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132화 (132/208)

132 복수전

“상냥하시군요.”

“내가?”

꽤나 긴 인생을 살았지만 상냥하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본다.

트리스는 뒤에 있던 감옥을 흘깃 쳐다보곤 다시 말을 이었다.

“선배 성격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싸울 것 같았습니다.”

“저도요. 그래서 살짝 자리를 비켜 서 있었는데.”

데카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바깥이라면 그렇게 하겠는데 여기는 마을이잖아. 걔하고 싸우면 파편이 엄청 튈 텐데 피해는 주면 안 되지.”

“역시! 귀인이세요!”

키이라는 데카드의 마음씨에 감동을 하고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럼 저는 다시 근무하러 가보겠습니다.”

“올렌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축제를 즐기러 오세요.”

“알겠습니다.”

올렌은 그렇게 경비대로 가고 일행은 키이라가 마련해 준 거처로 이동했다.

축제의 즐거움에 몸을 맡기다 보니 벌써 시간은 새벽.

잠이 많은 데카드와 마수들은 벌써 눈이 끔뻑끔뻑, 가만히만 있어도 감겼다.

“그럼 여러분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키이라도 좋은 밤 보내요!”

“축제는 재밌었습니다.”

“헤헷. 감사합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이곳의 주인인 할렘 부부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안이 깜깜하고 조용했다.

방은 딱 세 개가 남아 인당 한 개로 하면 충분.

그중 데카드는 마수들까지 있으니 제일 큰 방으로 갔다.

“얘들아. 여기서 자.”

“흐으응…… 네….”

“졸리다…….”

잠에 빠져서 거의 기어 나오듯 바깥으로 나온 마수들은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짹짹이도 다시 인간형으로 돌아와 구석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그럼 나 이빨 닦고 올게.”

“다녀오십쇼.”

주머니에서 양치 도구를 꺼낸 데카드는 화장실을 찾아 어두운 집 안을 돌아다녔다.

아까 방은 봐두었는데 화장실 위치를 까먹어 버렸다.

데카드가 더듬더듬 벽을 매만지며 복도를 걷는 사이 딱딱한 벽 대신 물렁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커다란 슬라임 같은 촉감에 누르면 끝도 없이 손가락이 들어간다.

“으응?”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아 정말 한 치 앞도 안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지 하고 계속 눌러 보았지만, 딱히 감이 잡히는 건 없었다.

엘프 마을의 가정 도구인가 하고 넘어가려는 찰나 불이 화악 켜졌다.

“선배. 화장실은 이쪽입니다.”

“어? 그러네.”

데카드는 불이 켜진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치약을 쭈욱 짰다.

트리스도 옆에서 치약을 짜고 이빨을 닦으려다가 잠깐 데카드를 쳐다보았다.

“아까 그 손은 뭐였습니까?”

“뭔 손?”

“……아닙니다.”

트리스는 괜히 골반의 아래쪽을 손으로 쓸며 얼굴을 붉혔다.

“다들 여기 계셨네요?”

뒤늦게 온 엘리스가 자신의 칫솔을 들고 화장실에 합류했다.

치카치카-

양치하는 소리가 화장실을 울리고 제일 먼저 온 트리스순으로 데카드, 엘리스가 세수를 마치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선 드물게 짹짹이가 의자에 앉아 턱을 괴며 졸고 있었다.

“귀한 장면이네.”

거의 매일 짹짹이는 데카드가 잠들기 전에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이렇게 먼저 잠을 자는 짹짹이는 흔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쌔근쌔근 잠을 자는 짹짹이를 바라본 후 데카드는 남는 이불들을 마수들에게 덮어 주었다.

“어. 내게 없네.”

그렇게 다섯 마리의 마수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다 보니 정작 자신이 쓸 이불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냥 자지, 뭐.”

딱히 이런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라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침대 위에 누웠다.

침대도 그냥 침대가 아닌 커다란 나뭇잎을 엮어 마치 커다란 해먹 같았다.

이곳에 누우면 맑은 숲의 향기가 솔솔 올라와 드넓은 들판 위에 드러누운 느낌이다.

