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멀쩡한 날 없는 숙소
“그래. 당연히 준비 시간이 필요하겠지. 얼마나 주면 되느냐. 1주일? 한 달?”
데카드는 검지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하루.”
트리스와 엘리스는 깜짝 놀랐고 주변 병사들의 웅성거림 또한 더 심해졌다.
“……하루?”
“하루면 됩니다.”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는 인간이구나.”
“칭찬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 칭찬 말고도 받아야 할 게 더 있었다.
“이곳과 육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해주십쇼. 이 성 안에 방도 몇 개 내어주시고.”
거의 살림을 차리겠다는 데카드의 말에 여왕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다른 속셈은 없으니 걱정 마십쇼. 제 팀원들이 와야 완벽한 작전이 이루어집니다.”
“허락하지.”
여왕은 병사를 시켜 물건 하나를 더 가져오게 했다.
“이것은 귀환 스크롤이다. 그대가 원할 때 언제나 이것을 가로로 찢으면 성안으로 올 수 있다.”
“그럼 세로로 찢게 된다면 다시 육지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정답이다.”
스크롤을 받자마자 그 힘을 파악한 데카드.
“나가 종족의 마법이 이렇게 뛰어난지 미처 몰랐습니다.”
이 스크롤은 찢어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즉 힘을 사용하는 데에 있어 제한이 없다는 얘기.
“그 스크롤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길 바란다.”
“물론입니다.”
쫘악-!
데카드는 말과 동시에 스크롤을 찢어 트리스와 엘리스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왔다.
보글거리는 바다 거품 소리 대신 갈매기 떼가 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부유감에 익숙해져 있던 몸은 갑자기 물이 없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살짝 어지럽네요.”
“마나를 조금 드리지요.”
마법사는 마나를 몸에 순환해서 재빠르게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한결 편해졌어요.”
트리스의 마나 덕에 엘리스는 다시 머리가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걔들 데리러 가자.”
“그들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마지아 섬의 텔레포트 기계를 이용해 곧바로 루비아에 도착한 셋.
[오랜만에 본다! 내 제자!]
[…….]
레오도 기대감이 앞서는지 평소와 달리 조금 더 의욕이 앞섰다.
[아스카가 수련은 많이 했으려나?]
[고드윈! 나랑 같이 수련하자!]
퇴마부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뭔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많이 달랐다.
이곳저곳 안 부서진 데가 없고 집에도 구멍이 뻥뻥 뚫려있었다.
갑자기 폐가가 된 숙소의 모습에 데카드는 적잖이 당황했다.
“여기 왜 이래?”
“어……? 마법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가장 최근 숙소에 들렸었던 엘리스는 무너진 담벼락의 잔해를 발로 건드렸다.
“최근에 일어난 일 같아요.”
아직 잔해에서 마법의 온기가 느껴졌다.
트리스도 파헤쳐진 흙을 스윽 쓸어보고 냄새도 킁킁 맡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안에 누가 있긴 한 건가?”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퇴마부 숙소는 문도 겨우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덜렁거리는 창문은 틀만 남아있고 유리는 전부 깨져버렸다.
셋이 마당을 계속 둘러보고 있을 때 담벼락 밖에서 이쪽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어? 부장님? 총장님하고 언니도 있네?”
그 인기척의 주인은 아스카.
“여긴 대체 무슨 일이야?”
데카드가 뒤쪽의 숙소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건 사연이 있어요!”
“무슨 사연인데?”
“으음……. 그건 여기서 말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부장님의 집으로 가요.”
“내 집?”
아스카는 고개를 주억이며 해맑게 웃었다.
“집이 부서져서 저희 모두 부장님의 집에서 머무르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숙소에 남기고 온 물건은 없는지 보러왔던 참에 세 명을 만나게 된 것이다.
멀지 않은 데카드의 집까지 넷은 걷기 시작했다.
“짧게라도 말해줘 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어떻게 돼야 집이 하루아침에 폭격 맞은 것처럼 변해버린단 말인가.
