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시르가
“그럼 지금 바로 가시죠. 저희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깐.”
데카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정지 표시에 올렌은 의아한 눈으로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같이 갈 사람들이 있다.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귀인께서 신분을 확인한 자들이라면 문제될 게 없지요.”
올렌은 청산유수처럼 부드럽게 말을 하며 엘프들을 뒤로 물렸다.
“또 다른 손님들을 데려오실 때까지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불렀거든.”
하늘 높이 까마귀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까마귀는 숲 위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다가 텐트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텐트에 모여 앉아 있는 엘리스와 트리스.
까악-!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두 명은 바람같이 바깥으로 나왔다.
필시 데카드의 연락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까마귀는 발톱으로 땅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엘프 마을로 가자!-
“엘프 마을로 가자……?”
“이번 휴가는 정말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개도 없군요.”
트리스와 엘리스는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까마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텐트로 다가오는 삼인조.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어디 가신 건가?”
무라타와 카슨은 텐트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고 렌달은 마나를 땅으로 얇게 뿌려보았다.
트리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렬한 마나.
이것은 숲으로 뻗어있었다.
“카슨.”
“어?”
“너 땅 속성 전공자잖아. 대지의 기억 좀 써봐.”
“갑자기? 일단 알았어.”
카슨은 순순히 렌달이 서 있는 자리로 가서 땅에 손을 짚었다.
마나를 어느 정도 집중시킨 후 곧바로 이어지는 영창.
“대지의 기억!”
쿠구구구-
곧 땅이 기억하고 있던 얼마간의 시간을 흙이 뭉치고 뭉쳐 표현해 냈다.
필요 없는 것은 다 넘기고 발견한 이해할 수 없는 한 장면.
“이게 뭐지……? 까마귀?”
그것은 까마귀를 따라가는 트리스와 어딘가 익숙한 여자다.
트리스 옆에 있는 여자를 정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명확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우리도 가자.”
“이거 왠지 헛발 짚는 느낌인데.”
“아니야. 이걸 따라가면 무조건 그놈이 나온다.”
렌달이 앞장서고 무라타와 카슨은 불안한 마음으로 풀숲을 해쳤다.
* * *
“여러분들이 귀인께서 말씀하신 손님이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경비대장 올렌입니다.”
“에, 엘리스예요.”
“트리스입니다.”
엘프는 페일에서 본 적이 있는 엘리스지만 이렇게 많은 엘프들에 둘러싸이니 뭔가 작은 숲 안에 있는 느낌이다.
그들의 살결에서 느껴지는 꽃향기와 풀냄새.
인간에게선 절대 맡을 수 없는 냄새다.
“그래서 선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니까요. 갑자기 엘프 마을이라니…….”
“설명해 줄게.”
아침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정리를 끝내자 둘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크헝……. 여기 어디냐?]
[얘는 뭔 잠만 자!]
[크어어…….]
[…….]
고오른은 아직 취침 중이었고 레오와 요르는 이전에 데카드가 마나룸을 전력 개방할 때 일어났다.
올렌은 잠시 데카드의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데카드도 올렌을 치켜보았다.
“뭐야?”
“귀인의 안을 바라보았습니다.”
“뭐가 보이던데?”
올렌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짐승……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데카드 안에 있던 마수들을 본 듯 올렌은 그것을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안에 있던 요르와 티이라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모두 호위 대형을 갖추어라!”
데카드와 트리스, 엘리스의 옆을 엘프들이 일렬로 섰다.
무기를 손에 들고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은 어떠한 위협에서도 자신들을 지켜줄 것 같았다.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저희들 걸음으로는 10분 정도입니다.”
엘프들의 걸음으로 10분이라면 인간의 보폭으론 약 두 배정도 걸린다.
그럼 대략 20분.
이때 동안은 숲에 풍경을 즐기며 걷기만 하면 된다.
“엘프들의 마을이라니……. 역시 선배와 있다 보면 별 신기한 곳을 다 가보는군요.”
“칭찬이지?”
“지금은 칭찬입니다.”
엘프는 자신들 외에 종족을 극도로 배척한다.
그들이 다른 종족을 마을에 들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인간은 더욱더 그렇다.
지금, 마을 역사에 남을 일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리나.
아직 얼떨떨한 기분의 그녀는 올렌이 귀인이라고 취급한 데카드를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면 그렇게 특이한 게 없는데…….’
겉모습은 그냥 인간인데 아까 그 어마 무시한 마나는 뭐란 말인가.
정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심장이 떡처럼 쫀득해졌다.
그리고 레인저인 자신의 다리를 다 굳게 만든 그 살기.
‘그때는 정말…….’
오줌을 쌀 뻔할 만큼 무서웠다.
아까 그 흑마법사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마을에 도착하게 되면 잠깐 입구에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왜지?”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안심해주시길.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결계에서 귀인과 손님 분들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데카드가.
올렌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는 생각이었으나 딱히 깊게 보이는 건 없었다.
귀인이라고 부르는 것치곤 눈에서 존경심이나 동경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명령에 떠밀려서 날 데려가는 느낌인데…….’
이렇게 눈만 봐선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지금은 뭐가 와도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 잠자코 따라간다.
“잠깐만 멈춰 주십쇼.”
잘 가다 말고 갑자기 올렌이 우뚝 멈춰 섰다.
그 이유는 여기 있는 이들 중 마수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앞에 뭔가 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결계인가 뭔가 하는 것 같은데요?]
[…….]
마수들의 예상대로 이 앞은 결계였다.
올렌이 앞으로 손을 뻗자 강물에 파문이 번지듯 허공에 물결이 일렀다.
