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왕년의 나
“야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시간 여행이라도 했다고?”
“그게 아니면 우리가 단체로 유물이 건 환상에 빠졌거나. 근데 아마 시간 여행일 확률이 더 높을 거야.”
점점 불안해지는 상황에 필립은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일단 버튼을 누르…….”
필립이 자신의 손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팔찌가 없어…….”
“이쪽 공간으로 날아오다가 떨어졌나 보지. 나도 없어.”
데카드가 들어 보인 손목에도 역시 팔찌는 보이지 않았다.
[엉……? 마수왕님. 자다 일어났는데 왜 우리 마탑에 와 있냐?]
[그러게요?]
[트리스란 인간을 보러 오신 겁니까?]
[그런 게 아니다. 멍청이들아.]
[…….]
아직 상황 정리가 필요한 데카드 대신 짹짹이가 지금까지의 일을 쭉 설명해 주었다.
여기가 어디고 왜 왔는지.
[그럼 큰일 난 것 같은데요? 팔찌도 없으니 돌아가지도 못할 거 아니에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던 데카드가 입을 열었다.
“아마 팔찌가 다른 공간에 있지는 않을 거야. 이 마탑 어딘가에 떨어졌겠지.”
“그건 다행이네.”
외딴 공간의 틈새에서 잃어버린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그래도 뭔가 나아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조금 걸어보자.”
데카드와 필립은 골목에서 나와 마탑의 시내로 나왔다.
현재 마탑은 수업시간.
그렇기에 다른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마탑이구나.”
마탑은 물론이고 마지아 섬도 처음 와본 필립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 볼 때만 좋지 나중 가면 질려.”
“그래도 이런 곳에서 공부한다는 게 얼마나 좋아.”
필립은 지방 마법 아카데미 출신으로 이런 환경은 꿈도 못 꿨다.
“어쨌든 눈 크게 뜨고 다녀봐. 어디 팔찌라도 떨어져 있을지 누가 알아.”
팔찌만 있다면 이곳에서의 탈출이야 쉬운 일이다.
그렇게 마탑 주변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가게 안에 있는 달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정말 암흑시대네…… 이걸 어떻게 알았냐?”
“감으로. 세상이 주는 차가움은 이 시대에서밖에 느낄 수 없거든.”
“근데 이 연도면……. 네가 학교 다닐 때 아니냐?”
“…….”
순식간에 썩어 들어간 데카드의 표정.
1학년이나 2학년 때면 모르겠는데 하필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3학년이다.
“너 학생 때 이야기 한 번도 안 했잖아. 유물 덕분에 오늘 좋은 구경하겠네.”
“오늘이 뭐냐. 팔찌가 없으면 평생 갇혀 있게 돼.”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딩동댕동-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마탑의 옛 종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소리와 함께 짜기라도 한 듯 한꺼번에 문을 여는 가게들.
“야! 저기 학생들 온다!”
“일단 숨자.”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 데카드와 필립은 다시 골목으로 들어가 원활한 시야를 위해 지붕까지 올랐다.
“마탑 학생들 진짜 많네.”
학생들만으로도 이 넓은 도시를 가득 채운 느낌이다.
“저 중에 태반이 1학년이고 3학년은 엄청 적어.”
“얼마나 되는데?”
“비율로 따지면 100:1 정도야.”
“……미쳤네. 진짜 적자생존이구나.”
암흑시대라는 시대 특성상 강한 힘을 가장 우선시했기에 이런 기준들이 더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데카드는 그 기준들을 모두 우습게 넘어 다녔다.
“야야. 저기 봐봐. 왜 사람들이 갈라지지?”
학생들로 붐볐던 도시가 마탑 입구에서 누군가 나오자마자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쫘악 갈라졌다.
“…….”
데카드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아는 듯 표정을 구겼다.
누군가 어떤 한 명이 거리를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근처에 있던 학생들은 피해 다니기 바빴다.
“저거 설마…….”
