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독 안에 든 쥐
“오랜만에 보는구나. 인간 마법사.”
“너에겐 불행이지.”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이상 본 흑마법사는 흔치 않다.
도망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숨통을 끊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 고들링은 뭔가 다르다.
‘자신감이 보인다.’
수적으로도 불리하고 뒤에는 얼음 계곡이 버티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다.
그러나 두 고들링의 얼굴에선 절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보이는 것은 자신감.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아니, 100퍼센트 있을 것이다.
이 겹겹이 쌓인 눈밭에서 도사리고 있을 크고 작은 함정들.
하나만 잘못 밟아도 전황이 뒤바뀔 수 있다.
“방독면 착용.”
“착용!”
일단 수면 가스와 여러 상태 이상 가스에 대비하기 위해 방독면을 착용한다.
이 방독면은 예상에 없던 전개인지 흑마법사는 로브 밑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티이라. 리바이어던으로 이 눈을 다 날려버릴 수 있겠어?’
[으음…… 얇게 쌓인 눈! 이라면 모르겠는데! 이건 너무 무겁다!]
바닥이 밟히지 않을 정도로 높게 쌓인 눈은 그 무게가 상당하다.
아무리 리바이어던의 힘으로 눈을 날린다 해도 함정이 있는 깊이까진 파내지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그래! 우릴 잡으러 온 게 아니었어?”
두 고들링은 얼음 계곡 입구에 서서 주춤하고 있는 일행을 약 올렸다.
“젠장! 부장님! 그냥 제가 전부 녹여버리겠습니다!”
고드윈이 흑마법사의 도발에 입가가 파르르 떨리며 양손에 백염을 피워 올렸다.
“고드윈! 잠깐……!”
“화권!”
화르르르르-
백염이 파도처럼 계곡 주변을 휩쓸고 지나가며 함정은 물론 주변에 쌓인 눈까지 서슴없이 녹여버렸다.
함정은 전부 파괴되었고 흑마법사에게까지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하지만 데카드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지반이 너무 약해. 계곡에 쌓인 눈도 자칫하면 터져 버린다.’
계곡에 쌓인 눈이 터져 눈사태가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일행과 두 흑마법사를 덮치게 될 것이다.
설산에서는 데카드가 고오른의 오리지널로 어떻게든 상쇄시켰으나 전투를 앞둔 지금 마나의 분배가 힘들어졌다.
‘오리지널을 쓸 마나를 남겨두어야 하나?’
마음 같아선 당장 저 두 놈을 계곡에서 쫓아내고 다른 곳에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
“부장님! 명령을 내려주세요!”
“데카드?”
아직 다른 명령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는 데카드를 부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두뇌 회전이 빠른 데카드가 이렇게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멈춘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크크큭…… 알아차렸나 보군. 인간 마법사.”
“…….”
“네 생각대로 우리가 조금만 힘을 준다면 커다란 눈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 눈사태는 우리가 있는 이곳은 물론 니다벨리의 외곽까지 영향을 주겠지.”눈사태라는 말에 깜짝 놀란 부원들.
“그래서 데카드가…….”
왜 그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는지 부원들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키는 훗 하고 웃으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그의 손목에 붙어 있는 여러 시약병, 가죽 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다 같이 죽어볼 텐가?”
점점 고조되어 가는 전장의 분위기.
데카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나룸을 천천히 개방시켰다.
“나는 죽기 싫거든. 어떤가? 협상을 해보는 게.”
“협상……?”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미친 고들링의 말에 데카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흑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단어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 협상. 우리의 조건은 이것이다. 니다벨리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 달라. 이 조건만 들어준다면 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
웬만하면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협상이 어쩌고 조건이 어째?
그딴 말은 흑마법사가 지껄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닥치고 목이나 내밀어라. 깨끗하게 잘라주지.”
“결국 독주를 들이키는군.”
“독주일지 명주일진 까봐야 알지.”
데카드가 눈이 녹아 드러난 산길을 저벅저벅 밟아가며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소환.”
마나 안배를 위해 한 단계 낮은 서클의 마수인 니트로 바이슨 세 마리를 소환했다.
푸르르르-
콧김에서 후웅 하고 뿜어져 나오는 불똥.
꽤나 위협적인 모습에 두 고들링이 침을 삼켰다.
“어쩌지 카키? 놈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모 아니면 도. 비전을 꺼내자.”
“……알았다.”
이제는 주사위를 굴릴 차례.
마법사 중에서도 무투파인 휴고는 앞으로 걸어가고 카키는 가스들을 준비한다.
“부장님!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안 돼!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왜, 왜죠?”
데카드는 살짝 고개를 올려 벌써 흔들리기 시작한 고드름과 눈 더미들을 보았다.
“너희까지 끼어들면 정말 눈사태가 일어날 거야. 지금은 나만 움직여야 해.”
“죽어라! 인간 마법사!”
“너는 얘들이 놀아줄 거다.”
달려오는 휴고를 바이슨들이 막아서며 데카드를 방해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일대일 상황이 된 데카드와 카키.
‘마수의 무기는 꺼내지 못해.’
그것을 꺼내고 한 번 휘두르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그 압력을 약하디 약한 눈 더미가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덜덜덜-
눈 더미는 아주 아슬아슬한 상황.
툭 하고 건드리면 터져버리는 시한폭탄과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힘으로 이 고들링 흑마법사를 상대해야 한다.
‘짹짹아. 가자.’
[알겠습니다.]