엘프들은 아무렇지 않게 결계에 들어가고 올렌은 아직 뭔가가 더 남은 듯 결계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 말이 없었다.
“허락을 구하는 건가요?”
“아마 비슷할 겁니다.”
결계는 엘프 외에 종족을 전부 공격할 테니 잠시 그 설정을 변경해 두는 것이다.
“이제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저를 따라와 주십쇼.”
올렌과 함께 셋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이곳이 엘프들의 마을…….”
“책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군요.”
결계 안쪽의 세상은 바깥에서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보통의 나무들보다 훨씬 커다란 나무들이 줄줄이 자라있고 그 안에서 집을 지으며 생활하는 엘프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이 저희들의 마을인 시르가입니다.”
“엘프의 쉼터라, 어울리는군.”
시르가는 엘프들의 언어로 쉼터라는 뜻.
데카드가 엘프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올렌의 눈이 커졌다.
“엘프어도 하실 줄 아세요?”
“할 줄 아는 건 아니고 대충 쉬운 단어들만 알고 있어.”
집행관으로 살다 보면 엘프들과도 몇 번 마주치거나 마찰이 있게 되는데 그때 배우게 됐다.
그때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엘프들도 드물어서 대화가 되려면 서로 배워가야 했다.
“먼저 저희 마을을 이끌고 계시는 할레이를 뵐 겁니다.”
“할레이는 무슨 뜻인가요?”
“엘프어로 리더란 뜻이야.”
마을 중앙에 위치한 할레이의 거처로 이동하기 위해 시르가에 들어왔다.
엘프들은 동물원 원숭이 보듯 셋을 쳐다봤으며 아직 한 번도 인간을 본 적 없는 어린 엘프들은 마냥 신기해했다.
“정말 인간이에요?”
“여긴 어떻게 왔어요?”
가끔 어린 엘프들이 다가와 이런 말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부모가 황급히 아이들을 챙기고 사라졌다.
앞에 올렌이 있음에도 엘프들이 셋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뭔가 따끔따끔하네요.”
“특히 뒤통수가 말입니다.”
엘프들의 눈동자가 온전히 이곳으로 집중돼서 엘리스는 아까부터 후드를 뒤집어쓰는 중이었다.
암살자에게 이렇게 많은 시선은 부담스러운 법이다.
“아직 엘프들은 인간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리들 까칠하게 구는 것이죠.”
“이해한다.”
저번에도 말했듯 인간들은 엘프를 잡아다가 노예로 판다.
자신의 동족이 외간 세상으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남의 손에서 놀아난다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데카드는 저들의 태도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기가 이제 할레이께서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마을의 리더가 생활하는 집치곤 다른 엘프들의 집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공평과 평등을 중시하는 엘프들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리라.
“할레이의 앞에서는 불편하시더라도 한쪽 무릎을 꿇어주시지요.”
데카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올렌은 대문을 살짝 두드렸다.
똑똑-
“할레이님. 올렌입니다. 귀인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풀잎에 맺힌 이슬이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햇볕처럼 따뜻하고 봄바람처럼 온화했다.
올렌이 문을 열자 할레이로 보이는 엘프 여성이 넷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올렌. 그리고 귀인과 손님 분들.”
자신의 친구, 필립과 비슷한 녹발에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
인자해 보이는 미소는 어떠한 것이라도 전부 품어줄 것 같다.
올렌이 무릎을 꿇고 데카드도 그를 따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엘리스와 트리스도 마찬가지.
“일어나세요. 그리고 이곳에 앉으세요.”
할레이가 안내한 자리에는 커다란 타원형 나무 탁자가 있고 의자가 여럿 놓여있었다.
셋은 의자에 앉았고 올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호위를 위해 문 앞을 지켰다.
할레이는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먼저 저희 시르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의 이름은 키이라. 이 마을의 할레이입니다.”
“데카드 아르마다입니다.”
“트리스 아드리안입니다.”
“엘리스예요.”
서로간의 짧은 자기소개가 끝이 나고 키이라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싱긋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뭔가 행복해 보이는 표정.
그녀 자신도 너무 오래 바라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 하며 시선을 뗐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마나라……. 저도 모르게 흥분했군요.”
“괜찮습니다.”
데카드도 뭔가 마음이 평온을 찾는 것 같은 미소를 오래 볼 수 있어 좋았다.
키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 꽂힌 스크롤을 가져왔다.
“귀인을 보니 올렌이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겠더군요.”
스크롤을 책상에 쭈욱 피자 푸른 갑골 문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골 문자는 고대 엘프어로 적혀있었고 이것은 데카드도 읽지 못하는 너무나 고대의 것이었다.
“먼저 귀인은 왜 이곳에 오셨습니까?”
“……저에게 사과한다며 바깥에 있는 엘프가 저를 이곳까지 데려왔습니다.”
“이것도 운명인가요. 흐음…….”
키이라는 턱에 손을 갖다 대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인 듯 갑골 문자를 바라봤다.
“저희 엘프에게 내려오는 전설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전설이나 신화를 좋아하는 트리스가 드물게 관심을 보이는 주제의 등장에 얼른 나섰다.
“눈처럼 흰 마나를 지닌 자가 엘프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이다.”
“으음…….”
이 말만 들어서는 의문점이 많다.
눈처럼 흰 마나는 무엇이고 엘프의 위기는 또 무엇일까.
“이게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히시는 모양입니다.”
“……저만 그런 건가요?”
엘리스가 옆에 있는 데카드, 트리스의 얼굴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지만 똑똑한 둘도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저희도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눈처럼 흰 마나를 가진 자는 깨끗하고 순도 높은 마나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게 저라는 겁니까?”
“지금 보이는 귀인의 마나로 봐서는…… 그렇습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