이제 지붕에서도 보일 만큼 그 인물이 가까워졌다.
필립은 입을 벌리고 요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교복은 대충 입고 검은 장발이 돋보이던 남자.
양쪽 귀에는 피어싱을 하고 드러난 손목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메탈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는 길에 침을 퉤 하고 뱉더니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
데카드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필립.
“……그래. 저게 나니까 그만 좀 쳐다봐.”
“진짜 역변을 했네.”
머리만 봐도 과거의 데카드는 어깨까지 오는 장발을 뒤로 묶었다.
“표정은 왜 그러고 다녔냐?”
길을 걷던 데카드의 표정은 세상만사가 다 귀찮고 불만인 표정이었다.
누구 하나 걸리면 그대로 뼈도 못 추릴 것 같던 기세.
“나도 몰라.”
[그래도 귀여우신데요?]
[…….]
[맞다! 뭔가 느낌이 다른 마수왕님! 색다르다!]
[그래도 우리의 군주는 지금의 마수왕님이시다! 모두 헷갈리지 마라!]
고오른의 일침에 요르가 톡 하고 쏘아붙였다.
[나도 알거든?!]
“어어, 저기 나온다.”
가게에 들어갔던 과거의 데카드가 한 손에 햄버거를 들고는 와구와구 씹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따라가자.”
“……걔를 왜 따라가. 팔찌 안 찾을 거야?”
“야. 과거의 너한테 걔라니. 그리고 팔찌는 너를 따라가면서도 찾을 수 있잖아?”
어지간히 과거의 데카드가 궁금했던 필립은 지붕 위를 넘나들며 그를 쫓았다.
일이 점점 꼬이는 것을 느낀 데카드.
“미치겠네. 하아…….”
이젠 과거의 자신에게 비는 수밖에 없다.
제발 이상한 사고는 치지 말아 달라고.
그러나 그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비켜.”
데카드가 오는 줄 모르고 앞에서 앞에서 음료수를 맛있게 빨던 학생.
그러다 입에 있던 음료수를 뿜고 말았다.
“어어……!! 미안……!!”
과거의 데카드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재의 데카드.
둘 다 표정이 시간차로 안 좋아졌다.
“저, 정말 미안해!”
“…….”
학생은 갖고 있던 손수건으로 데카드의 얼굴과 교복을 닦아주었으나 말로는 좋지 못했다.
“무슨 마법사가 사람을 저렇게 잘 패냐.”
필립이 이런 말을 던질 정도로 전문 싸움꾼 같은 데카드의 움직임에 학생은 그냥 두들겨 맞아야 했다.
“쯧.”
혀를 짧게 찬 그는 다시 길을 걸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넓어진 데카드와 다른 학생들 간의 간격.
“너 왕따냐?”
“조용히 좀 할래? 저 때는 많이 날카로웠던 것뿐이야.”
“아주 두 번 날카로웠다간 사람 죽이겠다.”
이후로도 둘은 계속 데카드의 뒤를 밟았다.
* * *
사각사각하는 펜 소리가 전부였던 조용한 젠킨스의 업무실.
“흐음……. 곧 시끄러워지겠군.”
바쁘게 움직이던 펜을 잠시 멈추고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진득한 살기가 안에서부터 풀풀 흘러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몬스터 같이 흉포해진 마나.
그것 하나로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근무시간 아닌가? 트리스 총장?”
“길게 얘기할 생각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젠킨스는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
그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찻장에서 차를 꺼낸 그는 물을 빠르게 우려내고 그녀의 앞에 놓았다.
“선배와 집행부장이 유물로 벌어진 공간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릎 위에 놓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실종이라고 보기엔 어렵네. 내 팔찌의 신호는 아직 끊기지 않았거든.”
타는 속을 죽이기 위해 차로 마음을 다스린 트리스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그럼 뭡니까?”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마 어떤 곳에 도착을 했을 거야. 그 공간, 비틀어짐이 너무 심해.”
“짧게 설명해 주십쇼.”
