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추억 여행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흐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금 바로 움직여서 흑마법사들의 꼬리를 밟느냐.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편안한 휴가를 즐기느냐.
“일단 오늘은 쉬자. 이렇게 맛있는 저녁이 눈앞에 있는데 흑마법사한테 방해받을 순 없지.”
“저희는 휴가를 즐기러 온 것이니까요.”
“맞아.”
흑마법사들이 숲에 생기를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급한 건이 맞았다.
다만 굳이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정도로 위험도 높은 일은 아니다.
“오늘은 쉬고 노는 데에 집중하자! 쓰레기는 내일 치우고!”
“알겠다! 근데 이거 지금 먹어도 되나?”
“물론이죠! 티이라 님.”
“헤헷! 고맙다. 엘리스!”
티이라는 엘리스가 담아준 스튜를 크게 한 접시 받고 의자에 앉아 숟가락으로 열심히 퍼먹었다.
걸쭉하면서 혀끝에 맴도는 감칠맛은 계속 손이 가게 했다.
타닥- 타닥-
활기차게 타오르는 따뜻한 불.
그리고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료와 가족들
할 수만 있다면 이들과 평생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유물만 다 안전해지면 그때부턴 섬에 들어가서 마수들이랑 살아야지.’
퇴마부장이 되면서 젠킨스가 준 자신 명의의 섬.
관광지로도 활발한 그곳이 아예 자신의 섬이 되었으니 적당한 장소에 별장을 하나 만들고 따뜻한 햇볕 아래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
눈을 감으며 잠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던 데카드를 트리스가 보았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기분 좋지.”
미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지금의 불행함은 잠시 잊고 행복한 미래만 꿈꿀 수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냥 별거 없어. 내 미래에 대한 상상이지.”
“상상 속 선배는 어땠습니까?”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잘 살더라.”
데카드가 입 밖으로 내뱉은 한 가지 단어에 일행 중 세 명이 흠칫했다.
결혼……?
데카드가 결혼을 한다?
그럼 그 배우자는 누군데?
“마수왕님! 사랑해요!”
“어, 그래.”
갑작스런 요르의 사랑 고백에 데카드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받아주었다.
이런 거는 요르가 마수계에서 시도 때도 없이 했던 것이다.
“으으……!”
요르는 데카드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원치 않자 볼만 잔뜩 부풀렸다.
“너무 열 내지 말고 쉬어, 요르. 우리 휴가 왔잖아.”
“알고 있어욧!”
톡 쏘아붙인 요르는 팽하고 고개를 돌려 어두운 숲 쪽을 바라보았다.
데카드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의자의 등받이를 내렸다.
그러자 나무의 잎들 사이사이로 총총하게 뜬 별이 눈에 보였다.
“얘들아, 그거 아냐.”
“뭘 말씀이십니까?”
고오른이 의자를 데카드 쪽으로 슥슥 당기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착하게 살다가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군요. 전설입니까?”
“누구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데카드는 그 말을 끝으로 계속 별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금방이라도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이 웅장한 하늘의 모습은 퍽 아름다웠다.
잠시 말이 없던 데카드는 마수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인간계로 온 자신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을 사는 마수.
자신이 시간의 흐름대로 살다가 늙어서 죽어버리면 자동으로 계약이 해제되면서 마수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이 없다.”
“뭐가 말이냐?”
티이라가 아직 남은 냄비에 남은 스튜를 바닥까지 긁어먹으며 대꾸했다.
“너희들을 두고 떠날 자신이.”
“어디 먼 데로 가실 계획입니까?”
“멀긴 하지. 너무 멀어서 한 번 가면 절대 돌아올 수 없어.”
트리스와 엘리스는 데카드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 눈치채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의 이름은 죽음.
시간의 편차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공평한 존재다.
데카드에게도 언젠가 올 존재인 죽음은 괜히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그건 안 돼.”
“왜…… 안 돼요?”
너무 단호한 데카드의 어조에 도리어 마수들이 깜짝 놀랐다.
말만 들으면 데카드가 자신들을 두고 어딘가로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수왕님……! 어디 가지 마라! 흐으윽…….”
티이라가 스튜를 먹던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와락 안았다.
조금씩 떨리는 어깨와 작은 흐느낌.
데카드는 울음이 터져버린 티이라의 뒷머리를 조금씩 쓰다듬어주었다.
“…….”
잠시 그녀의 울음을 받아주다 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떠나면 우리를 누가 이끌어?
“그건 나도 모르겠어, 레오. 미안해.”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데카드도 이들을 전부 소환할 만큼 뛰어난 소환사가 후대에 나올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기적이 두 번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9서클에 오른다.
그 마법사가 마수 소환을 전문적으로 해왔다.
이 기적들이 모여야 마수들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
“어디로 가시든지 상관없어요! 제가 마수왕님 바지라도 붙잡고 따라갈 거니까!”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크흥……! 나도다!”
“…….”
데카드는 살짝 웃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살짝만.
이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고맙지만, 인간인 자신의 짧은 수명에 따라 마수들까지 명을 달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앞으로 오래 살아봐야 80년이야. 너희들에겐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없어지는 80년. 그 후에는 죽음이 날 찾아올 거야.”
언젠가는 했어야 할 이야기.
지금 분위기도 적당히 잡혔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있으니 꺼낼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마수들은 멀리 떠나야 한다는 데카드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마수왕님이 돌아가신다고……?”
요르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레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고오른은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티이라는…….
