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과거의 내가 해주는 과거 이야기
“이게 뭔데 그래?”
안에 든 나팔을 보고 데카드는 레지가 실망할 줄 알았다.
그냥 뭣도 아닌 예쁜 소라 나팔 딱 그 수준 같았기 때문이다.
“데카드! 너 정말 이게 뭔지 몰라?”
“……?”
그냥 나팔 아닌가?
“정말 모르는구나.”
레지는 고개를 저으며 이 소라 나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마도 나가 종족의 보물 같아.”
“나가 종족?”
나가는 쉽게 말해 동화에 나오는 인어의 모습을 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어와는 달리 사람의 모습을 한 윗부분이 용처럼 단단한 비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나가 종족은 오래전에 모습을 감췄잖아.”
데카드의 말대로 나가 종족은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낸 지가 300년이 넘었다.
“이 300년. 뭔가 의심스럽지 않아?”
“설마 암흑시대?”
“맞아! 나가 종족은 암흑시대의 전조를 느끼고 바다에 숨은 거라니까?”
마치 성물을 다루듯 조심스레 소라 나팔을 들어 올린 레지.
조금만 방심하면 눈물도 떨어질 기세다.
“그래도 이건……. 데카드가 가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지가 나팔을 데카드에게 넘겼다.
“정말?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니야. 데카드가 없었다면 이런 미궁은 와보지도 못했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
나팔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긴 했으나 이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됐어. 너 가져.”
자신은 이런 거 관심도 없고 심지어 이미 하나 더 있다.
“아, 아니야. 그래도 네가…….”
“너 가지라니까? 그리고 내가 앞으로 너한테 모질게 굴더라도 내 진심은 아니라는 걸 그 나팔을 보면서 명심해 줘.”
“아, 알았어…….”
레지가 나팔을 품에 꼭 안으며 일어서던 와중에 왕좌 뒤편 밝은 빛이 보였다.
“저기 출구가 있어!”
“나가자.”
미궁을 나온 두 남자.
어느새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우정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나는 이제 수업 들어가 봐야겠다. 데카드는 안 들어올 거지?”
뭔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이 살짝 그렇긴 했어도 사실이라 할 말은 없었다.
“그래.”
“아, 맞다! 탐지기! 탐지기를 창고에 갖다놔야 하는데…….”
“그건 내가 해줄게.”
자신도 써야 하던 참이니 마침 잘됐다.
“정말 고마워! 그럼 다음에 보자!”
“레지.”
달려가려던 레지를 데카드가 붙잡아 세웠다.
“응?”
그의 순박한 얼굴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진저백의 얼굴이 겹처 보였다.
“다음에는 내가 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지도 몰라.”
“왜?”
“이유는 묻지 마. 내가 그런다 해도 너무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찾은 나팔을 기억해.”
“알았어! 나 이제 간다!”
수업에 늦은 진저백은 후다닥 미개발 지역을 벗어나 마탑으로 뛰어가고 데카드는 탐지기를 손에 넣었다.
[이걸로 미래가 바뀔까요?]
“글쎄.”
과거의 내가 워낙 미쳐있어서 저 소라 나팔이 중재자가 되어 줄진 미지수다.
“과거의 일은 끝났으니까 이제 팔찌만 찾으면 돼.”
본래 기억하고 있던 마나를 리셋.
그곳에다 팔찌에 담긴 젠킨스의 마나를 집어넣는다.
우우웅-
밝게 빛나기 시작한 탐지기.
그것은 곧 도시에 떨어진 또 다른 팔찌를 찾기 시작했다.
* * *
“이제 점이 커지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 같군요.”
“잘 됐네요! 이제 바다는 꼴도 보기 싫어요.”
뗏목이 최신식 설비를 갖춘 보트처럼 붕붕 바다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때, 조금씩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는 점이 위치한 섬.
그 섬은 트리스가 너무도 잘 아는 곳이었다.
“마지아 섬……?”
“마지아 섬이요? 그 마탑이 있는 곳 아닌가요?”
둘은 놀랄 겨를도 없이 마지아 섬 해안에 도착했다.
“둘이 마지아 섬에 있었을 줄이야.”
트리스는 과거로 왔어도 여전히 익숙한 해안가의 모래를 사악 쓸며 신기해했다.
“그럼 어서 데카드를 찾으러 가요!”
“물론입니다.”
둘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목표에 얼른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너흰.”
갑작스레 들린 말소리에 엘리스가 그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검은 장발의 남자.
저렇게 버젓이 있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높은 바위에다 햇빛의 후광까지 겹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이미 목소리에서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 말았다.
“데카드……?”
“내 이름 말고 너희 이름. 또 말하게 하면 죽여 버린다.”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온전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털썩-
트리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엘리스는 여전히 커다래진 눈을 감지 못했다.
“느껴지는 마나를 보니 붉은 머리 계집은 마법사고 다른 계집은 그냥 민간인이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마지아 섬 주변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결계와 방어 마법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하지만 트리스가 누구인가.
미래의 마탑 총장이 이때 쓰고 있던 마법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저런 뗏목으로도 손쉽게 해안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저 뗏목으로?”
모래사장에 정박해 놓은 커다란 뗏목이 데카드의 눈에 들어왔다.
“뭔 말 좀 해봐라, 침입자들아. 너희가 지금 죽지 않는 이유는 흑마법사가 아니라서야. 그래도 죽일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든?”
데카드의 양손 위에서 소환 마법진이 각각 튀어나왔다.
여차하면 마수들이 해안가를 뒤덮을 것이다.
“다, 당신은 과거의 데카드죠!”
그때 엘리스가 겨우 얼어 붙어있던 입을 풀었다.
