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허당 엘프
“방금 들었지.”
“동쪽 방향 풀숲에서 들렸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탄로 났다는 것에 놀랐는지 짹짹이가 말한 풀숲에서 움찔하는 느낌이 났다.
짹짹이는 전투 태세를 위해 데카드의 코트 형태로 돌아갔다.
“알고 있으니까 나와라!”
여차하면 날릴 생각으로 짹짹이의 깃털까지 두어 개 뽑아둔 데카드.
그러나 싸울 생각은 없는 듯 풀숲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흑마법사는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기운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짹짹이가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낯선 자의 기운을 감지했다.
조금씩 앞으로 다가올수록 선명히 드러나는 낯선 자의 모습.
그 모습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 건 감출 수 없는 뾰족
귀였다.
“엘프……?”
“전투 의지는 없다. 나도 그대들이 흑마법사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온 엘프는 그들의 방식으로 인사했다.
허리는 살짝 숙이고 오른손은 심장의 위치.
“자연이 함께하길. 나의 이름은 이리나다.”
“……데카드야.”
일단 저쪽에서 인사를 해오니 데카드도 경계를 살짝 낮추었다.
자신을 이리나라고 소개한 엘프는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었다.
“흐음…….”
그리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맡아지는 냄새라곤 아까 먹은 스튜 냄새밖에 없을 텐데 열심히도 맡았다.
“이전에 엘프하고 만난 적이 있군.”
“…….”
“어떻게 알았냐고? 인간에게 베인 동족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또 서로의 맨살이 닿은 경우라면 더더욱.”
페일과 목욕을 하던 그때였나보다.
갑자기 그녀가 안겨오던 그때 말곤 맨살이 닿은 적 없다.
“동족의 냄새가 이렇게 진하게 나는데 적일 리는 없고 그대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 또한 내가 찾고 있는 이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누굴 찾고 있는데?”
“응? 그대들도 놈들을 찾으러 온 게 아닌가? 당연히 흑마법사다.”
데카드의 예상대로 이리나는 흑마법사를 찾고 있었다.
현재 흑마법사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망가져가는 레스펄 포레스트.
숲의 친구이자 이곳을 터전으로 삼은 엘프가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흑마법사가 생기를 전부 빨아간 나무를 보았다. 정말 참혹하더군.”
“그렇겠지.”
흑마법사들이 나무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만큼 생기를 남겨놓을 리 없다.
뺏어갈 수 있는 건 전부 뺏어갔겠지.
“하루빨리 그 역겨운 놈들을 찾아야 한다. 숲이 아파하고 있어.”
이리나는 옆에 있는 나무에 손을 올리며 그 감정을 공유했다.
“그래서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이유는?”
“눈치가 빠르군.”
이리나는 서론을 빼고 빠르게 본론에 들어갔다.
“나와 그놈들을 사냥하자.”
단어 선택이 참으로 아름다운 엘프다.
물론 이 단어보다 작금의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는 없었지만.
“사냥이라…….”
“그래, 사냥이다.”
이리나는 데카드가 무조건 자신처럼 흑마법사를 잡으러 온 줄 알았다.
그냥 관광객이라기엔 너무나 순수한 마나와 서클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설명해 줘야겠군. 나는 흑마법사를 잡으러 이 숲에 오지 않았어.”
“뭐……?”
“나는 황금 같은 휴가를 보내는 중이지. 흑마법사가 숲에서 뭔 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알겠지만 난 그걸 빠르게 해결할 생각이 없어.”
데카드의 말에 잠깐 얼이 빠진 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좋은 동료가 생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엘프 마을에서 온 건 너 혼자인가?”
“나는 레인저다. 마을에 있는 전투원들이 출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의 동태를 파악해야지. 하지만 그들의 수가 적다면 내가 전부 해치울 생각이었다.”레인저는 엘프들의 계층 중에서도 상위급.
숲과 동족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앞장서서 해결하는 특수 부대다.
