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바다 위에서 먹는 저녁
밤을 새웠다.
하루 정도 안 자는 거야 늘상 있었던 익숙한 일이지만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밤 동안 쏟아부었던 에너지가 달라서일까?
“자료가 없군.”
마탑의 서고를 다 둘러보아도 리치에 관한 문헌은 턱없이 적었다.
공용 도서관이 아닌 교수급만 들어갈 수 있는 서고에서도 마찬가지.
“결국 손을 빌려야겠어.”
트리스는 당장 간단하게 짐을 싸고 업무실을 나가려 했다.
“총장님! 또 어디 가세요!”
“부총장이군요. 언제나 수고가 많습니다.”
부총장, 슈헤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어디 사는 누구 때문에 요즘은 더 바빠요.”
트리스 또한 피식 웃었다.
“그 어디 사는 누구가 또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엔 또 뭔데요!”
“세상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슈헤이의 매서운 눈빛을 여유롭게 받아 넘기고 트리스는 길을 나섰다.
텔레포트 기계로 아사이드까지 온 그녀는 마법부로 곧장 왔다.
[문이 열립니다.]
“……이젠 아주 자기 집 드나들 듯 하는구먼.”
업무를 보고 있던 젠킨스는 갑작스러운 트리스의 등장에 빠르게 놀리던 펜을 멈췄다.
“이쪽도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란 게 뭔가?”
서로 무척이나 바쁜 몸이니 트리스는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추려서 말했다.
“흑마법사의 수장은 탑주라 불리는 인물인데 그자의 정체는 리치입니다.”
“…….”
커피를 마시던 젠킨스의 표정이 순간 썩어들어 갔다.
갑자기 커피에서 흙탕물 맛이 나는 것 같다.
젠킨스는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고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딴 결재 서류나 끄적일 때가 아니로군.”
“맞습니다.”
하던 일은 전부 내팽개치고 그는 수정구를 몇 번 두드리더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내 지위를 부장관에게 일임하니, 내 모든 업무를 맡긴다.”
부총장이나 부장관이나 불쌍하긴 매한가지.
그러나 트리스와 젠킨스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법부의 다른 층으로 움직였다.
“이곳은 마법부에서도 나를 포함한 몇몇만 올 수 있는 특급 서고일세. 여기서 한번 찾아보자고.”
“……책이 굉장히 많군요.”
“허허. 그런 편이지.”
마탑의 도서관만큼이나 많은 책들이 있는 책장으로 벽면이 둘러싸여 있다.
“자네는 왼쪽을 맡게. 나는 오른쪽을 맡지.”
“사람을 더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두 명이서 끝내기엔 말도 안 되는 양이다.
“아직 대응책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섣불리 외부에게 알렸다간 혼란만 야기할 수 있어. 그리고 여기서 쓸데없는 분량을 빼면 둘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네.”그래도 희망을 조금 품었던 트리스는 뒤따라오는 말로 오랜만에 절망이라는 것을 느꼈다.
“한 일주일 정도 안 자고 책만 보면 가능해.”
“……너무 이론적인 얘기 아닙니까.”
“허허. 그게 우리 마법사들의 강점 아닌가. 이론을 현실로 만드는 것.”
하여간 말 하나는 잘한다.
트리스는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깊게 되새기며 첫 번째 책을 열었다.
* * *
“영웅님들! 연회가 준비되었습니다!”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힘찬 목소리로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오오! 드디어!”
“마침 배고팠다!”
마수들이 먼저 우르르 밖으로 나가고 부원들은 서로 열심히 떠들며 그 뒤를 따라갔다.
“…….”
다들 밝은 분위기 속에서 어쩐지 데카드의 표정만 시궁창이었다.
항상 가까이에서 그를 보좌하던 짹짹이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옆에 있어주었다.
“짹짹아.”
“말씀하십쇼.”
“그 리치를 잡으면. 더 이상의 암흑시대는 오지 않을까?”
