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나는 왜 그랬을까
“너는 무슨 부대 시찰 나왔어?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나도 모른다고.”
마탑 쉬는 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도시를 돌아다니는 과거의 데카드.
그를 보며 필립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야, 숙여.”
낌새를 눈치챈 데카드가 필립의 고개를 눌러버렸다.
“가, 갑자기 왜 그래!”
“쉿.”
지붕의 난간보다 더욱 낮게 엎드린 둘은 멀리서 본다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데카드는 그 지붕 쪽을 눈여겨보다가 다시 길을 걸어갔다.
“지금 우리의 미행을 알아챈 거야?”
“그래.”
“야성인가?”
둘은 미행을 위해 마나는 물론이고 기척까지 지우고 다녔는데 과거의 데카드가 단숨에 이쪽을 바라본 것이다.
“이때가 아마 한창 파견 임무를 나갈 때라 신경에 날이 잔뜩 서 있어.”
마지아 섬 바깥은 흑마법사가 카페에 있고 음식점에도 있으며 세상 곳곳에 널려있다.
그런 세상에서 번번이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 돌아왔는데 감각이 무뎌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때부터 괴물 예행 연습을 받은 거군.”
“괴물 예행연습은 또 뭐냐.”
“신입 집행관이 괴물 소리를 들으면서 다닌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내 말 듣긴 한 거냐?”
필립은 데카드가 뭐라 하든 과거의 데카드를 관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과거의 데카드가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수, 숙여야 하나?”
또 들킨 건가 싶어 급히 몸을 낮춰봤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왜 저러냐?”
“낸들 아냐.”
이제는 나도 자신을 모르겠다.
“어? 저거…….”
과거의 데카드가 바닥에서 주워 올린 물건을 뚫어져라 보던 필립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일이 더럽게 꼬였네.”
“팔찌가 왜 하필…….”
그는 은색 팔찌를 차고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맘에 드는 듯 손목에 찼다.
이후 계속 여느 때와 같이 걷기를 반복했다.
원래라면 필립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갔겠으나 팔찌를 낀 데카드를 본 이후부턴 착잡한 마음이 더 앞섰다.
“미치겠네.”
“달라 하면 줄까?”
데카드는 말없이 필립의 눈을 쳐다보았다.
“……안 주겠구나.”
자신에게 음료수를 뿜은 학생을 살아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팬 과거의 데카드다.
그런데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건을 달라 하는 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일도 없을 것이다.
“미래의 너라고 밝히면서 들어가는 건 어때?”
꽤나 괜찮아 보이는 필립의 의견이었으나 이번에도 데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저주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냥 나한테 마법을 날리겠지.”
“아니면 싸우는 건 어때? 기절시키고 빼앗아오자!”
“쉽지 않을걸?”
“왜?”
마탑의 3학년 때부터 어중간한 흑마법사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저 때 6서클을 달성했던 데카드는 7서클 흑마법사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우리 둘이면 이기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일대가 엄청 시끄러워 질 거야.”
“그렇겠네.”
“어떻게 해야 되려나…….”
둘이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마수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뭔데?’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물어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바로 미인계예요!]
이 단어만 들어선 설명이 되지 않기에 데카드는 그녀를 이쪽 지붕 위에 불러냈다.
슈화아아-
갑자기 빛 무리와 함께 요르가 나오자 필립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내 마수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그러니까 미인계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이 시대의 마수왕님도 여자를 엄청 밝힐 거 아니에요!”
그 말에 억울해진 데카드가 반문했다.
“……야. 내가 여자를 언제 밝혔어.”
“어쨌든! 제가 과거의 마수왕님을 유혹해서 팔찌를 가져오는 거죠!”
할 말이 없어진 데카드와 필립.
“어때요? 제 작전이!”
[그냥 딱 요르답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라던데 요르는 오래 살겠어!]
[…….]
[그냥 다른 작전을 밀어붙이는 게 낫겠습니다.]
필립도 이건 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데카드는 팔짱을 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마수들은 주군의 결정이니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너 여기서 살 생각인 건 아니지?”
“뭔 개소리야.”
“아니. 그런 게 아니면 왜 이런 작전을……?”
“저때의 나는 종잡을 수가 없는 놈이야.”
그래서 한 번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게다가 지배자급 마수의 순수한 마나는 그 도박의 확률을 높이 올려줄 터.
“가 봐. 요르.”
“넵!”
[잘 될까 의문이군요.]
마수들은 걱정이 앞섰지만 요르는 신난 얼굴로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잠깐 골목에 내려온 그녀가 밖에 있는 학생들의 옷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눈을 감고 집중하자 점점 요르의 곁으로 모여드는 푸른 마나.
그것들은 곧 형상을 갖춰나가며 마탑의 교복으로 변했다.
기예에 가까운 모습에 필립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 쟤는 마나의 먼 친척이나 다름없는 애야.”
“사람이 아니라 마수니까. 이해하도록 노력해 볼게.”
머릿속에 있던 상식이 실시간으로 부서져 나가는 순간이었으나 필립은 참고 요르의 작전 수행을 지켜보았다.
“흥흥~”
데카드의 출현으로 쫙 갈라진 마탑의 도로를 요르가 발랄하게 걸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것 같은 백발의 학생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절반은 그녀의 미모를.
또 나머지 절반은 데카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자기 눈앞에 누가 있는지?”
“설마 모르겠어? 알아서 피해 가겠지.”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요르는 데카드와 가까워졌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돌려세운 요르.
주변 학생들 모두가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데카드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뭔가 말하려는 순간.
“잘 먹겠습니다!”
요르가 선수를 쳤다.
순식간에 포개지는 둘의 입술.
정적-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얼어붙음과 동시에 말을 잃었다.
“…….”
