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시르가의 침입자들
데카드는 그래도 된다면 짹짹이의 날개를 펴고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었다.
아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좋았다.
“저랑 춤춰 주세요!”
“저랑 춰주세요!”
엘프들의 춤 신청에 둘러싸여 혼이 다 나갈 지경이다.
한 명의 신청이라도 받아주지 않으면 왠지 이 인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명령만 내리세요! 그냥 제가 한 입에……!]
[그건 안 된다. 요르.]
‘그냥 비켜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끈질기냐?’
데카드가 그냥 아무 엘프의 손을 잡으려는 그때, 누군가 바람처럼 튀어나와 그 손을 잡았다.
“저와 춤…… 추실래요?”
“엘리스?”
춤에 어울리는 드레스 차림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춤에 능통하지도 않았으나 엘리스는 이 손을 놓지 않았다.
데카드는 구세주를 만난 느낌으로 환하게 웃으며 승낙했다.
“물론이지.”
엘리스가 자신 쪽으로 데카드를 끌어왔고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끌려주었다.
두 명이 움직이자 데카드에게 춤 신청을 하러 왔던 엘프들은 좌우로 갈라졌다.
“뭐야, 저 인간은!”
몇몇은 시기와 질투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둘이 아니었다.
엘리스와 데카드.
두 남녀는 꽃밭 아래에서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읍…….”
“죄, 죄송해요……!”
가끔가다 스텝이 꼬여 데카드의 발을 밟긴 했어도 꽤나 둘은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었다.
“춤은 배운 거야? 생각보다 잘하네.”
“잠입에 필요해서 옛날에 잠깐 배웠어요. 데카드는요?”
데카드도 엘리스와 비슷하다.
“집행관 때 잠깐 사교계에 들어가야 했던 적이 있는데 선배들이 춤 좀 배우라고 성을 내서 어쩔 수 없이 배웠지.”
“그래서 다른 여자하고 춤을 추셨나요?”
“아니? 배우기만 하고 써먹진 못했어.”
엘리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렇다면 자신이 데카드의 첫 춤 상대라는 뜻이니까.
어느새 춤을 추는 엘프들 사이에 중앙으로 온 둘.
춤을 구경하는 엘프들 대다수가 인간인 둘을 보고 있었다.
“꽤나 잘 추는데?”
“저건 인간의 춤이로군.”
“크흠…… 춤 신청을 하고 싶은데 받아줄까?”
엘리스의 시원하고 간결한 움직임은 절도 있었고 그 눈빛은 엘프 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10분간 이어지던 노래가 끝이 나고 데카드와 엘리스의 춤도 그렇게 끝이 났다.
“어째 아까 라아와 한 시합보다 이게 더 힘든 것 같아.”
“저도요. 후우…….”
둘 모두 거친 숨을 내쉬며 인파 속으로 섞여들어 갔다.
“아주 재밌어 보이더군요. 두 분.”
혼자 뚱하게 둘을 지켜보던 트리스는 뾰로통한 얼굴로 다가왔다.
“엘리스. 제가 정신 팔린 틈에 그런 반칙을 하다니. 룰 위반입니다.”
“루, 룰 위반이라뇨! 그리고 애초에 룰이 있었나요?”
트리스는 대답하지 않고 데카드의 손을 턱 붙잡았다.
“저하고도 한 곡 하시죠, 선배.”
“또? 나 힘든데.”
“벌이라고 생각하고 해주십쇼.”
음악대가 또 새로운 곡을 연주하고 트리스는 막무가내로 데카드와 함께 춤을 추러 갔다.
“하핫. 귀인이 힘들어 보이네요.”
“할레이 님 오셨어요?”
“그냥 키이라라고 부르세요. 여러분은 저희 마을의 주민이 아니시니까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으세요.”
키이라는 방금 떠온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찍어 엘리스의 입에 갖다 댔다.
엘리스는 잠깐 멈칫하다가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 입 먹었다.
“하하핫. 잘 드시네요.”
“마이어요.”
샐러드를 우물우물 씹으며 엘리스가 대답하자 키이라는 환하게 웃었다.
