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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143화 (143/208)

143 이것이 나의 도주 경로다

“도망칠 곳이…… 없다.”

카키가 건물의 벽을 홧김에 주먹으로 쿠웅 치며 머리를 기댔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차가운 벽에 머리를 식혀야 했다.

“젠장!! 우리가 언제부터 사냥당하는 입장이 된 거야!”

“조용히 해, 휴고. 지금은 살 궁리를 먼저 해야 해.”

카키는 오우거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린다면 산다는 옛 격언을 떠올렸다.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니다벨리의 지도를 꺼낸다.

바닥에 지도를 쫘악 피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 갇혀있어.”

“맞아.”

카키는 손가락으로 니다벨리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육로 혹은 지붕을 넘나드는 방법이 있는데…….”

“둘 다 막혔지.”

육로는 드워프 기사들과 벨린다가.

하늘에선 까마귀들이 진을 치고 날아다녔다.

제일 문제는 이 촘촘한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준비한 고들링의 비전을 사용하면 육로의 방어는 뚫어낼 수 있을 거야.”

“그건 안 돼.”

휴고의 말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카키는 단숨에 일축했다.

뻘쭘해진 휴고가 눈을 치켜뜨며 이 원수 같은 고들링을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잖아.”

“그래! 그 거지 같은 인간 마법사! 근데 그거 아냐? 이 포위망을 못 뚫으면 그놈보다는 드워프 손에 죽게 될 거라고!”

휴고가 벌떡 일어서며 당장에라도 싸우러 나갈 듯 비전이 담긴 시약병들을 손에 쥐었다.

발로 바닥을 쿵쿵 구르며 가는 휴고의 뒤통수에 대고 카키가 입을 열었다.

“비전은 아껴야 해.”

“아끼다 똥 된다는 말 모르냐?”

“설령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비전을 아끼고 아껴서 그 인간 마법사를 상대하는 데 써야 해.”

어제부터 계속 빌어먹을 인간 마법사 얘기만 하는 카키에 휴고는 질려버릴 것 같았다.

“……그 인간 마법사 얘기 좀 그만할 수 없냐?”

“나를 일대일로 쳐부수고, 우리의 도주 경로를 예상하고, 이렇게 궁지의 몰아넣은 놈이야. 단 한 명의 인간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다.”

“…….”

카키는 지도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내게 작전이 있어. 들어봐라.”

“후우……. 그래. 지금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하겠냐. 뭔데?”

* * *

“포위망은 어때?”

[점점 좁혀들고 있습니다.]

“좋아.”

현재까지는 아주 순조롭다.

두 고들링이 아직까지도 자취를 숨긴 채 움츠려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데카드는 포위망과 가까운 건물 지붕에서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실시간으로 진형을 조정 중이었다.

사각지대는 까마귀를 통해서 보면 되고 급조하긴 했으나 진형은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기만 할 건가?”

지금 그 고들링들은 궁지에 몰린 쥐와 같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만 이 고양이는 방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데카드가 지붕 위 난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있을 때 골목 어디선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 연기다!”

“모두 코와 입을 가려라!”

좁고 긴 골목을 덮어가는 하얀 연기에 드워프들은 당황하며 허겁지겁 코와 입을 가렸다.

그러나 벨린다는 단숨에 이 연기에 정체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그저 단순한 연막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시고 흑마법사가 빠져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십쇼!”

“아, 알겠소! 대장!”

벨린다가 단숨에 기사들을 휘어잡음으로써 더 이상 진형은 붕괴되지 않고 그 견고함을 유지해갔다.

갑자기 골목 전역에 퍼진 연막.

그 자욱함에 옆에 있는 동료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보이긴 하냐?”

“네 못생긴 얼굴도 안 보이는데 뭐가 보이겠냐.”

“쉿.”

벨린다가 검지를 입술에 올리며 주변의 소음을 통제시켰다.

시각이 막힌 지금 믿을 건 청각뿐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들링 흑마법사의 소리를 들을 순 없었다.

‘이럴 때 아스카가 있었더라면.’

