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그림자와 달
잔인하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찢겼다.
어릴 때부터 차출된 아이들은 살육 기계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젓가락 잡는 법보다 칼 잡는 법을 먼저 배웠다.
“상대의 목에 확실하게 단검을 박아 넣어라!”
파악-! 퍽-!
“으아아악!!”
움직이지 못하는 허수아비의 목에 아이들은 저마다 비명과도 같은 기합을 질러가며 단검을 꽂았다.
아직 악력이 부족해 손에서 단검을 놓치고 그러다가 자기 손을 베는 일도 수두룩했다.
“흐음…….”
하지만 이런 꼬마들 중에 유일하게 두각을 드러내는 한 여자아이.
그 아이는 처음 쥐어봤을 단검을 수족처럼 다뤘으며 몸의 움직임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완벽했던 건 눈빛.
차갑고 무정하며 극지대의 빙하와도 같아 보이는 저 눈빛.
타고난 암살자의 눈빛이다.
“이름이 뭐냐?”
바인츠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건가?
상관없다.
암살자가 말이 많아서 좋을 건 없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부터 엘리스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손에는 단검을 쥔 채 여자아이는 엘리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나와 가자꾸나.”
바인츠는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이것은 벌써 20년도 더 된 옛 기억.
그러나 지금은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고 있다.
채채채채챙-! 챙챙-!
서로의 단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공터를 진동시켰다.
엘리스와 바인츠의 손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단검을 던졌다.
모든 단검이 서로의 급소를 노렸다.
하나만 맞더라도 무조건 치명타.
“가르쳐 준 건 어디다 팔아먹었느냐!”
“…….”
엘리스는 자동 회수 기능을 사용해가며 던진 단검을 빠르게 되돌렸다.
그에 반해 바인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무수한 단검과 암기들을 날렸다.
암기의 수는 바인츠가 훨씬 많았으나 엘리스는 단검의 부피로 대부분의 공격을 튕겨냈다.
그러다가 이따금 눈먼 암기가 핏물을 튀기게 했다.
“그런 놈 곁에 계속 머물러 있으니까 둔해지고 물러진 것이다!”
“닥쳐!!”
엘리스가 난사되어 오는 암기를 피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양손에 두 개씩 단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아는 기술들은 모두 내가 가르친 것이다. 잊었느냐?”
그딴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엘리스는 이를 악물고 단검 두 개를 날렸다.
“후훗.”
하지만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 빙긋 웃는 바인츠.
그는 유려하게 몸을 뒤로 빼며 뒷짐까지 진 채 엘리스의 공격을 흘려냈다.
“어둠의 무희. 클래식한 기술이지.”
“흐읍……!”
엘리스는 자신의 공격 패턴이 모두 읽혔음에도 멈추지 않고 두 개의 단검을 계속 움직였다.
바인츠가 읽지 못하도록 최대한 빠르게.
손목이 저리고 손가락이 빠질 것 같았어도 멈추지 않았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절대 공격을 맞출 수 없어.’
엘리스의 노력이 통했던 걸까?
전혀 닿지 않던 단검들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바인츠는 점점 표정을 굳혀갔다.
“이런 잔기술 따위로 날 넘어서려 한 건가!”
함성과 함께 그는 아까 엘리스가 사용했던 어둠의 무희를 똑같이 사용했다.
'위에서 아래……!'
엘리스도 익히 알고 있는 기술이라 공격 방향이 읽히긴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채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면서 내는 찌르르한 강철의 파열음이 귓가에 앵앵 맴돌았다.
강력한 힘을 그대로 받아친 손목은 퉁퉁 부어올랐다.
‘완성도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다니…….’
같은 기술이라도 사용자에 따라 그 살상력은 천차만별.
엘리스 또한 뛰어난 암살자였지만 바인츠는 반백 살의 나이까지 줄곧 암살단에 몸담아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
그의 숙련도를 따라가기엔 아직 부족했다.
“후후…… 힘의 차이를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단검을 집어넣어라.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의 반항은 없었던 일로 해주마.”
“……당신이 가르쳤던 것 중엔 이런 게 있었지.”
[암살자는 상대를 죽이기 전까진 절대 납검해선 안 된다.]
엘리스는 바인츠에게 훈련을 빙자한 구타를 맞아가면서 그가 했던 모든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지금부턴 그 말들을 그대로 돌려줄 시간이다.
그녀의 단검 열 개가 모두 뽑혀 나왔다.
손가락 사이에 하나씩.
나머지 두 개는 평소 단검을 쥐는 것보다 살짝 끝부분을 움켜 잡았다.
엘리스의 작은 손에 비해 단검의 수와 무게는 과해 보였으나 그녀는 안정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호오…… 설마 완성한 것이냐.”
“…….”
바인츠는 준비 자세만으로 어떤 기술이 나올지 알아챈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 기술이라면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어.”
갈까마귀 암살단에 마지막 기술.
그것의 이름은 초저녁.
이 기술을 익힌 자는 벌건 대낮에서도 사람 열을 동시에 죽이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궁극의 암살 기술이다.
지금까지 초저녁을 익힌 암살자들은 모두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내가 예언 하나 해볼까. 너는 그거 성공 못 한다.”
