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기억과 악몽
[지, 지금 저 암컷이 뭐라 그런 거야……?]
[마, 마수왕님! 나 귀가 이상하다!]
[흐음……. 뭐! 이상한 일은 아니지! 마수왕님은 매력이 철철 넘치시니!]
[…….]
데카드를 비롯한 네 마리의 마수가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 짹짹이만이 정신을 제대로 잡았다.
[일단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 줘야겠습니다.]
“그, 그래야겠다.”
데카드는 엘리스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계단을 내려왔다.
중간 중간 엘리스가 잠버릇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까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흐응냐…….”
이상한 잠꼬대를 내뱉는 아스카를 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벨린다를 넘자 엘리스의 침대가 나왔다.
“조용히 자라.”
그녀를 눕히고 따뜻하게 이불까지 올려주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편안히 잠든 엘리스의 얼굴은 세상모르게 잠든 아기 같았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만찬장에서 엘리스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엘리스의 칼날은 꽤나 깊숙이 데카드를 헤집어 놓았다.
새벽에 데카드를 잠재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데카드는 조금씩 이불에서 뒤척거리다가 결국 이불을 내팽개쳤다.
“으으……. 더워…….”
[그럼 차가운 마나를 몸에 돌려 드릴까요?]
“그런 더움이 아니야, 요르.”
다시 이불을 덮은 데카드는 역시 안 되겠는지 방에서 뛰쳐나와 성채의 연무장으로 갔다.
마음이 복잡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스륵-
연무장 구석에 꽂힌 목검을 뽑아들고 데카드는 그것을 계속 휘둘렀다.
방향은 오직 위에서 아래로만.
“…….”
연무장 바닥에 그의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허공을 내리쳤다.
[마수왕님! 이러다 걸린다! 감기!]
‘상관없어.’
지금은 오로지 마음을 비우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렇게 하늘 저편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 때까지 데카드는 멈추지 않았다.
“후읍…… 하아…….”
숨을 거칠게 몰아쉬자 폐 안에 쌓여있던 답답한 숨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몸은 죽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복잡한 머리는 깨끗해졌다.
데카드가 서 있던 연무장 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제 자러 갈래.”
목검을 다시 구석에 넣어놓고 데카드는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어제 술을 늦게까지 마신 탓일까?
모두들 자신의 방에서 쿨쿨 콧방울을 띄우며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론과 벨린다는 조금씩 눈을 떴고 고드윈과 아스카는 아직 꿈나라.
데카드는 거의 기절 상태다.
“으응….”
그리고 여기 방금 막 눈을 뜬 여자가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스.
어제 대형 사고를 쳐놓고 속 편하게 누워있는 중이었다.
“나……. 어제 뭐 했지.”
만찬이 시작되고 음식을 막 먹다가 목이 말라서 아무 물이나 삼켰는데 술이었다.
그때부터 만찬장 식탁에 머리를 박고 잤던 것 같은데…….
그 뒤로부턴 누가 실을 끊은 것처럼 기억이 없다.
“일어난 사람이 없네.”
엘리스는 숙취로 아픈 머리를 조금 잠재우기 위해 물을 마시러 갔다.
마실 물로 드워프들이 손님방에 준비해 놓은 생수가 있다.
냉장고에 있던 거라 아주 시원했다.
“흐으…… 시원하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찬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자 이제 좀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히 실수한 건 없겠지?”
정말 누가 통째로 잘라서 날려버린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기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하지만 자신에겐 기억이 없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잠깐 나가볼까.”
바깥 복도에서는 방금 일어났는지 머리 위에 까치집을 얹은 카론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쪽도 숙취가 말이 아닌 듯 눈은 풀려있고 몸은 축 처져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카론.”
“그래. 어제 만찬장에선 잘 자더구나.”
“하핫. 나 어제 뭐 실수한 거 없었지?”
카론은 잠시 입에 갖다 대던 생수병을 떼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깨어있는 시간 때의 벨린다는 술로 인해 깊게 잠이 들었던 상태.
“없었다.”
“휴우…… 다행이다. 데카드는?”
“부장님은 주무시고 있다.”
“그렇구나.”
엘리스는 이제 곧 니다벨리를 떠날 테니 짐을 챙기기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가져온 짐을 넣고 빼먹은 것은 없나 확인하던 그때 자신의 지갑이 사라졌단 걸 깨달았다.
“어? 내 지갑 어디 갔지?”
자신의 품속이나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지갑은 나오지 않았다.
“데카드가 선물해 준건데…….”
자신이 항상 들고 다니던 지갑에 발이 달려 사라지기라도 했는지 어디 갔는지 도통 안 보였다.
어디서 떨어뜨렸나?
“아! 만찬장!”
자신이 어제 몸을 못 가누고 식탁에서 퍼질러 자는 사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엘리스는 어제 먹고 마셨던 만찬장으로 움직였다.
만찬장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접시가 남아있었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으윽…….”
진한 술 냄새에 겨우 가셨던 숙취가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다.
엘리스는 자신이 어제 누웠던, 아니 앉아있었던 자리로 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디 간 거야 진짜....!”
데카드가 준 것은 하나도 잃고 싶지 않아 엘리스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떠오른 어제 만찬장에서의 기억.
데카드가 벨린다와 아스카를 양팔로 들고 만찬장을 나간다.
자신은 왠지 모르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다가 떨어진 지갑.
“여깄다!”
왜 자신이 여기 숨은 건지는 몰라도 딱 타이밍 좋게 떠오른 기억 덕분에 지갑을 찾았다.
“이제 짐을 마저 싸러…….”
만찬장을 나가려는 순간.
나머지 뒷부분의 기억이 엘리스를 덮쳤다.
데카드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친 후 자신이 속삭이듯 내뱉었던 말.