“맛있으시면 좀 더 챙겨 드릴까요?”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키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샐러드를 마저 먹으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할레이 님. 잠깐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재밌게 노세요!”
“네!”
키이라는 그렇게 올렌을 따라 결계를 관리하는 마법진 앞으로 움직였다.
마법진에서는 결계의 상황과 침입자를 볼 수 있고 결계의 강도를 조종할 수 있다.
“설마 침입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냥 결계를 조종해서 돌려보내면 되지 않나요?”
결계가 가진 힘 중에는 안에 들어온 이의 사고를 흔들리게 해 다시 왔던 방향 그대로 나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올렌은 고개를 저었다.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침입자가 생각보다 강한 마법사더군요. 그리고 지금 결계를 부수려고 하는 중입니다.”
“어떤 멍청이들이…….”
키이라는 드물게 화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마법진에 투영되는 결계의 침입자 세 명.
청년 정도로 보이는 셋은 자신들의 마나를 들이부어 결계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강한 마법사들이군요.”
“예. 그래서 경비대를 보내기 전에 할레이 님의 허락을 맡아야 했습니다.”
“경비대를 출동시키세요.”
“알겠습니다. 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키이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늘은 축제날이니 죽이지 않겠습니다. 제압하고 돌려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경비대들은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봉마의 힘이 담긴 무구들을 착용하고 침입자를 잡으러 나섰다.
그리고 침입자.
렌달과 무라타, 스캇은 결계를 부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야! 렌달! 이거 맞아? 우리 힘으로도 안 부서지는 거면 뭔가 중요한 걸 거라고!”
“지금은 날 따라줘! 무조건 이 결계 뒤에 그 새끼가 있어!”
“아오! 미치겠네! 진짜!”
무라타와 카슨은 곡소리를 내면서도 일단 렌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결계 뒤에 뭐가 있는지 봐야겠다.
“너! 이번 것도 아니면 진짜 마탑으로 돌아가는 거다!”
“알았으니까 힘 좀 더 써봐!”
“흐아아압!!”
셋의 마나가 짜내지면 짜내질수록 결계는 더욱더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되는데 어디선가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피이이이이-
“뭐, 뭐지?”
풀피리 소리에 잠깐 얼이 빠져 멍하니 있을 때 하늘에서 무언가 휙휙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은 양쪽이 뭉툭한 속박용 쇠사슬.
그러나 평범한 사슬이 아니다.
“으윽……!! 마법이 안 써져!”
“젠장! 방심했어!”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렌달은 어금니를 깨물며 나무 뒤에 숨어있는 인형들에 대고 소리쳤다.
큰 키의 습격자들은 곧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냈다.
“에, 엘프?”
“엘프의 마을이었다고……?”
“…….”
렌달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결계가 엘프의 마을을 보호하고 있던 거라면 이 앞으로 갔을 총장님과 그놈은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마을 안으로 들어간 건가?
엘프들이 그걸 허락해 줬다고?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 때 올렌이 다가와 허리춤에 칼을 뽑았다.
스르릉-
차가운 검 날이 렌달의 목을 위협했다.
금방이라도 그의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으나 올렌은 더 이상 검을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라.”
“자, 잠깐!”
“그렇지 않다면 죽음뿐이다.”
올렌이 더 이상 렌달의 말을 듣지 않고 떠나려는 순간 그의 발목을 잡는 한 마디가 있었다.
“데카드 아르마다!! 그놈을 만나러 왔다!”
“데카드…… 아르마다? 지금 그 이름을 말한 건가?”
“그렇다!!”
렌달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타겟을 부르짖었다.
올렌은 더 이상 이 일이 자신의 소관이 아님을 깨닫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놈들을 마을로 연행한다.”
“알겠습니다!”
엘프들이 마력 봉인 사슬에 꽁꽁 묶인 셋을 데리고 마을로 끌고 갔다.
올렌은 한숨을 쉬며 다시 키이라에게 갔다.
“할레이 님.”
“네, 올렌. 침입자는 잘 처리했나요?”
“그게…….”
올렌은 지금까지 벌어진 일의 사정을 모두 키이라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흐음…… 일단 귀인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인을 쫓은 자가 있는데 귀인도 당연히 알고 있겠죠.”