들고 있던 물건은 손에 힘이 풀려 다 놓쳐버렸고 함께 풀려버린 다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너네 마수 뭐하냐?”
“나도 모르겠다.”
괜히 맡겼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으나 주사위는 굴려졌다.
지금은 지켜볼 때다.
“하아……! 좋다!”
요르가 먼저 입을 땔 때까지 데카드는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구냐. 전전 여친? 아니면 전전전 여친이었나?”
“뭐가 이렇게 많아요! 가…… 아니라…… 많아!”
데카드와 얼굴이 똑같아 존댓말이 먼저 나온 요르는 다급히 말을 바꿨다.
“이유를 설명해. 너 때문에 시선이 엄청 끌렸어.”
시선은 원래 끌고 다니지 않았나?
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데…… 데…… 데…….”
“데, 뭐.”
“데…… 데…….”
요르의 입에서 데라는 단어가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 같은데 입이 거부하고 있었다.
지금 하려는 행동은 분명 해선 안 될 행동이지만 작금의 상황에선 유일하게 허용됐다.
‘내가 이거 하려고 지원한 건데……! 빨리 말해!’
요르가는 이후로 몇 초 동안 꾸물거리다가 결국 말했다.
“데카드!”
“왜.”
“꺄악! 말했어! 마수왕님을 이름으로 불렀어!”
지붕에서 보고 있던 데카드는 순간 황당해졌다.
“그냥 사심 채우기 같은데.”
“조용히 해봐.”
필립의 말을 묵살하고 다시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요르에게 집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참고로 말하자면 나 여자도 때릴 수 있다.”
마탑에서 유명한 또라이로 데카드는 남녀 상관없이 똑같이 패기로 정평이 나 있다.
소름 돋는 말을 눈앞에서 들어도 요르는 설레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기분은 잠시 눌러두기로 하고 이제 본론에 들어갔다.
“이 팔찌!”
“팔찌가 왜.”
요르가 그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거니까 돌려줘!”
그 모습을 본 데카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물건을 주웠으니 요르의 잃어버렸다는 말도 개연성에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방법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싫은데.”
바로 데카드의 지랄 맞은 성격.
“내 건데 돌려주라니까?”
“싫다니까?”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돌아섰다.
“할 말 없으면 간다.”
휙 고개를 돌린 요르가 지붕 위에 있는 데카드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서 과거의 너는 대체 왜 저러냐는 마음이 팍팍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노려봐봤자 자신에게 나올 정답은 없다.
“야아! 기다려!”
결국 요르는 과거의 데카드를 다시 따라가 어깨를 붙잡았다.
“멈추라니……!”
“경고하는데.”
그가 말하면서 뿜어지는 스산한 살기에 요르의 숨이 턱하고 막혔다.
“다신 내 몸을 함부로 건들지 마.”
결국 남들처럼 얼어붙어 버린 요르는 다시 데카드를 잡지 못했다.
무서워서는 아니고 너무 설레서.
“으으으……!! 과거의 마수왕님도 너무 멋있어……! 화내는 모습도 멋있으시다니까……!”
몸을 부르르 떨던 요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끈덕지게 따라가려 했다.
‘됐어, 요르. 이제 그만 돌아와.’
“히잉…… 아쉽다.”
조금 더 스킨쉽…… 아니, 임무를 하려 했던 요르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데카드에게 돌아갔다.
[그래도 요르치곤 잘했다?]
[으음! 나도 동감이다!]
[…….]
[아깝긴 했지.]
뭔가 기분 나빴지만, 칭찬은 칭찬이니 요르는 헷갈리는 마음으로 입을 꾹 닫았다.
“이제 어떡하지?”
“어떡하긴. 다음 작전을 써야지.”
“다음 작전?”
데카드는 씨익 웃었다.
* * *
“흐음…… 늦으시네.”
일어나보니 잠시 마법부에 다녀오겠단 쪽지 하나만 남기고 떠난 데카드를 기다리던 엘리스.
그녀는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혹시나 집에 돌아오는 그가 보이면 바로 달려가기 위해서.
“벌써 밤인데…….”
시간은 오후 10시.
저녁을 먹어도 한참 전에 먹었어야 할 시간이다.
“음식 다 식어버렸네.”
그와 함께 먹으려고 만들어 둔 음식들은 이미 차게 변해버린 뒤.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지?”
엘리스는 답답한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슬러 볼까 해서 부원들이 있는 숙소로 갔다.
똑똑-
“언니!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데카드가 마법부로 간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오질 않아서. 혹시 여기에 왔다 가셨니?”
“아니? 부장님 얼굴은 우리도 못 봤는데?”
엘리스는 더 굳어진 표정으로 불안감에 손톱까지 물어뜯었다.
“마법부로 가셨다고? 그러면 장관님이 불러서 가지 않았을…… 언니?”
아스카가 다시 현관을 봤을 때 엘리스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빨리 가자……!”
가면까지 쓰고 텔레포트 기계까지 단숨에 도착한 그녀는 아사이드, 마법부로 움직였다.
눈앞에 큰 구멍이 뚫린 마법부 건물이 보였다.
“여기에 있는 거죠? 데카드?”
그렇게 믿으며 엘리스는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드, 들어가십쇼!”
트리스하고도 자주 오고 데카드와도 자주 온 엘리스가 정문을 경비하던 마법사들은 그녀를 곧바로 보내주었다.
건물 안 로비로 급하게 달려간 엘리스는 다짜고짜 말했다.
“장관님을 뵙고 싶어요!”
“네……? 혹시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하지만 빨리 뵈어야 해요!”
“예약하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합니다.”
엘리스의 살심이 불타오를 때 멀리서 한 노인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자 모두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됐네. 난 여기 있으니.”
거적때기가 된 로브를 두른 젠킨스가 걸어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