“저번에 저희 숙소에서 일어난 테러. 기억나세요?”
“어.”
“같은 놈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번보다 훨씬 수준 높은 습격자들이 숙소에 들어왔었어요.”
데카드의 머릿속에서 어느 한 집단이 불쑥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암살자가 같이 온 동료들이 있었다고 했죠.]
자신의 집 위치에 이어 퇴마부 숙소에까지 손을 뻗으려고 했었나 보다.
“그래도 어찌 저찌 잘 대응해서 아무도 죽진 않았죠.”
“몇 명이나 들어왔었는데?”
“한…… 서너 명? 그쯤 되는 것 같았어요.”
그 정도 수의 일류 암살자가 밤을 틈타 들어왔는데 집 하나 폭파된 거야 싼값이었다.
“놈들이 어찌나 잘 피하던지 마법을 날리는 족족
쥐새끼처럼 도망치더라니까요.”
집이 회복 불가 상태로 파괴된 건 어쩔 수 없었으나 수확은 있었다.
“그래도 놈 중에서 두 명을 붙잡았어요.”
“진짜? 어떻게?”
이 부분에서는 엘리스가 가장 놀랐다.
그녀도 습격자가 갈까마귀 암살자인 건 짐작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놀랐다.
암살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밤과 깊게 잠든 목표.
이런 불리한 점을 이겨내고 심지어 생포까지 했다는 얘기에 엘리스의 눈은 동그래졌다.
“대단하네! 아스카!”
“헤헷! 이 정도로 뭘!”
잡은 놈들은 전부 집행부로 이송.
지금쯤 집행부로 돌아온 필립이 그들의 처분을 생각하고 있을 터.
‘짹짹아. 가서 필립에게 뽑아내야 하는 정보들을 알려줘.’
[알겠습니다.]
빠른 연락을 위해 오늘도 짹짹이의 까마귀는 바쁘게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어느새 집에 도착한 넷.
다행히 자신의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까지 무너지면 마수왕님 운다!]
‘……울긴 누가 울어.’
집을 무너뜨린 범인들만이 고통에 울부짖도록 만들어 줄 테다.
자신이 어떻게 이 집을 얻었는데.
“부장님 오셨군요.”
“저희 숙소가 아주 처참하게 박살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알고 있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퇴마부원들은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그래도 전투의 흔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그들의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아아. 많이 다치진 않았습니다. 살짝 베인 정도지.”
그 시선을 느낀 카론과 벨린다는 겉옷을 여미며 붕대를 가렸다.
“사제한테는 가봤어?”
“약 바르고 치료하면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이네.”
암살자들이라 급소만 노려왔을 텐데 근접전을 주로 하는 카론과 벨린다를 제외하면 다들 경미한 부상 정도였다.
“그럼 너희들은 쉬어야겠다.”
“네?”
애초에 숙소로 간 이유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퇴마부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명이 중상.
나머지는 전투가 준 피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트리스가 나서서 상황 정리에 설명을 덧붙여주자 부원들 모두가 벌떡 일어섰다.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이깟 상처야 걸림돌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데카드는 고개를 저었다.
“기특하긴 한데 그런 큰 싸움에서 부상자를 데리고 갈 순 없어.”
“당장 사제한테 갔다 오겠습니다.”
퇴마부원들은 데카드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사제들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뭔 싸움에 미친놈들만 우리 부서에 왔나?”
소파에 털썩 몸을 뉘이며 데카드가 중얼거렸다.
물론 그렇게 말하기엔 부장인 그부터가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었다.
윗물이 탁하니 아랫물이라고 별수 있겠나.
“그래도 자신의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알아서 조절하겠지요.”
트리스는 그의 옆에 살포시 앉더니 말했다.
“그런데 트리스. 너도 갈 거야?”
“당연합니다.”
“마탑 일은?”
그런 거야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손을 휘휘 저었다.
“부총장이 알아서 할 겁니다.”
“…….”