“과거의 데카드? 너희도 설마 미래에서 왔냐?”
“너희도……?”
트리스가 데카드의 말에 미간을 좁힐 때 그는 바위에서 내려왔다.
“팔찌를 차고 있는 것도 똑같고. 색깔은 좀 다르지만.”
이 말에 트리스는 확신했다.
“미래의 당신을 만나셨군요.”
“맞아.”
과거의 데카드는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재밌는 놈이었어.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하는 짓이 딱 나더군. 내 마음도 다 읽어버리고.”
“저희는 그를 데리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냐? 그럼 데리고 가라.”
과거의 데카드는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나 둘은 아직 용건이 남은 듯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저, 저기! 데카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요!”
뭔가 사생활을 캐묻는 것 같아 살짝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건 본인에게 묻는 거니 상관없었다.
아니, 없을 거라고 믿었다.
등을 돌린 채로 비릿하게 웃은 과거의 데카드.
이 표정은 장난기가 제대로 발동했을 때만 나오는 버릇이다.
“좋아! 말해 주도록 하지. 미래의 내가 불편해할 것 같긴 하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니까.”
“맞습니다.”
트리스도 맞장구를 쳐주며 셋은 바위 위에 둥근 모양으로 걸터앉았다.
“과거의 나는……. 아,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군. 지금의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해 주면 되는 거겠지?”
“네!”
“맞습니다.”
“흐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마치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데카드는 턱을 괬다.
“너희가 듣고 싶어 하는 부분은 아마 3학년 때의 생활일 거야. 아직 3학년이 된 지 4개월밖에 안 됐지만 뭘 좀 많이 저질렀거든.”
“오오!”
역시 과거라도 데카드는 데카드다.
딱 필요한 부분을 집어서 말해 주는 그의 센스에 트리스와 엘리스는 모두 귀를 한껏 기울였다.
“3학년이 되는 것과 동시에 나는 다른 3학년들과 다른 취급을 받았어. 교외 임무라는 명목 하에 곧바로 흑마법사와의 전선에 뛰어들게 됐지.”
“윗선들의 이기심이었군요.”
“맞아.”
마법부의 간부들이 점점 흑마법사의 공세가 강해지자 아직 보호받아야 할 학생을 강제로 전쟁에 떠민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뭣도 모르고 하란 대로 했지. 운이 좋게도 연전연승. 애초에 졌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었어. 보이는 건 시체하고 흑마법사뿐이었지.”
“다른 동료들은 없었나요?”
엘리스의 질문에 데카드가 피식 웃었다.
“동료는 무슨.”
전력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간부들이 그에게 주는 인력 지원은 정말 최소한이었다.
데카드가 마수 소환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수들과 함께라면 혼자서 부대 수준의 힘을 보여주니 다른 인력이 필요 없다고.
“진짜 전부 목을 갈라버리고 싶네요.”
“동감입니다.”
둘은 또 오랜만에 서로의 의견이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승리를 거듭했고 흑마법사 쪽도 나를 견제하기 시작했지.”
그가 간다는 전장에는 항상 뛰어난 실력의 흑마법사와 함정, 저주, 독이 준비돼 있었다.
흑마법이 아닌 그런 공격은 거의 처음이라 정말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그래도 목숨은 건지면서 한계를 부숴나갔지.”
“대단하세요…….”
“대단은 개뿔. 목숨이 간당간당하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렇게 임무를 뛰고 오면 데카드는 마탑에 다시 돌아왔다.
“한 번 임무를 나가면 보통 1주일은 있다 와. 그러니 한 달의 절반은 이 마탑에. 다른 절반은 흑마법사와 싸우면서 보내는 거지.”
다른 말로 바꾸면 1년의 절반을 흑마법사와 싸우기만 하면서 보낸다는 말이다.
“지옥이 따로 없군요.”
“멀리 갈 필요가 없었지. 세상이 곧 지옥이었으니까.”
“데카드…….”
처음으로 장난기 없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 미소 짓고 있었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고통과 절망을 맛 본 쓴웃음이었다.
“그러면서 사람도 참 많이 죽였다.”
“흑마법사들은 죽여도 괜…….”
“아니. 그냥 사람 말이다.”
“…….”
둘의 얼굴에서 의문스러움이 느껴졌다.
“미래의 나는 깨끗한 사람인가 봐. 그건 만족스럽네.”
“데카드가 사람들을 왜……?”
그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당연히 이유가 존재했다.
“대부분은 역병 때문이었어.”
역병은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인체 저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옮는 전염병을 얘기한다.
이 역병이 마을 하나에 퍼지면 그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출근하면서 그곳에 역병을 퍼뜨린다.
그렇기에 초기 진압이 중요한데 말했다시피 역병은 불치병.
낫지 않는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워야 합니다.”
트리스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마 미래의 나는 이런 더러운 면을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 꽤나 너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내가 남의 기분을 생각한다니.”
꼭 마음에 들었다기보단 1000년간의 세월이 그를 억지로 철들게 한 것뿐이다.
“하긴. 둘 다 예쁘장하게 생겨가지고 내 취향이긴 해.”
데카드는 앉은 자리에서 조금씩 둘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동시에 붉어지는 둘의 얼굴.
그는 단번에 이 신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다.
“호오. 너희, 나를 좋아하는구나?”
부정해 봤자 딱히 얻을 건 없기에 둘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하지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미래의 선배는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아마 모르는 척 아니겠냐? 지금의 나도 이렇게 알았는데 미래의 내가 그럴 리 없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1000년은 굉장히 긴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다른 인간과 단절된 삶을 보낸 데카드는 이런 쪽의 눈치와 개념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오는군.”
과거의 데카드가 가리킨 해안가 저편에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