“흐아아앙!”
아까보다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트리스가 마른 수건 하나를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데카드의 옷이 전부 젖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당장은 건강하고 딱히 죽을 일도 없지. 당장은 아니니까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두면 좋을 것 같아서.”
80년은 인간의 기준으로 거의 평생이라고 할 정도로 길었지만 마수들에겐 찰나.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시간만큼 짧게 느껴질 것이다.
요르는 말없이 다가와 양팔로 데카드의 목을 감쌌다.
그리고 끌어안았다.
참으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포옹이었다.
보통의 인간은 이 감정의 무게에 깔려 죽을 정도로.
“마수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으시겠죠?”
“그럴 방법도 모르고 죽을 때는 내 세계에서 죽고 싶어.”
요르는 감았던 팔을 풀고 그와 떨어졌다.
데카드는 활짝 웃어 보였다.
방금까지 죽음 운운하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앞으로는 매일매일이 마수왕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게요.”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요르가 쏜살같이 데카드에게 입술을 맞췄다.
순간 엘리스의 동체시력으로도 놓칠 만큼 너무나 빨랐다.
요르의 혀가 데카드의 입안을 헤집어 놓았다.
이빨 개수를 하나하나 새는 듯한 움직임에 온갖 저주에도 멀쩡하던 데카드의 정신이 살짝 아득해졌다.
“후우…….”
요르가 몇십 초간 이루어지던 입맞춤을 멈추고 입술을 손으로 쓸었다.
데카드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요르는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요! 데헷!”
입맞춤 덕분인지 다시 활발해진 요르는 총총 발걸음도 가볍게 의자로 돌아갔다.
“나도 열심히 노력한다!”
티아라도 마음의 정리가 조금 된 듯 울음을 멈추고 데카드를 한 번 안았다.
요르가 포근하다면 티이라는 그냥 힘.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으억……!”
“좋을 것 같다! 하루 한 번은! 이렇게 하는 거!”
하루 한 번씩 이런 고통을?
아무래도 자신의 죽는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다.
아까 말했던 80년은 취소.
“그러고 보니 엘리스는 어디 갔어?”
“저기 아래에 있는 냇가에 설거지하러 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데카드 뒤에 서서 얘기를 듣고 있던 짹짹이가 대답했다.
“물은 그냥 마법으로 해달라고 하지.”
“방해하기 싫었겠죠.”
한창 데카드와 마수들이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엘리스 성격상 끼어들 수 없었다.
둘이 같이 간 듯 아까까지만 해도 수건을 줬던 트리스도 보이지 않았다.
“짹짹아.”
“네, 주인님.”
“너랑 나랑 얼마나 알고 지냈지?”
짹짹이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1000년 하고도 8개월 15일째입니다.”
“…….”
무섭기까지 한 날짜 기억력에 데카드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문질렀다.
“크흠…… 참 긴 시간이네.”
“맞습니다.”
여기 있는 짹짹이와는 마수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다.
자신의 첫 번째 신하.
그와는 따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잠깐 걷자, 짹짹아.”
“알겠습니다.”
마수들은 가만히 불 앞에서 기다리고 정말 데카드와 짹짹이.
두 남자만 어두운 숲속을 별빛과 달빛에 의지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숲속에서 너하고 걸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저도 그럽니다.”
데카드는 짹짹이와 같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처음으로 무기화에 성공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지금은 짹짹이의 무기화인 까마귀 코트로 자유롭게 변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련의 결과가 바로 까마귀 코트.
절벽 끝에서 짹짹이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기분은 지금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때 기억나지? 처음 무기화 성공한 날.”
“물론입니다. 주인님이 절벽에서 27번째 떨어졌을 때 바닥에 머리를 박아 커다란 혹이 난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그걸 기억하고 있어?”
“주인님과 만났던 날 이후부턴 모두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처음 이름을 하사받았던 날.
주인님과 함께 다양한 마수들과 싸워본 날.
주인님이 해준 요리를 먹었던 날.
같이 별을 봤던 날.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이 짹짹이에겐 너무나 가까웠다.
“그럼 그것도 기억나? 우리가 바다에 나갔을 때 웬 거대 고래한테 잡아먹혔잖아.”
“당연히 기억납니다. 그때 저희는 고래가 숨을 쉬려고 수면으로 올라갔을 때 입안을 공격해서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죠.”
“맞아! 하하핫! 그때 그놈 입 냄새가 정말 고약했는데.”
숨을 얼마나 오래 참는지 깊은 바다에서 다섯 시간 동안 고래의 입 안을 굴러다녔다.
그땐 정말 죽다 살아났는데 막상 바다 밖으로 나오고 나니 서로 미역 범벅이라 웃음이 터졌었다.
그때는 참 즐거웠다.
마수계는 가도 가도 새로운 곳이 자신을 반겨주었고 정복할 마수들도 엄청나게 많았으니까.
“그러다가 주인님이 네 마리의 지배자를 모두 무릎 꿇리셨죠.”
“그것도 추억이네.”
한 마리당 몇백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복종시킬 수 있었다.
그때는 9서클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모든 게 자신의 밑 같았는데 그런 괴물들은 처음 봤다.
외피는 성벽처럼 단단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벼락같이 날카롭고 빨랐다.
“그때는 죽일 것처럼 싸웠지만, 지금은 다 가족이지.”
옛날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며 하릴없이 숲속을 걷고 있을 때 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샤샤샥-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