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다시 현재로
“뭐야……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헛것이어도 왜 하필 저년들이!]
“데카드!”
“선배!”
이 순간만큼은 트리스도 신나고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에게 뛰어갔다.
데카드에게 와락 안기는 트리스와 엘리스.
그 모습을 보며 과거의 데카드는 픽 하고 웃었다.
“저 정도면 행복한 인생이잖아. 아까 대답은 거짓말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애꿎은 마나에게 물어봐도 바뀌는 건 없었다.
“근데 너희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데카드를 따라왔어요! 장관님이 도와 주셔서요!”
기쁜 마음에 횡설수설 말하는 엘리스 대신 트리스가 설명에 나섰다.
어떻게 둘이 만났고 젠킨스의 도움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검은 팔찌의 힘으로 남은 필립의 팔찌를 찾을 수 있다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선배의 팔찌를 가리키는 점은 매우 가까이 있고 집행부장의 점은 살짝 거리가 있군요.”
그렇게 큰 노력은 들이지 않았지만 탐지기를 얻은 것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레지와 미궁을 탐험한 끝에 이 소라 나팔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녔는지 알 수 있었다.
“쟤하고도 무슨 얘기 했어?”
“아, 아니요!”
“…….”
당연히 둘은 모르는 척 잡아뗐지만 과거의 데카드가 당당히 말해 주었다.
“네 과거사에 대해 묻던데?”
순식간에 엘리스와 트리스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고 과거의 데카드는 만족하며 깔깔 웃었다.
[아아! 우린 못 들었다!]
[옳소! 우리도 들려줘!]
[조, 조금 궁금하긴 하네요!]
[…….]
마수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데카드는 철썩이는 파도로 눈을 돌렸다.
“내 과거사라……. 딱히 좋은 얘기도 없었을 텐데.”
“그렇긴 하지.”
과거의 데카드가 조용히 긍정했다.
그러나 데카드는 트리스와 엘리스가 자신의 과거를 함부로 들췄음에도 딱히 화를 내거나 역정 내지 않았다.
도리어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그래서 실망했어?”
“아니요! 전혀요! 저도 데카드 만만치 않게 더러운 사람이라 상관없어요!”
엘리스의 폭풍 같은 대답에 이어 트리스도 짧게 덧붙였다.
“저는 과거가 어떻든 현재만 중요시하는 사람이라 괜찮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선배의 과거를 함부로 들어서.”
“됐어. 내가 너희한테 너무 숨긴 건 맞으니까.”
“그래서 미래로 언제 돌아가나? 그 모습만 빨리 보고 싶은데.”
과거의 데카드가 셋의 얘기에 끼어들어 분위기를 와장창 깨부쉈다.
“가야지.”
데카드는 과거의 자신과 다시 옷을 바꿔 입고 필립의 팔찌 신호를 따라갔다.
“이쯤에 있어야 하는데…….”
“저기 지붕에 걸려있어요!”
아직 학생들이 나오기 전, 한적한 이때 일행은 재빨리 팔찌를 찾았다.
“짹짹아. 가서 조용히 필립 불러와.”
[알겠습니다.]
짹짹이의 까마귀가 훨훨 날아 쓸쓸히 혼자 있는 필립을 이곳까지 데려왔다.
“와, 뭐야? 왜 총장님하고 엘리스가 여기 있어?”
필립은 여기 있어선 안 될 인물이 둘이나 있으니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그래서 이제 미래로 돌아가는 건가?”
“그래.”
“과, 과거의 데카드?”
“뭘 보냐.”
한결같이 싸가지 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과거의 친우가 확실하다.
“여기 네 팔찌 껴라.”
“오오! 좋았어.”
이제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넷은 인적이 드문 공터로 자리를 옮기고 팔찌를 들어 보였다.
색깔은 다르지만, 중앙에 버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건 같았다.
“좋아. 이제 가는 거야.”
“오랜만에 볼거리가 생겼네.”
과거의 데카드는 일행과 살짝 떨어져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야.”
“야.”
이렇게 가기 전에 할 말이 있는지 과거와 현재의 데카드 모두 서로를 불렀다.
