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시간 여행
웬만한 거실 크기와 맞먹는 침대에서 눈을 뜬 데카드.
그는 오늘따라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보통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불안하네.’
자신을 깨운 것은 아침 햇살도 짹짹이도 아닌 불안감이었다.
‘설마……?’
데카드는 몸을 일으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의 문을 열자 하얀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는 암살자가 보였다.
‘도망치진 않았네.’
보아하니 죽은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면 아마 뭐든 물어봐주십쇼 상태로 바뀌는 것이 끝났을 거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데카드는 아쿠아 돌핀 한 마리를 소환했다.
“쟤한테 물을 뿌려줘.”
카가각-
돌핀의 꼬리가 허공을 스윽 하고 쓸어주자 그 궤적 그대로 물보라가 일었다.
물보라는 허공을 잠시 부유하다가 곧 철썩 하고 암살자에게 떨어졌다.
“어푸……!! 어푸……!!”
본능적인 감각 때문인지 암살자는 순간 이곳이 다락방이라는 사실도 망각하고 헤엄을 쳤다.
“수영 잘하네?”
“…….”
추태를 보였다는 것을 알게 된 암살자는 자연스럽게 팔과 다리를 회수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대답할 준비가 됐나?”
“젠장…….”
오늘 밤만 해도 자결을 수십 번이나 시도했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려고도 했고 혀를 깨물려고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저 망할 까마귀가…….’
살짝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는 까마귀는 그가 자살하려 할 때마다 귀신같이 날아와 막았다.
‘결국 말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 안 오는 것은 필시 자신을 버린 것이다.
곧 동료가 구하러 올 거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으나 사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후우……. 그래, 말하겠다. 대신 나의 신변을 보장해 줘라.”
데카드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너를 집행부로 안전하게 이송할 것을 맹세하지.”
“좋다. 뭐가 궁금한 것이냐?”
“너희 집단에서 최근 일어난 중요한 일 전부다.”
오전 동안, 데카드는 다락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류 암살자가 모은 정보가 좀 많아야지.
“잠깐, 잠깐. 너희 갈까마귀하고 흑마법사가 손을 잡았다고?”
그 정보 중에서 제일 충격적인 건 단연 이것.
“그래.”
“제일 껄끄러운 놈들이 손을 잡았네.”
둘 중 하나만 해도 큰 손실을 감수하고 상대해야 할 전력인데 두 진영이 힘을 합쳤다.
“언젠가 흑마법사가 우리 성지로 온 적이 있는데 단장하고도 만났었다. 아마 그때인 것 같군.”
“흐음…….”
“동맹이 맺어진 뒤로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지. 갑자기 스켈레톤이 우리의 암살복을 입기도 하고 흑마법사도 성지에서 자주 보였다.”
“너희 단장이 왜 동맹을 맺은 거야?”
이 부분은 모르는 듯 암살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특별해 보이는 정보는 많이 얻었다.
“이 정도면 널 살려줘도 괜찮겠어. 지금 당장 집행부로 옮겨주지.”
“지금 당장?”
“짹짹아!”
다락방의 문이 벌컥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온 까마귀 떼들이 암살자를 데리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으아아악!!”
떨어지지만 않으면 안전하니 이쪽도 약속을 지켰다.
“주인님. 밖에 누가 왔습니다.”
“누가?”
높은 다락방에서 정원의 입구를 보니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번에 그 집배원 아닌가?”
데카드에게 젠킨스의 편지를 전해줬던 그 집배원이다.
그는 숨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로 거의 기어오듯 뛰어오고 있었다.
“마중이나 가볼까.”
짹짹이가 다시 코트로 변하고 데카드는 하늘을 쭈욱 부드럽게 날아 집배원의 뒤쪽에 착지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어어억……!!”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집배원의 숨이 막혔고 동시에 그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다 데카드라는 걸 확인하자 안도의 미소가 집배원의 입가에 꽃폈다.
“여기 편지입니다! 장관님이 하도 빨리 전하라고 하셔서 잠도 거르며 급히 왔습니다.”
“장관님?”
또 임무인가?
하는 생각에 데카드는 인장을 뜯어 안에 있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퇴마부장은 당장 마법부로 오시오.-
사람의 필체가 아닌 기계로 쓴 글씨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 평소 느긋한 성격인 젠킨스가 이런 짧고 굵은 편지를 보내왔다.
“마법부에 무슨 일 있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문으론 미친 마법사가 난동을 피웠다는데……. 잘 모르겠군요. 저는 그럼.”
“감사합니다.”
집배원이 다시 사라지고 데카드는 하늘을 날아 집 안까지 들어왔다.
방에서는 데카드가 너무 일찍 일어나 엘리스와 마수들이 아직도 곤히 자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면 되겠지.”
데카드는 마수들만 자신의 안으로 옮기고 엘리스의 머리맡에는 짧은 손 글씨를 남겼다.
[마법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필립도 아마 도착해 있을 테고, 데카드에게 아침의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텔레포트 기계를 타고 순식간에 아사이드로 도착한 데카드.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날개를 펴서 마법부까지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비행했다.
“뭔가 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도착한 마법부에서는 건물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걸 메우려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바로 올라가자.’
[네.]
로비에 들어온 후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장관실까지 올라갔다.
[문이 열립니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에서 보인 것은 차를 마시고 있는 필립과 의자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젠킨스였다.
그는 반갑게 데카드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게. 퇴마부장. 아침부터 이리 불러서 미안허이.”
“괜찮습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허. 그렇긴 했지.”
데카드는 필립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젠킨스가 타준 차를 홀짝였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
필립의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해가 서쪽에서 떴나?”