아스카는 거의 모든 속성에 능통했기에 이런 안개쯤은 후욱 하고 날려 보냈을 거다.

조금씩 운무가 걷히고 점점 시야도 밝아졌다.

“어! 저기 흑마법사다!”

한 드워프가 고들링의 로브 자락을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뭣?! 어디!”

“저기 골목을 방금 지나갔습니다!”

“가자!”

드워프 기사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자 벨린다는 당황하며 그들을 멈춰 세우려 했다.

“여러분! 아직 움직여선 안 됩니다! 저희의 임무는 포위망을 유지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대장! 지금 눈앞에 저놈들이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오시오? 난 잡으러 가야겠소!”

“나도!”

“빨리 뛰어라!”

드워프 기사들은 그렇게 고들링 흑마법사를 쫓아 달려가고 벨린다만 이도 저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망설였다.

기사들을 따라 자신도 흑마법사를 잡으러 가야 하나?

아니면 부장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때 하늘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왔다.

“부장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까마귀가 발톱으로 슥슥 땅을 긁어가며 전달한 데카드의 메시지.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 지금 짹짹이가 움직이기 시작한 놈을 추적 중이고 다른 한 놈은 아스카의 소나에 걸렸어. 아무래도 양동 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모양이야.-한쪽이 시선을 끌면 다른 한쪽이 성대하게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나 보지만 아스카가 중앙을 꽉 잡고 있었다.

그녀는 소나에 흑마법사가 잡히자마자 정보를 전달.

데카드는 아까 그 연막과 일부러 흔적을 보인 흑마법사가 단순한 시선 끌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기사들에겐 지금 엘리스와 고드윈이 따라붙었어. 벨린다는 아스카의 소나에 잡힌 흑마법사를 쫓아줘.-

“알겠습니다.”

데카드의 명령을 들으니 머리도 훨씬 가벼워지고 목표도 확실해졌다.

벨린다는 아스카의 소나에 감지된 흑마법사에게 달려갔다.

“역시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야.”

지붕 위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던 데카드는 턱에 손을 괴며 재밌다는 듯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대로 잡히나 했더니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할 줄이야.

[주인님. 아스카가 감지한 흑마법사와 제가 쫓고 있는 흑마법사가 점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니다벨리의 얼음 계곡입니다.]

얼음 계곡은 말 그대로 설산의 얼음과 눈이 뒤덮인 계곡이다.

높게 쌓인 눈 더미와 매달린 고드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절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두 고들링이 경치를 구경하러 계곡에 가는 것은 아닐 터.

필시 무언가 속셈이 있을 것이다.

데카드는 그게 뭘까 하고 계속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 설마!”

그러다 퍼뜩 떠오른 아주 아주 위험한 생각.

“설마…… 그렇다면 진짜 큰일인데.”

자신의 생각이 정말 맞다면 까딱하다간 모두 죽을 수 있다.

데카드는 생각의 정리를 마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짹짹아. 지금 당장 엘리스와 고드윈에게 기사들을 멈추라고 전달해줘.”

[만약 그들이 멈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합니까?]

“강제로라도 멈추게 해.”

지금부턴 드워프들이 낄 수준의 싸움이 아니다.

무의미한 희생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은 법.

[알겠습니다.]

짹짹이의 까마귀가 다시 한번 바쁘게 날아가고, 데카드는 지금쯤 흑마법사를 쫓고 있을 벨린다와 합류하기로 했다.

* * *

“멈춰라!”

“에잇! 네년 같으면 멈추겠냐!”

많이 좁혀진 거리 차이에 카키는 품속에서 독가스탄을 꺼내 휙휙 던져댔다.

펑-! 펑-!

조금이라도 들이마신다면 단숨에 절명할 수 있는 극독.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데카드에게서 받아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 방독면……!”

“이 정도에 놀라면 안 될 텐데.”

방독면을 쓴 벨린다는 독가스 안에서도 자유롭게 호흡을 유지했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헤엄칠 때마다 급속도로 쌓여가는 전류.

지금의 일격으로 놈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다.

“어디 맞힐 수 있다면 맞혀봐라!”