리치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위기가 끝이 나고 똑같은 말세가 여러 번 찾아오는 것이다.
“지금의 저희가 예상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군요.”
짹짹이는 담담히 말했고 그의 말은 사실 정답이었다.
“맞지. 지금 걱정한다고 해도 올 미래는 오니까.”
어느새 멀어진 마수들과 부원들.
자연스레 산호성 복도에는 데카드와 짹짹이만 남게 되었다.
물로 꽉 차 있고 적막한 복도를 걷던 중 불현듯 짹짹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는 게 단 한 가지 있습니다.”
데카드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뭔데?”
“마수왕님은 저희들이 어떻게 해서든 지켜낼 거라는 것. 이거 하나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든든하네.”
너무 든든해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걱정들이 나름 풀어진 느낌이다.
“안녕하십니까! 영웅님! 연회장은 이쪽입니다!”
“그래.”
연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나가 병사들이 각 잡힌 모습으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안에선 미리 들어와 있는 마수들과 부원들이 원형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그곳에는 라이아도 하하 호호, 일행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러다 데카드를 발견한 라이아.
“아! 마수계의 왕이시여. 이쪽으로 오십쇼.”
뭔가 다른 의자와는 달리 그녀는 보석들이 화려하게 박힌 의자에 데카드를 데려갔다.
“……정말 이곳에 앉으라고?”
보석들이 내는 빛 때문에 눈이 아파질 것 같다.
그러나 라이아는 그의 어깨를 잡고 눌러 의자에 앉혔다.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당연히 저항하려고 무릎에 힘을 빡 주고 있었는데 허무하리만치 쉽게 앉혀졌다.
“마수계의 왕이 다른 차원의 주민들과 같은 의자를 써서야 하겠습니까. 사양치 말고 앉으소서.”
“…….”
정말 괜히 밝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뒷말은 절대 붙이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나가를 완전한 부하로 얻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 그래. 이 정도는 내가 참아야지.’
곧 다가올 전쟁에서 나가를 자유롭게 쓸 수만 있다면 이런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다.
“자. 그럼 모두 모이셨으니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라이아의 선언과 함께 연회장 안으로 저마다 악기를 든 나가들이 들어왔다.
단다라란- 단다단-
우우웅- 우웅-
나가들은 처음 보는 모습의 악기로 다채롭지만 조화롭게 연주를 시작해나갔다.
산호로 만든 것 같은 악기들은 바다처럼 중후하고 깊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우와! 이 새우 맛있다!”
“이 물고기도 맛있군!”
그러나 음악이 어쩌고저쩌고, 고오른과 티이라는 음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하핫. 많이 드셔도 됩니다. 아직 음식은 산처럼 쌓여있으니.”
라이아는 밝게 웃으며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다시 한번 연회장의 문이 벌컥 열리고 음식이 담긴 접시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저거 해파리야?”
“그렇습니다.”
신기하게도 접시는 해파리들이 머리로 들고 있었는데 그들의 작은 몸집 덕분에 빠르고 편리한 이동이 가능했다.
“우웅! 거맙다!”
방금 막 대게의 다리를 껍질째 씹어 먹던 티이라가 또 다른 음식을 해파리에게 받아들었다.
다른 부원들도 해파리에게서 음식들을 받았다.
고드윈도 이제 막 첫 음식을 받으려고 할 때 흐물거리던 해파리의 다리 중 하나가 그의 팔에 닿았다.
“아악……!”
순간 팔에서 나는 따끔한 고통에 고드윈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옆에서 팔을 잡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고드윈을 아스카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의 오른팔에서 갑자기 울긋불긋한 두드러기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잠깐 가만히 계세요.”
그 모습을 본 라이아는 한달음에 달려와 팔을 붙잡고 자신의 손으로 두드러기를 한 번 쓸었다.
“흐아…….”
빠르게 편안해지는 고드윈의 얼굴.
