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사인은 눈사태
“야, 이……!!”
“아악!! 나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아스카와 고드윈은 미친 듯이 눈 비탈을 달리며 뒤에서 밀어닥치는 눈사태를 피해 도망쳤다.
쿠구구구궁-!
마치 하얀 구름이 산을 쓸어주듯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가까이 있는 이에겐 자연재해다.
둘은 눈 비탈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는 일행에게 소리쳤다.
“부장님!!”
“피해야 해요!!”
“어?”
“……미친.”
벨린다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카론은 말없이 고드윈과 아스카의 야크를 끌고 왔다.
잠시 할 말을 잃게 하는 눈사태에 데카드는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주인님. 빨리 피하셔야 할 듯합니다.]
‘말 안 해도 알아!’
데카드는 야크에 올라타 뿔을 잡아끌었다.
푸르르-
스노우 야크는 원래 겁이 많은 생물이다.
본래라면 눈사태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는 짓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빨리 가자! 달려!”
그러나 데카드의 뛰어난 지배력과 통솔력이 유전자에 각인된 태생적 두려움마저 뒤바꿔 놓았다.
“카론! 야크에게서 손 떼!”
“하지만 부장님!”
“너희들은 빨리 뒤로 빠져!”
“데카드!!”
카론이 얼떨결에 넘겨준 야크의 뿔들을 데카드가 다시 잡고 저 멀리 도망쳐오는 고드윈과 아스카에게로 달려갔다.
이제 체력도 떨어져 가는 아스카의 손을 고드윈이 잡아 끌어가며 이제는 거의 굴러 오듯 뛰어왔다.
두 다리가 무엇을 밟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제는 발에 감각마저 사라졌다.
“으하악……! 고드윈 나는 틀렸나 봐……!!”
“미친 소리 그만하고 빨리 뛰기나 해!”
“내가 죽으면 묘비 석에는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적어줘…!!”
“싸우다 죽기는 개뿔!!”
싸우다 죽기는커녕 본인의 메아리로 생긴 눈사태에 깔려서 압사하게 생겼다.
파도처럼 들이쳐 오는 눈사태의 눈이 목덜미에 닿는 것 같았다.
“으아아……! 이제는 정말 틀렸……!”
“틀리긴 뭐가 틀려!”
아래에서 쏜살같이 야크를 몰고 온 데카드가 고드윈과 아스카를 순식간에 잡아챘다.
옆에 있는 야크에 둘을 앉혔을 때는 눈사태가 코앞까지 와 있었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
데카드는 마나 룸을 전부 개방했다.
“모두 엎드려!!”
[불타는 심장은 꺼지지 않는다!]
고드윈의 건틀릿이 한쪽 팔을 감싸 안았다.
건틀릿은 스펀지처럼 데카드의 마나를 쭈욱 빨아먹고는 강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고오른 오리지널-화산 대분화]
콰아아아아앙-!!!
눈사태의 폭음은 간단히 집어삼킬 만큼 산맥을 진동시키는 굉음이 건틀릿에서 뻗어나 왔다.
그와 함께 튀어나온 거대한 화염.
화산의 분출구에서 용암이 폭발하듯 거대한 에너지가 눈사태와 충돌했다.
“으으윽……. 우리 죽은 건가……?”
“지옥이라기엔 너무 하얀데……?”
“그럼 천국?”
역시 자신은 착하게 살았으니 천국에 오는 게 맞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순간 데카드의 딱 밤이 날아왔다.
“어윽!”
“천국 아니거든? 아직 안 죽었어.”
야크들은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는 것이 고작.
푸스스스-
눈사태가 갑자기 거대한 열과 만나면서 생긴 눈안개가 강한 바람에 빠르게 걷혔다.
그러자 밑에 땅이 보일 정도로 심하게 파인 바닥, 건틀릿의 힘에 엉망이 된 산맥이 드러났다.
“어! 저기 부장님이 보입니다!”
눈사태를 피해 아래로 내려간 일행은 셋이 무사한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자!”
야크들은 겨우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일행과 합류했다.
엘리스는 야크에서 내려 허겁지겁 데카드에게 달려왔다.
“데카드!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거 아니에요?”
