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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129화 (129/208)

129 잊으려고 한 기억

“……당황스럽군요.”

자신은 재밌게 놀겠다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시르가에 왔는데 갑자기 엘프족을 구원할 귀인이란다.

키이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평생 엘프와는 딱히 연이 없으셨을 텐데 갑자기 이런 전설의 당사자가 되셨으니.”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그 엘프족의 위기라는 것은 뭡니까?”

키이라가 말한 전설 중에서 눈처럼 흰 마나의 소유자는 데카드라고 쳐보자.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위기는 과연 무엇일까?

“아아, 그걸 아직 말씀 안 드렸군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말을 전부 끝마치기 전에 키이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또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렇게 비밀스러운 얘기인가?’

키이라가 책상의 중앙으로 조금씩 몸을 들이밀자 나머지 셋도 말을 듣기 위해 중앙으로 얼굴을 모았다.

그렇게 키이라는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저희도 모릅니다.”

“네?”

너무 예상 밖의 답이어서 엘리스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데카드는 다시 털썩 자리에 앉았고 트리스는 눈 안에 많은 감정을 담아 키이라에게 쏘아 보냈다.

“하핫, 너무 화내지들 마십쇼. 이건 비밀을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저희도 모르는 것입니다.”

키이라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시르가 마을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 엘프.

그들은 얼굴에선 걱정일랑 찾아볼 수 없었고 지금의 삶에 충실하며 각자 맡은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이렇듯 저희는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연락하고 있는 다른 마을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위험해.”

“네……?”

데카드는 팔짱을 끼며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암흑시대라는 최악의 세상에서 태어나 마수계로 가기 전까지 평생 전투만 해왔던 데카드가 보기엔 이곳은 너무 위험했다.

“앞으로 멸종당할 수도 있는 위기가 찾아온다는데 살아남을 궁리는 안 하고 농사나 짓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전설의 적임자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저리 천하태평이야?”

“…….”

데카드의 신랄한 비판을 키이라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종족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는 이미 예언됐는데 작금의 마을은 그런 위기를 대비하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기 때문이다.

데카드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암흑시대가 기억나나?”

“기억납니다.”

죽음의 물결에 휩쓸린 세상.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으며 흑마법사가 대낮에도 거리낌 없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좀비, 스켈레톤으로 변해 있을지 모르는 세상.

“그때의 엘프들도 기억나겠군.”

“당연합니다. 그때의 저희는…….”

키이라는 입을 열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없었다.

모두 혀끝에서 막혀 버렸다.

“기억 안 나지?”

“.......”

키이라는 무릎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걸터앉았다.

“기억하려고 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이, 이게 무슨......”

데카드는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키이라를 쳐다보았다.

전혀 이해가 안 갈 테지.

온전하리라고 믿었던 기억이 구멍투성이란 걸 깨달았으니 말이야.

“너희들 엘프는 스스로의 기억을 봉인했다.”

데카드는 그 장소에 있었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엘프가 모여서 자신들의 기억을 봉인하던 그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봉인의 이유는 너희들의 너무 줄어든 종족

수 때문이었다.”

엘프의 번영 방식은 인간의 것과 전혀 다르다.

아주 오래 산 고목에게 정성스레 남녀 엘프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면 뿌리에서 나뭇잎에 둘러싸인 아기 엘프가 나온다.

이 기운을 불어넣는 과정은 아주 조심스러워야 하고 이것 외의 생각은 전부 배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전쟁의 상처는 계속 엘프들을 괴롭히고 번영을 방해했다.

“그렇기에 너희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모든 전투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지.”

“다, 당신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요. 데카드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데카드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가 한숨을 한 번 짧게 내쉬며 말했다.

“나에게 엘프의 언어를 알려주던 자의 부탁이었어. 그는 곧 자신들에게서 잊힐 역사를 기억해 달라고 했지.”

“흐윽.....”

데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키이라의 두통은 점점 심해져 갔다.

억지로 지운 기억의 부작용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기억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할레이의 자리까지 오른 엘프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후우…….”

숨 조절 한 번으로 정신과 마음을 다스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얘기를 해주셔서 정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키이라는 정수리가 전부 보일 정도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답례로 저희 마을에서 편안히 계시고 또 무엇이든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그건 좋네.”

어느새 데카드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키이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방긋방긋 웃었다.

그러다가 밖에 있는 올렌을 불러들였다.

“올렌. 있나요?”

“부르셨습니까.”

“네, 오늘은 마을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축제를 열려고 해요.”

“담당자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해요.”

올렌이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나갔다.

“여러분의 거처는 제가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불편하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보통 지도자가 잠잘 곳을 직접 안내해 주지는 않아 엘리스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키이라는 요지부동.

“제가 직접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 가자고.”

키이라가 안내하는 대로 셋은 마을에서 생활할 거처로 이동했다.

그녀가 바깥으로 나오고 마주치는 엘프들마다 예의를 다해 인사했다.

키이라는 그것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받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동 속도는 살짝 느렸지만, 마을이 워낙 신기해서 이를 구경하느라 느린 줄도 몰랐다.

“이곳인가?”

“향기롭네요.”

마을의 어디에서도 악취는 없고 꽃향기만 가득했으나 이곳은 그 향기가 훨씬 강했다.

마치 커다란 꽃밭에 드러누운 느낌.

안으로 들어가자 엘프 노부부가 일행을 맞이했다.

“아이고, 할레이 님.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할레이 님 오셨군요.”

“살렘. 부탁이 있어요.”