“거기서 내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거고.”
“맞다.”
이리나는 할 말도 끝나고 볼일도 끝났으니 다시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살짝 찝찝한 기분이 든 데카드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마을 밖으로 얼마 만에 나와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를 얕보지 마라. 놈들은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졌어.”
“그래 봤자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나는 시니컬하게 대답한 후 나뭇가지를 밟으며 숲을 이동했다.
가벼운 몸으로 날쌔게 움직이는 것이 레인저라는 게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다.
콰직-!
“어윽……!”
잘 가다가 밟은 나뭇가지가 갑자기 부러져 나무에 머리를 박은 이리나가 머쓱한 듯 뒤에 있는 데카드를 한 번 쳐다보았다.
데카드는 그녀를 위해 애써 못 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이리나를 보며 데카드는 스읍,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무리 봐도 허당 끼가 있는데…….”
잠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위험하단 판단이 들면 알아서 본대를 부를 것이다.
자신의 걱정은 필요 없다.
“재밌는 엘프였습니다.”
“마지막은 몸 개그였나 봐.”
다시 인간화한 짹짹이와 데카드는 왔던 길 그대로 다시 돌아갔다.
* * *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쪼그려 앉아 식기들을 닦고 있는 엘리스와 트리스.
차가운 시냇물 덕에 졸렸던 정신이 팍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거기 숟가락 좀 주시겠습니까?”
“여기요.”
다 씻은 것들은 트리스가 마법으로 순식간에 물기를 날렸다.
10분 만에 끝난 설거지.
다시 캠프로 돌아오자 데카드와 짹짹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마수들만 조용히 간식으로 가져온 과일, 육포를 심심풀이로 먹고 있었다.
“데카드는요?”
“잠깐 짹짹이랑 산책 갔다!”
“그렇군요.”
식기를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불을 쐬고 있던 엘리스는 마수들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서로 굉장히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을 텐데 이렇게 말이 없는 건 이상했다.
“네 분은 원래 말이 없으신 성격입니까?”
트리스도 이상했는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꺼냈다.
레오야 원래 말을 하지 않으니 넘어가도 나머지 셋은 꽤나 말이 많은 편이었다.
“마수왕님이 없으니까 다들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고오른이 우묵하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가 대답한 이유가 정확한 듯 다른 마수들도 동의의 끄덕임을 보냈다.
“우리는 원래 마수왕님이 없었다면 거의 만나지 않았다.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지.”
“이렇게!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원래라면!”
만나는 것도 어쩌다가 지나칠 때 한 번 보거나 힘을 겨뤄보기 위해서가 이유의 전부였다.
“심심해 죽을 것 같은 나날이 계속되다가 나타난 게 마수왕님이었지.”
태어나길 영역의 지배자로 태어났다.
몇 만 년 동안 다른 마수들을 내려다보며 지겹도록 권태로운 나날의 연속.
그러다가 정말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미친놈.
“마수왕님을 처음 봤을 때는 새로운 종의 마수인 줄 알았다.”
“……너답네.”
그래도 요르 자신은 데카드가 인간이라는 것 정돈 보자마자 알아챘었다.
하지만 티이라도 고오른의 말에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멍청이들이라고 작게 내뱉은 요르가 새로운 육포 봉지를 뜯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데카드와 짹짹이가 캠프에 도착했다.
“마수왕님과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오래전이네.”
“그런가요?”
데카드가 오자마자 캠프에 확 돌기 시작한 활기.
그의 등장 한 번에 마수들의 입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더욱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암…… 너희들이랑 더 떠들고 싶은데 이러다가 내일 세 시에 일어나겠다. 지금 몇시야?”
“새벽 두 시에 가깝습니다.”
트리스가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일찍 주무시지요!”
“그래야겠다.”
마수들과 데카드가 한 캠프에 들어가고 트리스와 엘리스가 다른 캠프에 들어갔다.