[마수왕님은 무사하다!]
[…….]
[설령 위험하더라도 우리가 현신하면 되니 괜찮았어.]
[티이라! 심장 쫄렸다!]
데카드는 싱긋 웃으며 야크에서 내렸다.
“괜찮아. 정말 다친 데 없어.”
“흐윽……!! 흑……! 저는 데카드가 죽는 줄 알았어요……!”
엘리스는 눈물범벅인 눈으로 흙이 이곳저곳에 묻어 더러운 그의 옷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눈물로 조금 더 더러워진 옷과 같이 더러워진 엘리스의 얼굴.
“그만 울어. 못생겨져.”
“하하핫…….”
엘리스는 울다가 데카드의 말을 듣고 조금씩 힘없게 웃었다.
그녀의 씰룩이는 입꼬리를 확인한 데카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모, 모르는데…….”
이걸 모른다고?
데카드는 엘리스가 아직 한참 배울 것이 많다고 새삼 느꼈다.
굳이 가르쳐줄 필요는 없으니 데카드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 다친 데 없는 거죠?”
“없다니까 그러네.”
그는 더러워진 엘리스의 뒷머리를 스윽스윽 쓸어주며 눈을 털어주었다.
눈은 차가웠으나 데카드의 손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조금만 더 즐기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결국 벨린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엘리스도 마른 헛기침을 흠흠 내뱉으며 데카드와 마지못해 떨어졌다.
“그럼 다시 출발한다!”
일행은 다시 야크에 올라타고 드워프의 마을을 향해 이동했다.
아스카는 이제야 차츰 돌아온 정신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데카드 쪽으로 야크를 움직였다.
“저기……. 부장님.”
“응? 왜 아스카.”
“죄송해요……. 제 경솔한 행동으로 부원들을 위험에 빠트렸어요…….”
데카드는 아스카의 사과를 받고도 다른 말이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아스카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뒤로 돌아가려는 순간.
“아스카.”
“네……?”
데카드는 여전히 시선은 앞으로 고정한 채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아. 그리고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너를 원망하지 않아.”
“눈사태 가지고 화를 내기엔 네가 나한테 저지른 게 너무 많지.”
“너 때문에 누군가 눈사태에 죽었다면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괜찮아 아스카. 너무 마음 쓰지 마.”
여기서 아스카와 제일 친한 벨린다는 아스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 엘리스.”
만약 아스카가 일으킨 눈사태에 데카드가 죽었다면 엘리스는 단검을 뽑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유혈 사태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야크 덕분에 키른에서 드워프 마을까지 절반이나 건너왔다.
데카드는 적당한 넓이에 눈밭에서 야크를 멈춰 세웠다.
“야크. 주변에 눈을 치우고 벽을 만들어줘.”
푸르르-!
야크들이 두꺼운 다리로 발을 쿵쿵 굴러대자 눈들이 가장자리로 옮겨갔다.
옮겨간 눈들은 곧 벽을 쌓으며 바람을 막아주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괜찮은 크기의 이글루가 완성.
“처음 만들어봤는데 괜찮네.”
사진에서만 보고 실제로 만들어보는 건 처음인데 꽤나 잘 지어졌다.
이글루 안은 세찬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 은근 따뜻하고 아늑했다.
“수고했어.”
야크들은 역소환하고 데카드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간이침대를 꺼냈다.
한 번 사고 참 유용하게 쓰는 이 간이침대는 사막에서나 숲속에서나 데카드를 따뜻하게 재워주었다.
오늘 침대가 활약할 곳은 설산의 이글루 안.
“바로 주무실 건가요?”
“글쎄.”
딱히 이글루 안에서 할 것도 없고 내일 아침 눈이 그치면 이동해야 하니 일찍 잠에 들어야 한다.
“저녁은 안 드세요?”
“이것도 글쎄.”
지금은 딱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 안에 누워서 가만히 멍만 때리고 싶었다.
엘리스는 미동도 안 하는 그는 내버려 두기로 하고 일행 쪽으로 움직였다.
“백염으로 타오르는 모닥불은 뭔가 신기하네요.”
“그렇지?”
이번 모닥불은 고오른이 피워 올렸다.