마수들을 소환하는 것도 위험한 지금 믿을 수 있는 무기는 은밀하고 정확한 짹짹이의 코트다.
깃털 코트에서 어둠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깃털 몇 개가 데카드의 손에 들렸다.
“쉽게 맞출 수 있을 것 같나!”
카키는 연막탄을 펑하고 터뜨리며 데카드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시야만 가지고는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휘익-!
재빠르게 날아간 깃이 카키의 허벅지에 박혀 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내가 전혀 보이지 않을 텐데…….’
데카드의 앞에서 시야를 가린 것은 오히려 악수였다.
흑마법사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마수들을 항시 대동 중인 데카드는 카키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거기 있군.”
손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깃털들이 후드득하고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키는 고들링의 유연함을 이용해서 관절을 꺾어대며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그러나 점점 밀리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준비는 다 됐어!’
연막 속에서 바닥을 굴러가며 놈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완성한 이 마법진.
고들링의 비전 가루가 있어야만 시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마법이다.
‘흑마법사가 되면서 이 비전을 더욱 개량시켰지.’
이걸 맞고 살아난 생명체는 본 적이 없다.
항상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다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꼴을 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마수왕님! 저 조그만 놈! 무슨 짓 한다!]
[위험한 느낌입니다! 지금 당장 몸을 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안개 속에서 놈이 마법진을……!]
마법진이 발동하기 직전 마수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데카드의 안에서 경종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베놈 쇼크.”
마법진에서 파지직하고 노란 전류가 일어나더니 하얀 안개가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색은 검은색.
천천히 바뀌어 가는 연막의 색깔은 닿는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제가 날려버리겠습니다.]
짹짹이가 날개를 펼쳐 후욱 하고 강풍을 쏘아 보내 봤지만 무의미.
검은 독 안개는 바람에 밀려나지 않았다.
“발도 묶어 버리는 건가.”
쉽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이 안개에선 몸이 바깥에서보다 훨씬 느려졌다.
그래도 짹짹이가 날개를 펼쳐 움직이자 점점 하얀 안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소용없다! 이 하얀 안개의 전진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어!”
이동 속도를 늦추는 하얀 안개 또한 데카드처럼 움직이고 있다.
꾸물꾸물 거리며 계곡 전역을 뒤덮어간 안개는 어느새 부원들이 있는 곳까지 왔다.
“이, 이게 뭐지?”
“일단 닿지 마! 모두 물러서!”
엘리스가 연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안개에 부원들을 뒤로 물리고 그 안에 있을 데카드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데카드…… 정말 제가 안 가도 되는 거겠죠?”
데카드가 점점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검은 안개의 전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짹짹아. 지금 속도로 움직이면 부원들이 있는 곳까진 언제 도착하지?’
[검은 안개에 따라잡히지 않는다면 10분입니다.]
‘겁나 느리네.’
데카드는 저기 산처럼 쌓여있는 눈 더미와 자신의 마나를 체크했다.
오리지널을 쓰기에는 살짝 부족한 마나다.
[마수왕님! 그냥 제가 다녀올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손을 들고 나선 요르.
그는 단번에 요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잡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 지금은 너밖에 방법이 없다. 죽이진 마.’
[넵!]
요르가 데카드의 안에서 빠져나와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몸이 느려지긴 했지만, 그 정돈 육체적 완력으로 극복.
서슴없이 흰 눈에 잘 어울리는 백발의 소녀가 검은 안개로 걸어 들어갔다.
“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짙은 검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자신의 눈에 확실히 방금 인형이 보였다.
검은 머리 마법사보단 키가 작고 그 일행 중에 닮은 사람도 없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난입자.
“야.”
“어흡……!!”
그 난입자는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서서 차갑고 무정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카키는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넘어졌다.
“네가 뭔데 마수왕님을 곤경에 빠뜨려.”
“어, 어째서 무사한 거냐……!! 이 독은 코끼리 100마리를 손쉽게 죽일 정도로 강력한 맹독이거늘!!”
요르는 코웃음 치며 카키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으윽……!”
“겨우 이따위 독 가지고 맹독이라는 단어를 갖다 쓰지 마. 진짜 맹독은…… 하아…… 못 보여주겠네.”
“뭐……?”
요르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자신의 붉어진 볼을 한쪽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분이 너를 살려오랬어. 그분께 감사하도록 해.”
요르는 손날로 카키의 뒷목을 내려쳤다.
딱히 기술은 없고 힘만 담겼던지라 카키는 그 고통에 눈물이 핑 하고 돌았다.
털썩-
카키가 쓰러지고 검은 안개는 물론 하얀 안개도 걷혔다.
계곡 구석에서 아직도 바이슨들과 싸우고 있는 휴고도 기절시킨 요르는 빠르게 그의 앞으로 돌아왔다.
“마수왕님! 저 잘했죠!”
“엄청 잘했어!”
두 흑마법사에게 미리 챙겨온 봉마 수갑을 채우고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자 임무가 완료됐다.
“잘한 마수에게는 특별한 칭찬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특별한…… 칭찬?”
“네!”
데카드는 잠시 그 특별한 칭찬이 뭘까 고민하다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민 요르가 눈에 띄었다.
잠깐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씨익 하고 웃으며 요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쓰다듬어 주었다.
“자. 특별한 칭찬 끝.”
“아아! 아, 아니. 이건 이거대로 좋지만 저는 다른 걸 원했다고요!”
데카드는 낄낄 웃으며 부원들이 있는 계곡의 입구로 걸어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