둘은 또 서로에게 손짓하며 말을 넘겼다.
“너 먼저 해.”
“너 먼저 해.”
누가 같은 사람 아니랄까 봐 성격부터 말투까지 쏙 빼다 박았다.
“연장자 먼저.”
기어코 뒤 순서를를 맡고 싶은지 과거의 데카드는 순서를 그에게 떠넘겼다.
“누가 연장자야.”
“솔직히 네가 마수계에서 있던 세월만 생각하면…….”
“팍 씨. 조용히 해.”
필립의 말은 개미 밟듯이 부드럽게 무시해 주고 데카드는 목을 풀었다.
“크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오만한 성격 좀 줄이고 누가 친절히 대해 주면 그 뜻을 왜곡하지 말라는 거야.”
과거의 데카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서 자연사해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
“내가 죽어버리면 그게 곧 너의 미래니까?”
“정답이야.”
두 데카드는 동시에 피식하다가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핫!”
“크하하핫.”
트리스와 엘리스는 신기한 듯 둘을 쳐다봤고 필립은 벌써 질린 지 오래였다.
한 놈도 힘든데 두 놈이나?
이건 그에게 있어 암흑시대급의 재앙이다.
“어쨌든 이제 진짜 간다. 과거의 나.”
과거의 데카드는 짧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삑-
네 사람이 버튼을 누르자 하나둘 밝은 빛이 들어오더니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져갔다.
공간이 꼬이는 것처럼 내장도 꼬이는 것 같아 넷은 구토가 밀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파앙-!!
공간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넷은 모습을 감췄다.
잠시 네 명이 있었던 빈 허공을 쳐다본 데카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잘 가. 미래의 나.”
그의 말은 지금 공간의 틈새를 유영 중인 데카드에게 마음의 형태로 전해졌다.
“으아악……! 왜 이렇게 안 끝나는 거야!”
올 때보다 훨씬 긴 것 같은 유영시간에 필립은 몇 번이고 헛구역질했다.
시야가 빙빙 돌고 뇌는 두개골 안에서 왔다갔다 반복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기 빛이 보여요!”
“가자!”
빨려 들어가듯 빛 속으로 끌려간 넷은 다시 어딘가로 튀어나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야 했다.
“으윽!”
“읏, 차.”
물론 데카드는 중심을 잡으며 일어섰고 그 덕에 주변을 빨리 볼 수 있었다.
“리조트는 준비됐죠?”
“하하핫. 물론이네, 퇴마부장.”
“돌아왔습니다.”
공간 바깥에는 이제 누더기에 가까운 로브를 입고 책을 늘여놓은 젠킨스가 있었다.
“수고했네. 총장.”
필립도 금방 일어나 젠킨스에게 예의를 갖췄다.
“집행부장도 물론 수고했어.”
“아닙니다. 고생은 저희보다 어째 장관님이 더 많이 하신 것 같은데요.”
과거로 갔다 온 넷은 옷이 좀 더러워진 것 빼면 멀쩡했다.
“하하핫. 그것도 그렇군. 어서 올라가세나.”
푸른 유물은 다시 봉인에 봉인을 거듭해 보관소 깊숙하고 붉은 유물과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았다.
넷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장관실까지 올라왔다.
젠킨스는 그곳에 걸린 새 로브를 걸쳐 입었고 까끌까끌하게 자란 수염을 매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과거는 어땠나? 어느 시대를 보고 온 거야.”
“그 얘긴 제가 해드리죠.”
말주변이 많지는 않았어도 비교적 조리 있게 하는 편인 트리스가 장장 한 시간 동안 과거에서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흐음…… 그렇군. 암흑시대와 과거의 퇴마부장이라.”
그때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데카드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레지! 레지는 어떻게 됐지?”
“갑자기 그놈은 왜 말하시는 겁니까?”
사실 이 레지하고의 일은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은 말이야.”
데카드의 얘기를 다시 전해들은 젠킨스 포함 넷은 경악했다.
“왜 그런 일을……? 데카드를 죽일 뻔한 놈이잖아요!”