카키는 고들링의 민첩성과 기동력을 십분 활용.

도로뿐만이 아닌 건물 사이사이를 잡아 넘기도 하고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놈을 잡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성공시킨다.’

벨린다가 다리에 힘을 집중시키며 단숨에 폭발시켰다.

후욱-!

잠시간이지만 공중에 떠오른 몸.

눈앞에 있는 저 약삭빠른 고들링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다.

“벼락의 갈기.”

검극으로 집중된 전류가 밝은 빛을 내뿜더니 한줄기 번개가 되어 쏘아져 나갔다.

콰르르르릉-!!!

음속보다 빠르게 쏘아져 나간 천둥번개에 카키의 동물적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몸을 틀어야 한다……!!’

카키는 공중에서 몸을 짜내듯 비틀어 몸을 꾸깃꾸깃 접어버렸다.

아주 종이 한 장의 차이로 카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번개.

“크아악……!!”

원래의 위력에 비하면 반딧불같이 작은 충격이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겨우 정신을 차린 카키는 양발을 휘젓듯이 움직이며 열심히 도망쳤다.

“젠장……! 크윽…….”

아직까지 벼락의 갈기를 쓰기에는 몸이 받쳐주지 못했다.

벨린다는 부작용으로 움직일 수 없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어봤지만 그래 봤자 반동만 더 커졌다.

멀어져만 가는 카키의 뒷모습을 보며 어금니가 부서지라 깨물었다.

“나는 아직 너무나 미숙하구나…….”

“업어줄까?”

쓰러져서 눈을 감고 있는 벨린다의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일어설 수 있지? 지금 우리가 좀 급하거든.”

데카드는 그녀의 이마에 검지를 올리고 자신의 마나를 화악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마나가 활발히 벨린다의 마나 회로를 돌아다니자 벨린다의 활력이 돋아났다.

“가, 감사합니다.”

“인사받기는 아직 일러. 아직 그 두 놈이 살아있다고.”

데카드는 벨린다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지금 모든 부원들이 얼음 계곡에 모이고 있어.”

“얼음 계곡에는 왜……?”

“그곳이 마지막 결전지가 될 거거든.”

데카드와 벨린다가 얼음 계곡으로 출발했을 때 엘리스와 고드윈은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드워프 기사들을 거의 다 기절시켰다.

“후우……. 가면 위험하다니까 그러네?”

“내 임무는 흑마법사를 죽이는 것이다! 그걸 위해선 목숨도 아깝지 않다!”

“미안해요.”

엘리스가 단검을 역수로 쥐며 드워프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으억…….”

단말마와 함께 쓰러진 마지막 드워프 기사.

“이제 얼음 계곡으로 움직이죠.”

“언니! 고드윈!”

“아스카?”

얼음 계곡으로 가고 있던 카론과 아스카는 밑에 있던 엘리스와 고드윈하고 마주쳤다.

“이제 그 흑마법사만 잡으면 되는 거죠!”

“맞아.”

“드디어 그 면상을 부숴줄 수 있겠군.”

부원들 모두 전의를 뜨겁게 불태우며 마지막 전장이 될 얼음 계곡으로 이동했다.

뒤에 뭐가 쫓아오던 일단 냅다 달리고 본 휴고와 카키가 결국 살아서 얼음 계곡에 도착했다.

“휴고……!”

“카키!”

그 반가움에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고 싶었으나 아직 산 게 아니었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신뢰와 두려움이 느껴진다.

“빨리 함정들 깔아놔.”

“하고 있는 중이야!”

마법부의 마법사들이 오기 전에 얼른 함정을 최대한 많이 깔아놔야 살 확률이 높아진다.

둘은 방금 전까지 아주 뼈저리게 겪은 마법사들의 강함에 몸을 떨었다.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강함을 지녔다.

일대일로는 자신들이 더 유리할지 모르나 지금은 수적 열세.

“온다.”

“나도 알아.”

얼음 계곡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하나둘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중앙에서 당당히 선두로 계곡에 들어오는 검은 머리 마법사.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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