라이아의 손을 스치고 지나간 팔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드윈을 다치게 한 해파리를 라이아가 찌릿하고 쳐다보자 그것은 몸과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나가들은 이런 것에 별로 영향이 없어서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갑자기 나가의 여왕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자 오히려 고드윈이 어쩔줄 모르며 그녀보다 더 머리를 숙였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띨빵아.”
“저기 해파리들한테 던져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
“에베베~”
고드윈은 왜 자신에게 이런 동료가 생긴 걸까 하고 잠시 탄식했다.
그렇게 작은 해프닝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연회와 식사를 맛있게 즐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왕님! 오늘 진짜 전부 맛있었어요!”
“아닙니다. 잘 드셔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사교성 좋은 아스카는 어느새 라이아와 꽤나 가까워졌다.
“맛있었다! 라이아! 그럼 또 보자!”
“…….”
“생선 가시가 이빨에 끼긴 했지만 맛있었어! 마수왕님은 같이 안 가실래요?”
“나는 조금 있다 들어갈게.”
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나섰다.
부원들도 저마다 인사 한마디씩 남긴 뒤 아까 있었던 방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연회장에는 데카드와 짹짹이, 라이아만 남게 되었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글쎄. 따로 할 말까진 아니지만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라이아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자세를 정갈하게 고쳤다.
“경청하겠습니다.”
데카드는 탑주란 자에 대한 설명과 그의 정체가 리치라는 것을 그녀에게 얘기했다.
얘기를 듣는 라이아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는데 결과적으로는 썩 좋지 않았다.
“리치라……. 전설로만 내려오는 괴물이지요.”
인간보다 길었던 나가들의 역사에서도 리치란 존재는 잘 기록되지 않았다.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의 정신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리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듣고도 페인이 될 수 있다.
리치의 위력을 모르는 이라면 그 영향이 덜 가겠으나 마법사들은 공포에 마음이 질려버린다.
마법의 길을 걷는 자로서 리치가 휘두르는 힘의 정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들이니까.
“무섭지 않아?”
라이아는 살짝 굳어진 표정을 제외하면 사실상 지금의 상황에 덤덤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섭습니다.”
본인은 무섭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지도자들의 습관입니다. 자신의 기분을 절대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죠.”
“그러냐.”
라이아처럼 자신도 나름 표정을 잘 감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짹짹아. 내가 무슨 생각하는 것 같냐.”
짹짹이는 데카드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자고 싶다.”
“…….”
아무래도 표정 감추기는 장점에서 빼야 할 것 같다.
무슨 보지도 않고 맞춘단 말인가.
꽤나 심각한 얘기 도중이었는데 사실 속마음은 짹짹이가 말한 대로였다.
“이제 자러 가야겠다.”
“안녕히 주무십쇼.”
“그래, 그래.”
그녀에겐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데카드는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후욱-
그 순간 라이아는 힘을 사용했다.
“어? 마수왕님! 왔다!”
데카드가 걸어갈 필요 없도록 방까지 이동시켜 준 것이다.
이런 배려는 아주 좋다.
“아우, 피곤해.”
침대에 풀썩하고 쓰러진 그는 곧바로 눈을 감았다.
아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감아버렸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내일 아침 되면 깨워. 일찍 나갈 거니까.”
“네!”
요르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데카드는 잠들었다.
* * *
“보고.”
어둡고 음산한 음성이 방을 울렸다.
그들 앞에선 이들은 하나 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울거나.
서럽게 울거나.
고통에 차서 울거나.
너무 무서워서 울거나.
그러나 이 남자는 달랐다.
“하명하신 일은 하급 흑마법사들이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주변국의 반응은?”
“당연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희는 대륙 공적이지요.”
탑주는 남자의 깔끔한 보고에 만족스러워하며 미소 지었다.
미소 지을 입술과 피부는 없지만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제 멀지 않았다.”
준비해라, 인간들이여.
곧 세상에 죽음이 드리운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