… 뭐라 그럴까…….”
복면에 대한 감상평을 맡게 된 짹짹이는 침음성을 삼켰다.
“잘나가는 도둑 같습니다.”
그래도 잘나가니 다행이다.
못 나가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데카드는 전신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아예 옷도 맞추시지요. 복면만 하는 건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근데 남는 천이 더 없어.”
데카드가 가지고 있던 천은 딱 복면만 만들 정도였다.
“저한테 맡겨주십쇼.”
7서클에 올라서면서 더 강해진 짹짹이는 전보다 더 유려하게 겉모습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촤라라락-
기본형인 깃털 코트에서 조금 더 고급스럽게.
사교계에 신사가 입을 법한 턱시도의 모습으로.
“오우……. 어디 패션 잡지도 챙겨보니?”
[가리지 않고 보는 편입니다.]
어디 유명한 공작가의 자제가 입을 법한 연미복과 가장자리로 정갈하게 뻗은 깃털.
“진짜 멋있네.”
돈이 많은 귀족가의 사람이라면 많은 금을 주고서라도 꼭 얻고 싶을 것 같다.
[힘 좀 써봤습니다.]
“좋아, 좋아.”
데카드의 만족에 짹짹이는 다시 원래 인간형으로 돌아갔고 그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보니 애들은 어디 있어?”
“마수들과 부원들 모두 밑에서 저녁을 먹는 중입니다. 가져올까요? 아니면 직접 내려가시겠습니까.”
힘을 꽤나 썼으니 배가 많이 고플 테지만 데카드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냥 잘란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수면욕이 식욕을 이겼다.
“내일은 깨우지 마라.”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쇼.”
탁 하고 스위치를 내리자 방에 불이 꺼졌다.
* * *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어두운 목소리와 더욱더 어두운 그의 눈이 한 흑마법사를 옥죄어갔다.
“까, 까마귀를 두른 마법사가 저희를 방해했습니다……. 저, 저항해 보았으나 대부분이 죽음을 면치 못해…….”
흑마법사는 벌벌 떠는 손으로 신문 하나를 내밀었고 옆에 있던 남자가 그걸 들어 탑주에게 전달해 주었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신문을 허공에 띄운 탑주는 천천히 1면을 읽어 내려갔다.
“크로우? 별 시답잖은 놈이로군.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한다는 건가.”
신문은 그대로 흑색 불에 타올라 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번만은 살려주겠다. 그러니 다음에 올 때는 이 크로우란 놈의 목과 같이 와야 할 것이야.”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의 실력으로는 무리일 테니 선물 하나를 주지.”
탑주는 무언가를 날리듯 중지를 튕겼다.
쑤욱-
흑마법사의 몸으로 들어간 검은 구체.
“이, 이게 무엇인지…….”
“물러가라.”
다시 탑주가 손가락을 튕겼을 때 흑마법사는 어느 관 안에서 눈을 떴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