“커어어…….”

아니다 다를까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데카드는 잠이 들었고 대신 짹짹이가 퍼뜩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군.’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조금 오래 잔 것 같다.

짹짹이는 턱을 괸 손을 내리다가 자신을 덮은 이불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자는 마수들도 보였다.

‘그럼 주인님은…….’

마지막으로 침대에 있을 데카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며 곤히 자고 있는 데카드.

짹짹이는 자신을 덮고 있던 이불을 들고 천천히 침대로 갔다.

“저희보다 주인님을 생각하십쇼. 당신이 없다면 저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데카드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자 그는 아까보다 편안한 미소로 잠을 잤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일행 중에선 제일 먼저 일어난 트리스가 거실로 나오자 서로 사이좋게 요리하는 할렘 부부가 보였다.

서로의 그릇에 자신이 정성껏 만드는 음식을 채워주는 모습은 노년임에도 아직 사랑이 식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손님 분들의 것도 만들어 두었으니 원하실 때 꺼내 드십쇼.”

“아, 네. 감사합니다.”

할렘 부부는 다시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고 엘리스는 노부부가 가리킨 음식의 가리개를 열어보았다.

“요리 솜씨가 엄청 좋으시네.”

가리개를 열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에 자신의 침샘이 평소보다 열일하는 게 느껴졌다.

“일찍 일어났군요.”

“아, 트리스.”

두 번째로 일어난 트리스.

그는 시르가에서의 태양을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커피 가루를 꺼냈다.

즉석에서 커피를 내려먹을 수 있는 기계가 있긴 하지만 그건 불편하고 시간도 꽤 걸린다.

“커피 드실 겁니까?”

“저는 사양할게요.”

트리스는 조그마한 물의 구체를 만들고 그걸 뜨겁게 덥혔다.

구체는 곧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고 그것을 컵에 가루와 함께 담아주면 커피가 완성.

“하아…… 역시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진리입니다.”

트리스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반찬 삼아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렌달이라는 학생은 마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나요?”

“그 삼인조는…….”

트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이들에 대한 징계를 생각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개인적인 감정이 너무 들어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교내 봉사를 한 달 동안 하게 될 겁니다.”

“……너무 쉬운 것 아닌가요?”

트리스는 씨익 웃으며 남은 커피를 쭈욱 마셨다.

“마탑의 교내 봉사입니다. 말이 교내 봉사지 사실 막노동과 다름이 없지요.”

마탑의 학생 징계 중에서도 교내 봉사는 특히 그 평이 악랄하다.

말이 9층이지 세세하게 따지자면 99층 높이의 건물을 청소해야 하고 실험이나 굳은 잡일이 있으면 그것도 도맡아 해야 한다.

아마 한 달 동안 뼈가 빠져라 움직여야 할 것이다.

“데카드도 교내 봉사를 했던 적이 있나요?”

“선배는……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마탑을 다니지는 않아서.”

“나중에 물어봐야겠네요. 데카드는 어떤 학창 시절을 보냈을까요?”

엘리스는 갑자기 데카드의 학창 시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화두에 트리스도 커피를 먹던 컵을 씻으며 피식 웃었다.

“아마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하하! 정말 그럴 것 같아요.”

두 여자가 깔깔 웃고 있을 때 화두의 주인공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원래 더 자려다가 배가 고파서 일어난 듯 그는 주린 배를 꼬옥 잡고 있었다.

“배고픈데.”

“이거 드세요!”

엘리스는 할렘 부부가 준비해 놓은 음식을 가지고 쪼르르 식탁에 세팅했다.

“이거 먹고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시게요?”

“그 렌달이란 애하고 놀러 가야지.”

그는 샐러드를 양껏 입에 넣으며 와구와구 씹어 삼켰다.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야. 나만 잠깐 갔다 올 거야.”

이번에는 짹짹이도 데리고 가지 않고 오직, 데카드만이 움직일 것이다.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짹짹이가 극성이긴 했으나 겨우 떼어내었다.

이건 상대를 위한 예의다.