살렘이라 불린 노인은 뒤에 있는 세 명을 슬쩍 보고는 짐작했다.

“뒤에 있는 인간들과 관련된 부탁이군요.”

“맞아요. 그들을 이곳에서 재워도 괜찮을까요? 마을의 귀중한 손님 분들이에요.”

키이라의 말에 노부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허허. 할레이 님의 부탁인데 당연하지요.”

“저희가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감사해요.”

키이라가 잠시 옆으로 빠지고 노부부와 셋이 서로 마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카드입니다.”

“트리스입니다.”

“엘리스예요.”

셋이 손을 뻗고 노부부도 반갑게 손을 잡아주었다.

“살렘입니다.”

“수엔이라고 불러주시길.”

뭔가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존댓말을 쓰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반말을 시키게 하면 그것도 실례일 것 같아 셋은 가만히 있었다.

“잠은 이곳에서 주무시고 저를 따라와 보시겠어요?”

키이라는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은 듯 셋을 데리고 어딘가로 움직였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 평평한 공터 같은 곳에선 젊은 엘프들이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며 무예를 갈고닦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까 데카드와 부딪혔던 엘프들도 몇몇 섞여 있었다.

“이곳은 저희의 연무장이에요. 이곳에서 마을을 지킬 힘을 기르죠.”

엘프 종족의 전투력은 확실히 인간보다 뛰어나다.

월등한 신체 능력을 이용한 무기술과 뛰어난 궁술, 높은 마나 지배력은 거의 전투 종족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아마 엘프들이 자연이 아니라 정복에 관심이 있었다면 일찍이 대륙의 패자는 인간이 아니라 엘프들일 것이다.

[헹! 그래도 마수왕님보단 못하네요!]

요르가 엘프들의 궁술을 보고 한껏 조소했다.

‘너희들이 진짜를 못 봐서 그래.’

엘프 종족의 엘리트 궁사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십 리 바깥에 있는 개미도 맞출 수 있다.

데카드가 엘프들의 무예를 가만히 보고 있자 키이라는 자신감이 한껏 솟은 듯 기죽은 어깨가 살아났다.

“이 정도면 저희도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란 걸 믿어 주실 건가요?”

“멸종의 위기를 막아낼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아예 최악은 아니네.”

“그럼 다른 곳도 보여 드릴…….”

키이라가 이제 다른 곳으로 셋을 이끌려는 순간 누군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할레이 님.”

“라아.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저는 잘 지냈습니다.”

라아라고 불린 엘프는 데카드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까 숲에서 인간은 폭력적이고 열등하다는 무례한 언사의 주인공.

라아는 데카드를 힐끔 쳐다보곤 다시 키이라를 바라보았다.

“저희 엘프를 구원할 귀인을 드디어 찾아내 감개무량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여 귀인만 괜찮으시다면 자그마한 시합을 통해 무예를 견주어 보고 싶은데 괜찮으실는지요.”

이놈 봐라?

키이라는 잠시 옆에 있는 데카드의 눈치를 보더니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하겠습니다.”

데카드는 도전에 응해 주기로 했다.

이 엘프 놈을 그때 패주지 못한 게 잠시 한이 됐었는데 이렇게라도 풀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트리스와 엘리스는 갑자기 생긴 좋은 구경거리에 주머니에서 간식거리를 꺼냈다.

“그럼 시합은 제가 골라도 괜찮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뭘 가져와도 이길 자신 있다.

[요리 시합만 아니라면 주인님이 밀리실 요소는 없지요.]

‘…….’

나 요리도 잘하거든?

잠시 데카드가 속으로 발끈할 동안 시합의 장르는 정해졌다.

“활쏘기 시합. 어떠십니까?”

엘프와 궁술로 겨룬다.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말도 안 되는 시합이지만 데카드는 씨익 입 꼬리를 올렸다.

“하겠다.”

데카드의 승낙에 라아 또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무력으로는 상대가 안 될지 모르나 궁술은 다르다.

자신은 동기 중에서도 궁술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일인자다.

그런데 고작 인간이 자신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합의 방식은 저 나무에 있는 노란 나뭇잎을 맞추면 됩니다. 단, 나뭇잎을 떨어뜨리면 안 됩니다.”

“……나뭇잎을 맞춰야 하나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그렇습니다. 나뭇잎을 화살로 관통해야지요.”

시범을 보이겠다는 듯 라아가 먼저 활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그 시합을 지켜보고 있는 키이라는 트리스와 엘리스의 옆으로 왔다.

“시합에서 져 버리시면 화가 나서 이 마을을 떠나버리시진 않을까요?”

“으음…… 데카드가 그렇게 다혈질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지지도 않을 겁니다.”

“네……?”

키이라가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을 때 라아가 활시위를 당긴 손가락을 놓았다.

슈화아악-!

바람을 찢으며 날아가는 화살은 대략 200M 바깥에 있는 나뭇잎을 정확히 맞췄다.

그것도 잎의 중앙을 정확히 관통해서.

화살촉에 모인 힘이 얼마나 강했던 건지 잎은 조금씩 떨기만 할 뿐 전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라아는 명불허전이네.”

“그러게요. 아무리 귀인이라는 인간도 이거는 무리겠죠?”

“당연하지. 저거는 엘프들에게서도 기예로 통하는 수준이라고.”

주변에 모인 구경꾼들은 백에 백, 라아의 승리를 예상했다.

라아는 데카드가 쓸 화살과 활을 건넸다.

“여기 이걸 쓰시죠.”

그러나 데카드는 피식 웃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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