넓은 캠프로 골랐는데도 마수들과 같이 들어가자 뭔가 꽉 찬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근데 내일 흑마법사 잡으러 가실 건가요?”
데카드 옆에 딱 붙은 요르가 물었다.
“글쎄…… 아마 우리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거야.”
“누가 우리 대신해 주나?”
“그럴걸?”
엘프가 왔으니 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자신들이야 남은 휴가를 넉넉하게 즐기면 되겠지.
* * *
목청도 좋은 새들이 아침부터 짹짹거리며 캠프 위를 날아갔다.
텐트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등지며 트리스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어디 가세요?”
그 인기척에 잠이 깬 엘리스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휴가 연장하러 갑니다.”
“휴가 연장이요?”
“네.”
젠킨스가 준 일주일을 거의 다 써가니 자신의 개인 휴가로 더 연장해야 한다.
그동안 묵혀둔 휴가들이 불을 뿜을 시간이다.
트리스가 외투를 걸치며 텐트의 입구를 열었다.
“그럼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세요.”
트리스는 텐트를 친 터를 넘어 산길로 들어왔다.
숲의 입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기에 그렇게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맑은 공기로 폐를 정화하며 걸어가던 도중 자신의 기감에 무언가가 걸렸다.
“으음?”
혹시 모를 기습이나 암습에 대비해 수시로 펼치고 있는 기감에 잡힌 독특한 마나.
“엘프…….”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지금 나무를 헤치고 헤쳐 엘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레스펄 포레스트는 워낙 넓고 험한 숲이니 엘프 마을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오랜만에 느껴 본 엘프의 마나를 뒤로하고 트리스는 디에고로 움직였다.
“한적하군.”
아침은 도시가 활동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물건을 늘여놓는 상인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강렬한 적발에 힐끔 눈길을 주던 몇몇 사람들도 있었고 아름다운 용모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머네.’
지금 트리스가 가는 곳은 마도 우체국.
일반 집배원이 편지를 전달하기엔 거리도 멀고 너무 느리니 아사이드의 마법부까지 한 번에 전달해 줄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중앙까지 걸어오자 비둘기 모양의 간판이 보였다.
‘도착했어.’
우체국 안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온 트리스.
일단 휴가 연장 신청을 젠킨스에게 보내기 위해 적당한 편지지를 찾았다.
슥슥-
편지지를 찾은 후부터는 깃펜을 이용해 필기체로 숭숭 연장서를 적어 내려갔다.
자신을 대신해 과로에 시달릴 부총장이 살짝 눈에 밟혔지만, 깃펜은 쉼 없이 글씨를 썼다.
깃펜에 있는 잉크가 다 마를 정도로 편지지를 빽빽하게 채웠다.
“이 정도면 알아먹으시겠지.”
자신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휴가 도중에 복귀하지 않을 거라고 길고 자세하게 적었다.
하얀 봉투에 신청서를 넣고 자신의 이름을 적은 트리스는 편지함에 그대로 넣었다.
“선배와의 시간이 조금 더 생겼어.”
휴가도 연장했으니 다시 시간 걱정 없이 데카드와 놀면 됐다.
우체국을 나와 캠프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때 우체국 건너편에 있던 텔레포트 기계가 환하게 빛났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우리 3학년이잖아. 그냥 다시 돌아가자.”
“아이 조용히 해봐! 나는 그놈이랑 결판을 지어야 한다고!”
“하아…… 빨리 그놈이나 찾아보자. 이 먼 남쪽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냐.”
기계에서 내려온 세 명은 놀랍게도 트리스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씩씩 화를 내는 남자는 렌달 펜하우저.
마탑의 3학년이다.
그를 말리려고 하는 나머지 두 명은 각각 무라타 힉스, 카슨 테츠먼이다.
저 둘도 똑같은 마탑의 3학년.
이번 학기만 지나면 세계로 나갈 학생들이 왜 공부를 뒤로 미루고 디에고까지 온 걸까.
트리스는 성큼성큼 셋에게로 다가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