방금 전까지 완성하던 서류를 들고온 젠킨스가 종이를 평면으로 들어 보였다.
“이게 우리가 사는 공간이네. 그리고 여기가 두 사람이 들어간 구멍이라 치자고.”
종이의 중앙에 점 하나가 찍혔다.
“들어간 구멍이 있으면 출구도 있어야겠지.”
또 다른 점 하나가 종이 구석에 찍혔다.
“하지만 유물이 우리의 공간을 뒤틀어버렸지. 이렇게 말이네.”
꾸깃꾸깃 접힌 종이는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젠킨스가 찍은 두 개의 점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젠킨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공간이 이렇게 접혀버렸으니 혹시나…. 정말 혹시나… 과거로 갔을 수도 있겠어.”
“과거…… 말입니까?”
“그래. 언제 어디인지는 모르나 과거로 갔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네.”
트리스는 젠킨스가 꾸긴 종이를 다시 평평하게 펴보았다.
접힌 자국이 선명한 종이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거절하겠네.”
앉아있던 트리스의 어깨에 조금씩 중압감이 느껴졌다.
“물어본 게 아닙니다.”
그녀가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공간의 힘도 조금씩 강해졌다.
“제가 이제 와서 명령에 굴복할 것 같습니까.”
공간의 구속력을 오직 힘으로 뚫어내며 트리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젠킨스의 손이 책상을 툭 하고 내려치자 중압감은 더욱더 늘어났다.
마치 중력이 늘어난 것처럼 저항할 수 없었다.
“크윽……!!”
결국, 다시 의자에 앉게 된 트리스.
“……차에 뭘 타신 겁니까.”
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마나와 힘을 일으켜 보았으나 그중 어느 것도 되지 않았다.
“미안하네.”
“당장 이 마법을 푸십쇼. 저는 여기서 실랑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나도 아네. 자네는 마탑에 가서 업무를 봐야 하지.”
“…….”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감돈다.
“수면제를 탔으니 곧 잠이 쏟아질 거야.”
원래라면 강대한 마나가 약효를 전부 밀어버릴 테지만 지금은 특수한 약에 효과로 봉인되어 있는 상태.
“일어나 있을 땐 내가 그 둘을 꼭 다시 돌아오게 하겠네. 약속해.”
“안 됩니다……. 선배는…… 제가…….”
트리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소파 위에 쓰러졌다.
“데려가 침대에 눕혀주시오.”
그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비서는 트리스를 업고 끙끙 방까지 내려갔다.
다시금 조용해진 업무실.
“그럼 다시 시작해야겠군.”
작업 중인 서류 더미에는 공간의 시간 개념, 시간과 공간의 관련성 등 어려운 마법 논문들로 한 가득이었다.
“아직 둘은 살아있어. 그럼 기계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기계는 어느 공간에 있을까.
과거에 있다면 그 과거는 언제쯤일까.
둘을 찾기 위해 가려던 트리스를 막은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머리가 아프군…….”
여러 의문점이 뒤섞여 집중을 방해했다.
그러다 트리스가 펴놓은 종이가 눈에 띄었다.
“……저거다. 꾸겨졌으면 다시 피면 될 일. 하지만 가능할까?”
가능하고 말고는 모른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
젠킨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당장 보관소로 내려갔다.
“비켜라.”
“자, 장관님!”
보관소에 누가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던 마법사들이 몸에 힘을 바짝 주며 비켜섰다.
“줄다리기를 시작해 볼까.”
푸른 유물은 아직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공간이 꾸겨진 상태로 작동을 멈춘다면 아무리 팔찌를 갖고 있더라도 현세로 오게 할 수 없다.
“흐읍……!!”
젠킨스의 심장을 감은 여덟 개의 서클이 회전했다.
고오오오오-
그것만으로도 요동치는 주변의 마나.
마나룸에 있던 마나는 그의 손으로 집중되었다.
“스페이스 리셋.”
이제부터 공간을 재설정한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