왠지 부총장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엘리스는?”
“저도 데카드 옆에서 싸울 거예요!”
엘리스는 힘차게 주먹을 쥐며 방긋 웃었다.
“고맙긴 한데 이번 건 정말 위험해.”
싸우는 상대부터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건물보다 훨씬 커다란 괴물이 우글거리는 전장.
대인전 특화의 엘리스가 날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예요.”
“무리는 절대 하면 안 된다?”
“네!”
걱정은 되지만 그녀 스스로 알아서 잘 판단하리라 믿었다.
[주인님. 필립이 알겠다고 전해달라는군요.]
‘오케이.’
아까 보낸 까마귀의 메시지를 읽었는지 곧장 답변이 날아왔다.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한 마음이 있긴 했으나 자신은 더 중요한 걸 해야 했다.
‘이런 것도 다 컨디션 회복이지.’
그는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대로 잠들었다.
* * *
“흑마법사에 대한 걸 왜 너희한테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 양아치가 생각 없이 움직이진 않으니까 한 번 물러나 보자.”
이곳은 집행부 지하에 있는 심문실.
안쪽에는 온 몸이 포박당한 갈까마귀 암살자 세 명과 집행부장, 필립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흐음……. 너희 이름이나 인적사항을 조사해 봤는데 상인으로 되어있더군. 이것도 가짜 신분이겠지.”
암살자들이 팔 물건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의 인생은 대부분이 거짓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고. 너희가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참내…… 그 고고하던 갈까마귀도 이제 옛말인가 보군.”
“우읍……!!”
자신이 몸담은 암살단을 모욕한 필립을 향해 한 암살자가 살기와 투기를 마구 흩뿌렸다.
“어이구 무서워라.”
일반인이라면 몸이 버티지 못하고 기절할 만한 살기였으나 필립에겐 어린아이의 투정 정도로 느껴졌다.
이렇게 몸이 묶인 상태에서 용 써봐야 본인만 힘들어진다.
“대답은 해야 하니 입은 자유롭게 해주지.”
마력 사슬로 입에 묶여있던 재갈이 필립의 손짓 한 번에 툭하고 풀려 바닥에 떨어졌다.
“자, 얼른 대답해봐. 그 여하에 따라 너희들이 갈 수 있는 감옥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크하핫! 우리가 고작 그런 것에 넘어갈 성 싶으냐? 반드시 여길 나가 네놈의 목을 베어주겠다!”
“아직도 힘이 넘치시네? 자고 있던 마법사들한테 쳐발리고 온 똥개들 주제에.”
데카드와 같이 다니다 보니 이런 독설만 늘었다.
암살자들은 크윽하고 이빨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빨리빨리 끝내자. 저녁에 애들하고 놀아줘야 한단 말이다.”
세 명의 암살자 중 하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중간에 있던 놈의 입이 조금씩 우물거렸다.
“감옥도 좋은데 보내주고 너희들 말만 잘하면 감형도 받을 수 있어.”
필립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미끼를 계속해서 던졌다.
“그리고 너희 신변 보호도 해줄게. 너희 그런 거 잘하잖아? 정보 위조 같은 거.”
“……알았다.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해 줄 테니 명예를 걸고 약속을 지켜라.”
“내 명예보단 친우의 명예를 걸지.”
여기서 친우란 당연히 데카드의 명예였다.
고작 이런 것에 자신의 명예를 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입 닥쳐! 지금 그걸 말해 버리면……! 크헉……!!”
아까부터 굳센 의지를 보여주던 암살자가 더 뭐라 하기 전에 뒷목을 강타.
그는 축 늘어져 기절했다.
앉아있던 의자를 가까이 끌어온 필립은 옆에 있던 암살자도 같이 기절시켰다.
풀썩-
“얘는 왜……?”
“정보가 어디까지 드러났는지 알면 안 되니까. 이런 건 됐고 빨리 말해 봐라.”
“나는 암살단의 사절로 흑탑이란 곳에 갔었던 적이 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