“…….”
엘리스 손에 들려있던 지갑이 투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지갑을 주워야 했으나 엘리스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잠시간 주머니에 있는 단도로 자신의 목을 긋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내가 미친년이지. 미친년이야.”
엘리스는 지갑을 줍고 만찬장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오면서 몇 명의 드워프를 마주쳤다.
“엇! 안녕하세요!”
“덕분에 안전히 잘 살고 있습니다!”
“…….”
그들의 고마움 섞인 인사를 받아줄 정도로 지금 그녀의 머리는 정리되지 못했다.
뭐에 홀린 듯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방에 돌아왔을 땐 벨린다와 아스카가 깨어난 후였다.
“잘 잤어? 언니?”
아직 멍한 아스카 대신에 벨린다가 아침 인사를 해왔다.
“어어…….”
엘리스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충 대답해 준 뒤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영혼이 이탈한 듯한 모습의 엘리스는 처음이라 벨린다가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이건 무슨 일이 아니라 미친 일이다.
자신은 미친 짓을 저질러 버렸다.
“나 그냥 저기 창문으로 뛰어내려 버릴까?”
“뭔 일인데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엘리스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왜. 부장님한테 취해서 고백이라도 했어?”
아스카가 아직 멍한 목소리로 핵심을 찔러 넣었다.
뜨악한 엘리스는 순간 헉 하고 나올 뻔한 목소리를 암살자의 경력으로 씹어 삼켰다.
“그, 그건 절대 아니야.”
“그렇지? 이건 좀 심하긴 했다.”
아스카는 자신이 말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허허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 실은…….”
“아스카. 상상력에도 정도가 있지. 설마 언니가 그랬겠어?”
“나도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벨린다가 끼어들면서 한 확인 사살에 엘리스의 입이 다시 한번 다물어졌다.
결국 이 일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한 엘리스는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움직여야 되면 깨워줘.”
“응.”
이럴 때는 잠이 보약이다.
그냥 영원히 잠들어버리고 싶은 마음과 함께 엘리스는 눈을 감았다.
* * *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마수들과 함께, 부원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
따뜻한 모래사장.
시원한 바닷바람.
친한 친구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크하하하! 모두 죽어라!”
땅이며 바다며 사방에서 물밑 듯 밀려오는 수만 마리의 해골병사.
그들은 사람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뼈로 갈아 만든 무기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싸웠다.
콰아아아앙-! 쩌저저적-!
우르릉-!! 쾅쾅-!!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비바람의 폭풍을 일으키고 지진을 일으키고 해일을 불러일으켜도 해골병사는 줄지 않았다.
부원들이 하나하나 놈들의 손에 죽어갔다.
“얘들아!!”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갈가리 찢기는 듯했으나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니까.
나는 마수들과 함께 병사들의 포위를 뚫어가며 이 흑마법의 술자에게 다가갔다.
놈은 강력했다.
이 내가 흑마법사에게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정도로.
“덤벼라!! 데카드 아르마다!”
나는 전력을 다해서 싸웠다.
마수들도 무기로 변신해서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전멸.
내 가슴팍에 검은 가시가 박히고 그것이 내부를 난도질했다.
마수들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
“…….”
악몽인 줄은 꿈속에서부터 진작에 알고 있어 놀라며 벌떡 일어나는 꼴사나운 짓은 하지 않았다.
이마가 땀으로 축축하다.
[마수왕님! 악몽 꿨나?]
[아무래도 깊게 잠드시지 못한 듯합니다!]
[…….]
[제가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까요?]
‘괜찮아, 요르.’
데카드는 이마에 맺힌 구슬땀을 닦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워라도 해야겠다.”
몸이 악몽으로 흘린 땀 때문에 축축하고 끈적했다.
방에 준비된 샤워실로 들어간 데카드는 옷을 벗고 샤워기를 작동시켰다.
이전에 드워프가 쓰고 갔는지 샤워기가 데카드의 허리 높이에 매달려있었다.
드르륵- 쏴아아-
샤워기를 올리고 온수를 틀자 쏴아 하고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개 같네.”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해봐도 계속 떠오르는 악몽의 내용에 쓸데없이 머리만 아파진다.
계속 정수리로 내려오는 따뜻한 온수에 몸을 맡기며 더러운 기분을 씻어내 보았다.
그렇게 적당히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며 나오자 카론과 고드윈이 돌아와 있었다.
“샤워 중이셨군요.”
“어.”
“어제 저희를 방까지 눕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큰일 했다고.”
데카드는 부원들의 해맑은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계속 악몽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은 부원들의 얼굴과 겹쳐 보였던 탓이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냥…… 악몽을 꿔서.”
“아까 엘리스도 뭔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던데. 걔도 악몽 꿨나?”
아, 엘리스.
악몽에만 집중했다 보니 진짜 머리 아픈 일을 까먹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그건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이다.
“켈른을 만나고 올게.”
“다녀오십쇼.”
데카드는 방을 나가서 켈른이 있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마다 드워프들은 반갑게 인사를 해왔고 데카드는 인사 모두를 친절히 받아주었다.
기사들이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가자 켈른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머리는 좀 괜찮소?”
“문제없습니다.”
“대단하구려. 나는 아직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이제 떠나는 거요?”
켈른은 단박에 데카드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챘다.
“그렇습니다.”
“그대와 동료들에겐 감사하고 있소. 납치범들을 잡아주었으니.”
“놈들이 납치한 드워프들이 어디 있는지도 속히 밝혀내겠습니다.”
“부탁하오. 그리고 떠날 때 편하도록 일회용 스크롤을 주겠소.”
켈른이 말하는 일회용 스크롤은 텔레포트 스크롤이다.
딱 한 번 지정한 장소로 텔레포트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담겨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데카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방을 나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