상대는 오직 자신의 실력으로 부딪힐 텐데 혼자만 너무 뛰어난 조건으로 상대할 순 없다.

“다녀올게.”

“다녀오십쇼.”

데카드는 짹짹이가 없어 조금 허전한 어깨를 쓸며 문을 열었다.

마을 바깥에선 엘프들이 하루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여기 있습니다. 귀인이시여. 결투는 서쪽 공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그쪽에는 주민들이 지나다니지 않죠.”

“고마워.”

올렌에게 열쇠를 받은 데카드는 그대로 감옥에 향했다.

감옥 안에는 잎들을 매트리스처럼 모아 자고 있는 무라타와 카슨, 그리고 복수심에 잠도 안 자고 데카드를 기다린 렌달이 있었다.

“빨리 싸우자!!”

“알았다, 알았어. 대신 여기선 안 돼. 정해진 장소에 가기까진 날뛰지 말아라. 약속하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어.”

렌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아.”

데카드가 감옥의 문을 열고 아직 잠들어 있는 두 명을 제외한 렌달만이 그곳에서 나왔다.

올렌이 일러준 공터까지 가는 사이 뜨끈한 살기가 뒤통수를 자극했다.

“한 번 진 것 가지고 그렇게 화내는 거야?”

“네놈이 치졸한 수를 썼다고는 하나 용병 따위에게 졌다는 건 가문의 수치다!”

“그런가?”

데카드는 귀족이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니 수치니 그런 것은 잘 모른다.

원체 져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데카드는 지더라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편이었다.

패배에 집착해 봤자 바뀌는 건 없고 더욱더 정진해서 자신을 이긴 자를 뛰어넘을 생각을 해야 한다.

“여기야.”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공터에 도착하고 렌달과 데카드는 마탑에서의 그때처럼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명은 다른 이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다른 한 명은 그냥 빨리 끝내고 쉬고 싶었다.

“이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지면 시작이다.”

데카드가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줍고 그대로 허공에 내던졌다.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가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두 마법사는 이미 마법을 사출할 준비를 끝냈다.

툭-

“웨이브 블라섬!”

“소환!”

렌달의 양손에서 꿀렁꿀렁 물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그것은 곧 커다란 파도가 되어 데카드를 휩쓸어 버릴 듯 달려왔다.

물론 데카드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빠르게 이루어진 소환.

껑-! 껑-!

씨 엘리펀트 두 마리가 마법진에서 인간계로 소환됐다.

얼음 속성의 씨 엘리펀트는 날카로운 얼음 송곳니를 세우고 짧은 양 지느러미를 파닥파닥 휘둘렀다.

“파도를 막아!”

그 모습은 좀 웃겼지만, 지느러미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주변의 공기 온도가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의 어는점인 영하까지 순식간에 도달하자 파도는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공격해!”

방어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이쪽에서 공격할 차례.

한 마리는 계속 방어에 전념하고 나머지 한 마리가 공격에 들어갔다.

쩌저저저적-

1M가 넘는 얼음 송곳들이 허공에서 수분이 얼려져 만들어졌다.

“흥! 그런 얕은수가 통할 것 같나!”

렌달은 코웃음 치며 아까 발현한 웨이브 블라섬의 파도를 이용해 거대한 물의 장벽을 만들었다.

괜히 마탑 3학년의 최강이라고 칭송받는 재능이 아니다.

그러나 저쪽은 역대 3학년들 중 전투력으로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자.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콰아아아앙-!

씨 엘리펀트의 얼음 송곳들이 잠시 물의 장벽을 만나 주춤했으나 조금씩 조금씩 뚫고 지나갔다.

“저리 꺼져라!”

자신의 방벽이 뚫리고 있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은 렌달은 손을 한 번 휘저어 장벽의 흐름을 바꾸고 궤도를 틀었다.

송곳들은 애꿎은 바닥을 공격했고 순식간에 공터는 엉망이 되며 부서졌다.

“이거 오늘 이곳은 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르겠군.”

“네놈도 같이 사라질 것이다.”

둘의 마법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충돌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