하얀 눈 위에서 힘차게 타오르는 백염은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뭐가 타오르고 있는지도 잘 구별이 되질 않았다.
그 위에서 순조롭게 익혀지고 있는 즉석 캔.
“언니는 무슨 맛 먹을래?”
“나는 아무거나.”
“부장님은 안 드신대요?”
“잘 모르겠어.”
데카드는 아까부터 글쎄라는 말만 반복하는 중이다.
침대와 혼연일체가 된 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내일까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캔 요리를 익히고 있을 때 카론과 벨린다가 이글루의 입구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왔어?”
“경비 마법을 설치하고 왔다.”
이곳은 안전한 도시나 마을이 아니다.
밤에는 야생 몬스터가 나돌아 다니고 흑마법사도 있을지 모르는 엄연한 적지.
절대 안심해선 안 된다.
그렇게 일행은 캔 요리를 먹어치우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흐음…….”
정말 의외로 가장 오랫동안 자지 않고 깨있는 데카드.
모두가 깊은 잠이 들었고 이글루 밖에서 휭휭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시끄러웠다.
[잠이 안 오십니까?]
‘응.’
짹짹이를 제외한 마수들은 전부 자고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데카드의 눈이 아직까지 말똥말똥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짹짹이는 혹시 데카드가 흑마법사의 저주에 걸린 게 아닐까 싶어 몸을 마나로 싸악 훑어보았다.
그것을 느낀 데카드가 지레 찔려 조용히 말했다.
‘저주 안 걸렸어.’
[크흠……. 혹시나 했습니다.]
이어진 침묵.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다시금 귀에 익었다.
[그보다 이제는 마수들의 오리지널 스킬들도 사용이 가능하신가 보군요.]
‘비록 가지고 있는 마나를 거의 다 털어 넣어야 가능하지만.’
마수들의 오리지널 스킬은 인간 마법사의 오리지널처럼 매우 특별하다.
데카드가 눈사태를 상대로 쓴 고오른의 화산 대분화.
‘오늘 것도 살짝 아슬아슬했다고.’
야크들을 소환하고 조종하느라 마나를 꾸준하게 소비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오리지널을 쓰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그 정도 마나가 딱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6서클에 오르시면 조금 더 자유로워지시겠죠.]
‘슬슬 올라가야지.’
적들은 점점 성장하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주춤거리면 훗날 다가올 위기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없다.
데카드는 심장을 감은 다섯 개의 고리를 느꼈다.
인간계에선 어딜 가도 꽤나 대접받을 수 있는 서클이지만 전성기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다.
[주인님.]
‘왜?’
[야생 몬스터들이 접근합니다.]
경비 마법보다 빠르게.
주변에 까마귀를 깔아놓은 짹짹이가 몬스터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잠도 안 오는데 내가 나가야겠다.’
굳이 경비 마법으로 잘 자는 애들을 깨우고 싶진 않다.
데카드는 몬스터들이 경비 마법에 다가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휘이이이잉-
뺨을 세게 갈기는 것 같은 눈보라가 쉼 없이 몰아쳤다.
다행히 레드 리자드가 열일을 하며 그의 몸을 계속 덥혀주었다.
“몬스터들의 수는 어느 정도야?”
[눈보라가 거세서 잘 확인은 안 되지만 대략 열 마리입니다.]
“열 마리.”
데카드는 숫자를 한 번 중얼거리곤 손이 얼지 않도록 계속 움직였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회복한 마나가 손바닥에 점점 모여들었다.
“오늘은 둘이서 하자, 짹짹아.”
[영광입니다.]
검은 깃털 코트가 펄럭이며 날카로운 깃들이 데카드의 손에 들어왔다.
꾸어어어-!
몬스터의 정체는 주로 이런 설산에서 살아가는 예티.
하얀 털에 커다란 덩치로 이런 추위에서 무리 없이 살아가며 강력한 완력을 가지고 있다.
가죽도 두껍기에 웬만한 절삭력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이 깃은…….
슈우욱-! 꾸어억-!!
데카드의 손에서 튀어 나간 깃이 예티의 목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예티.
주변에 있던 예티 동료들이 깜짝 놀라며 동요했다.
“도망치려면 지금뿐이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