“……계속 놀릴래?”
둘이 보자마자 싸우려고 할 때 젠킨스가 서류 몇 장을 들고 왔다.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유물 때문이네.”
“새로운 유물이 나왔습니까?”
젠킨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래 있던 유물이 말썽이야.”
그는 수정구를 꺼내와 안에 담긴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 속에선 유물의 힘에 지배당한 마법사가 그 힘을 사용해 다른 마법사들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있었다.
“이게 유물의 힘이었군요.”
“맞네. 붉은 유물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갉아먹어 더 큰 힘을 주지. 그리고 이쪽도 봐주게.”
“공간이…….”
또 다른 수정구에서 흘러나온 영상은 붉은 유물이 뿜어낸 광선이 푸른 유물의 힘을 각성시키는 장면이었다.
“이 푸른 유물에 의해 생긴 공간의 뒤틀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심지어 그 범위를 점점 넓혀나가고 있지.”
“그래서 저희 둘을 부르신 거군요.”
“맞네.”
유물을 직접 가져온 데카드와 그걸 조사하고 찾아내며 거의 전문가 수준이 된 필립.
둘은 이 상황에 딱 알맞은 인재들이었다.
“저 뒤틀림을 밤새 조사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여.”
공간의 뒤틀림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운이 좋으면 사지 중 하나가 잘려나갈 거고 운이 안 좋다면 평생을 공간의 틈새에 껴서 살게 될 것이다.
둘의 표정을 본 젠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위험한 소리란 건 당연히 알고 있네. 하지만 날 믿어주게. 저 공간이 자네들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아.”
그저 감에 불과했으나 8서클 대마법사의 감이다.
“그건 공간 마법사의 직감입니까?”
“그렇다네.”
“그리고 여기.”
젠킨스가 팔찌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공간의 틈새로 가더라도 이 팔찌가 자네들의 위치를 알려줄 거야. 그럼 내가 바로 꺼내줄 수 있지.”
은색으로 빛나는 팔찌에는 버튼 하나가 보였다.
“이 버튼은 뭡니까?”
“그건 지금 당장 현세로 귀환하고 싶을 때 누르면 되네. 그러면 지체 없이 나올 수 있을 거야.”
데카드는 팔찌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이번 일 성공적으로 마치면. 제 섬에다가 리조트도 세워주세요.”
“약속하지.”
“……이 와중에 돈이냐.”
필립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데카드 자신에겐 꽤나 중요한 일이다.
“행운을 빌겠네.”
젠킨스의 인사와 함께 둘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둘이 작전을 나가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다.
집행관 때 말고는 이럴 일이 없었으니까.
“실력은 좀 늘었겠지? 가서 발목이나 잡지 마라.”
“나도 놀고먹지만은 않았다고.”
엘리베이터는 쭉쭉 내려가 보관소까지 도착했다.
“알지.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선 안 돼.”
“알고 있어.”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가족한테 인사라도 하고 오는 건데.”
“너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마.”
데카드는 필립의 등을 팡 하고 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보관소의 안전 구역을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점점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공간 멀미라는 건가.”
공간이 기형적으로 뒤틀리게 되면 몸의 기관들이 이상을 일으킨다.
그럼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고 멀미나 두통이 동반되어 오는 것이다.
필립과 데카드는 그 멀미를 참아내며 코드 레드 구역까지 왔다.
“여기부턴 눈으로 보이네.”
“그러니까.”
이곳은 공간이 뒤틀렸다는 것이 뭔지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진 곳도 있고 흐느적흐느적 물결치는 곳도 있었다.
“저기 유물이다.”
그 중앙에 자리 잡은 푸른색의 유물.
“준비됐냐?”
“뭐 준비할게 있냐. 그냥 가는 거지.”
이런 건 마음의 준비를 하면 할수록 가기 어려워진다.
계속 생각을 하게 되니까.
오히려 지금 같은 모험을 할 때는 뇌를 비우고 목적만 생각하는 게 맞다.
“들어가자.”
“그래.”
본격적으로 공간의 뒤틀림 안에 몸을 담은 두 명.
둘은 전에 먹었던 음식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 같은 구토감과 함께 중력이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읍…….”
필립은 목젖까지 올라온 구토를 삼켜냈고 데카드는 주변을 살폈다.
“공간의 파문이 커지고 있어.”
데카드와 필립이 들어온 이후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져서 파문이 생기듯 점점 퍼져 나가고 있었다.
파문은 그 크기를 불려 나가면서 결국 둘을 감싸 안았다.
“으윽…….”
동시에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둘은 발바닥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잘 정돈된 잔디를 밟는 느낌……?
그리고 이 냄새는…… 너무 익숙했다.
하지만 여기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닌데?
“여, 여긴…….”
“설마 마탑이야?”
둘은 점점 멀쩡해지는 시야로 하늘 높이 떠오른 99층의 탑을 보게 되었다.
“그럼 여긴 마지아 섬?”
마지아 섬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와 이 느낌.
절대 따라하거나 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공간 이동을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그럼 여기가 마지아 섬이 아니라고?”
“마지아 섬은 맞아.”
데카드의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에 필립이 헛웃음을 내며 되물었다.
“그럼 여기가 대체 어딘데?”
잠시 침묵한 데카드는 주변의 건물들과 마탑의 입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정돈되지 못한 도로.
마지막으로 이 감각.
“공기가 싸늘하고 차가워.”
마지아 섬은 항상 따뜻하지만, 세상이 내뿜는 차가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또한 이 차가움은 사람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감각.
“필립.”
“왜?”
“우리 아무래도…… 암흑시대의 마탑에 온 것 같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