키이라와 올렌은 트리스와의 춤판이 끝나고 편하게 쉬고 있는 데카드에게 갔다.
“아니? 모르겠는데? 날 쫓는 놈이 있다고?”
“정확히는 세 명이더군요.”
세 명이나 자신을 쫓는다?
사실 누군지 모르겠다기보단 너무 많아서 누굴 고를지 모르겠다.
그동안 세력이란 세력은 전부 적으로 만들어서 이제는 어떤 놈인지 감도 안 잡힌다.
“흑마법사야?”
“아닙니다. 꽤나 젊은 마법사더군요.”
“마법사가 왜 날 쫓아왔지?”
올렌은 아까 침입자 중 한 명이 말한 이름을 말했다.
“침입자 중 한 명이 자신을 렌달 펜하우저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름을 대면 알거라면서.”
엘리스와 트리스 모두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데카드만 멀뚱멀뚱했다.
“그게 누군데?”
* * *
티이라와 올렌을 포함해서 다섯은 시르가의 감옥으로 갔다.
시르가의 감옥은 억센 나무줄기를 겹겹이 꼬아서 만들었다.
웬만한 불에도 이 감옥은 타지 않는 높은 강도를 자랑한다.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안 나는데?”
“마탑에서 전투력 측정할 때 왔던 그 3학년생이요!”
“아아…… 그으……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엘리스는 옆에서 답답해 죽으려고 하고 트리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 삼인조가 자신의 행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건가?
그렇게 많은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을 텐데 이 숲까지 잘도 찾아왔다.
‘이런 걸 보면 마탑의 미래가 밝다고 해야 할지…… 참.’
무려 마탑의 총장의 뒤를 성공적으로 밟았으니 실력 하나는 칭찬해 줄 만 했다.
그러나 걸렸으면 안 됐다.
‘선배와의 휴가를 방해한 죄는 무거워.’
트리스는 돌아가는 대로 저 셋에게 내릴 징계를 생각하며 일행과 함께 감옥에 도착했다.
일행이 감옥에 오자마자 렌달이 데카드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데카드 아르마다!! 다시 결투다! 그때는 네놈이 비겁한 수를 써서 이겼을지 모르나 지금은 다를 것이다!!”
“귀 아프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를래?”
데카드는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렌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너희들은 기억나?’
[기억난다!]
[그때 제가 날려버렸던 그 인간입니다!]
[마수왕님이 크라켄을 잡으시기 전에 싸웠던 그 학생이잖아요!]
[…….]
마수들까지 기억하고 있는 렌달이었지만 데카드에겐 그저 지나가는 행인 1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자신의 수명을 과도하게 넘어서는 시간을 계속 살다 보면 뭐든 금방금방 까먹는 법이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이 렌달이란 놈은 조금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맞네. 그때 나한테 얻어맞고 날아갔던 그놈이구나?”
“크으윽!! 오늘에야말로 그 불명예를 씻겠다! 당장 이걸 풀어라!”
날뛰는 렌달을 옆에 있든 무라타와 카슨이 뜯어말리며 그를 억지로 앉혔다.
“야야! 렌달!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해!”
“맞아! 날뛴다고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역시 마탑의 3학년생이라 그런가 적지와 다름없는 이곳에서도 침착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라타와 카슨. 점수 2점을 플러스로 주겠습니다. 상황 판단이 좋군요.”
“가, 감사합니다?”
이 와중에도 트리스는 저 셋을 평가하는 중이었다.
정말 뼛속까지 교수라는 말이 맞았다.
“일단 여기서 열이나 식혀라. 결투는 내일 해주지.”
“지금 당장 이걸 풀고 싸우자!!”
데카드는 저번에 요르에게 썼던 원거리 딱밤을 렌달의 이마에 날렸다.
“크악……!”
“최고의 상태로 싸워야 후회가 없지 않겠어? 지금의 너는 만전이 아니야.”
“…….”
아까 결계를 부수느라 힘을 대부분 소진한 건 사실이다.
렌달은 분한 마음에 어금니가 부서질 듯 이를 깨물었다.
“그럼 내일 보자!”
데카드는 친한 친구를 대하듯 살갑게 인사한 후 감옥을 벗어났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