“그건 진저백이지 레지가 아니야.”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레지의 문제로 옥신각신 다투고 있을 때 젠킨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데카드 자네가 미래를 바꾼 것 같군. 지금 내 기억엔 레지라는 이름의 교수가 마탑에 재직 중이야.”
젠킨스의 말은 지금 이 방을 뒤집어놓기 충분했다.
“이제 아닐 겁니다. 제가 죽이러 갈 거거든요.”
“저도 같이 가요.”
두 여자가 성큼성큼 마탑으로 가려던 것을 데카드가 뜯어말렸다.
“알고 보면 굉장히 순박하고 순수한 놈이라니까? 너희가 알던 진저백이 아니야!”
아무리 얘기해도 트리스는 믿지 못했다.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지 못하겠습니다.”
“동감이에요.”
둘이 이렇게 뜻이 잘 맞았었나?
“아아 정말! 내 말 좀 믿어보라니까 그러네?”
결국 데카드는 둘을 막지 못하고 방어가 뚫리려던 찰나 젠킨스가 허허 웃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지금 가보게.”
수욱-!
텔레포트 기계를 이용한 것처럼.
셋의 시야는 어느새 마지아 섬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기계만큼이나 정밀한 공간 특정 능력.
[오오! 신기하다! 시야가 휙휙!]
[어쨌든 구경이나 한번 해보죠! 그 건방진 상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푸르르! 조금이라도 살의가 느껴지면 사지를 찢어놓을 겁니다!]
[…….]
사지는 굳이 고오른이 찢지 않더라도 이 둘이 뼈도 안 남길 기세다.
“흥! 아무리 데카드의 말이라도 이건 못 참아요!”
“그놈이 어디 있는지 얼른 찾아야 죽일 수 있습니다. 일단 제 집무실로 가서…….”
멀리 갈 것도 없이 마탑의 도시 입구 화단에서 레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법사답지 않게 물뿌리개로 정성스레 꽃밭에다 물을 주고 있었다.
“어때? 이래도 진저백 같아?”
트리스는 코웃음 쳤다.
“아직 모르는 겁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트리스의 모습을 보고 레지는 편안한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총장님. 저번에는 급히 나가시던데 문제는 해결되셨나요?”
“그, 그렇습니다.”
흠 잡을 데 없는 말투와 시선, 표정.
“아무리 가면을 써도 상관없어! 얼른 본색을 드러내! 진저백!”
뒤따라온 엘리스가 따져 물어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진저백이 누구죠? 저는 레지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것 같군요.”
아까 전 데카드의 말대로 정말 순박하고 순수해 보인다.
겉으로의 모습보다 내면을 꿰뚫어보는 마수들조차 별다른 트집을 잡지 못할 정도.
[저, 정말 사람이 바뀐 건가?]
[미, 미래가 바뀌었다!]
[…….]
“아! 데카드!”
결과에 만족스러워하는 데카드를 발견한 레지가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오랜 친우를 본 것처럼 그에게 다가간 레지.
“잘 지냈어?”
“물론이지! 너는?”
데카드의 물음에 레지는 앞서 둘을 대할 때보다 훨씬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거. 예전에 보여준 것 같은데 왠지 오늘 한 번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네?”
레지의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아름다운 빛깔에 소라 나팔이 꺼내져 왔다.
“간직하고 있었어.”
“고마워.”
“고맙긴 뭘! 네가 준 건데.”
정말 친구 같은 둘의 모습에 엘리스와 트리스는 할 말을 잃었다.
“와아……. 정말 미래가 바뀌긴 바뀌나 보네요.”
그때 자신들이 알고 있던 복수심에 불타는 진저백이 맞단 말인가.
둘은 정말 동일 인물일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딩디리링-
마탑에서 수업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레지는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안! 나 수업 가야 해서.”
“그래, 그래. 수고하고.”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레지는 손까지 흔들며 마탑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그 뒷모습이 급하게 추수하러 가는 젊은 농부와 같이 세상에 때는 하나도 묻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믿겠어?”
“……믿기 싫지만 믿을 수밖에 없네요.”
트리스도 고개만 살짝 마지못해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제 실험이나 해보자!”
그의 손 위에서 아까 보았던 소라 나팔과 똑같이 생긴 나팔이 튀어나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