바인츠는 씨익 웃으며 단검 하나를 역수로 쥐었다.
분명 가르쳐준 적은 있어도 이 기술은 벼락치기로 해낼 수 없다.
모든 동작이 정확한 타이밍에 맞물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빈틈이 생기고 본인이 죽고 말 것이다.
“목소리 정도로 너의 반항을 퉁쳐 주지.”
단검의 그립이 엘리스의 성대를 부술 것이다.
옥구슬같이 아름다운 목소리였는데 아쉽게 됐다.
“…….”
엘리스가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가 움직일수록 세상이 점점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똑- 똑-
지붕에 맺힌 이슬들이 하나둘 떨어지고 마지막 이슬이 대롱대롱
끝에 매달렸다.
계속 버텨보았지만, 이슬은 결국 떨어졌다.
슈화아아악-!!
어느새 반전되어있는 둘의 위치.
엘리스는 바인츠의 뒤에 서서 천천히 납검했다.
“흐헉……! 크하하……. 역시 괴물은 괴물이군…… 설마 내가 당할 줄이야…….”
바인츠는 사지가 잘려나간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그의 머리 위로 이슬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지붕에서 이슬이 땅바닥까지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
엘리스는 바인츠를 베었다.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 엘리스……. 너도 살인자에 불과해. 그와 같이 있으면 네가 빛이라도 된 것 같더냐…… 너는 여전히 그림자다…….”자신의 옷섶을 뒤지며 작동 장치를 찾는 엘리스를 향해 바인츠는 피 섞인 외침을 뱉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에다 곧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옛 스승.
엘리스는 작동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슈욱-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진 결계.
그녀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맞아. 당신의 말대로 난 살인자에다가 평생 양지로 나올 수 없는 그림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거 알아?”
엘리스는 완전히 저문 태양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달을 눈에 담았다.
“원래라면 아무런 빛을 내지 못했을 달도 태양 덕분에 환하게 빛나고 있어. 그의 곁에 있으면…….”
내가 그런 달이 된 기분이야.
뒷말은 삼킨 엘리스는 공터를 벗어났다.
* * *
순식간에 수신호로 어떤 진형으로 상대를 압박할지 정한 암살자들이 저마다의 자리로 움직였다.
상대가 뭐 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마법사일 수도 있으니까 최선을 다한다.
슈슉-!
날카롭고 예리하기 그지없는 암기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왔다.
사각지대를 전부 지운 암기의 경로는 어디로 회피하든 맞을 수밖에 없었다.
“같잖군.”
하지만 짹짹이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칠흑의 거대한 날개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의 몸을 감쌌다.
날개는 곧 단단한 갑옷이 되어 그를 지켜주었다.
탱-! 까앙-!
날개에 부딪혀서 튕겨져 나가는 암기들.
그 소리에 짹짹이는 눈을 찌푸렸다.
“주인님이 깨신다.”
날개가 양옆으로 쫘악 펴지면서 분사되는 깃털들은 암살자의 목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이것은 갈까마귀 암살단의 기술로 엘리스에게서 배운 것이다.
“크헉…… 어떻게 외부인이 우리의 기술을…….”
단말마의 비명과 같은 유언과 함께 암살자들은 모두 쓰러졌다.
짹짹이는 양손을 탁탁 털며 시체들을 치우기 위해 까마귀들을 부르려고 하는 중 창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또 암살자인가 하는 순간 익숙한 인형이 복도로 들어왔다.
“엘리스였군.”
“이미 정리하셨군요.”
“그렇지.”
엘리스가 왔을 때는 이미 짹짹이의 벌레 청소가 끝났을 때였다.
“데카드는 어디에 있나요?”
“주무신다.”
“그렇군요.”
엘리스는 후드를 벗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짙은 색의 암살복 때문에 티는 잘 안 났지만 여러 군데 피가 흐르고 있고 엄청 숨차 보였다.
“암살자가 이들 말고 더 있었나?”
“후…… 걱정 마세요. 처리했으니까.”
“상처는 도와주겠다.”
그 말에 엘리스는 손사래를 치며 완강히 거부했다.
“괜찮아요. 이 정도 상처는 익숙해서 혼자 치료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 때문에 생긴 소란인데 더 민폐를 끼칠 순 없죠.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짹짹이는 아까 덮어놓은 책을 마저 보기 위해 그녀의 사과를 받아넘기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후우…….”
상처 난 부위를 손으로 막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스.
겉옷은 전부 벗고 속옷만 입은 채 그녀는 주머니에 있던 응급 상자를 꺼냈다.
피를 닦고 바로 이어지는 상처 소독.
“으윽......”
따끔하고 쓰라린 고통이 지속되었지만 참아야 했다.
앞으로는 더 아플 테니까.
베인 상처를 계속 열어두면 피가 멈추지 않을 테니 빠르게 봉합해 주어야 한다.
바늘에 실을 꿴 엘리스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봉합에 들어갔다.
“으윽…… 윽…….”
한 번 바늘이 살을 뚫고 나갈 때마다 조금씩 신음성이 터졌다.
이 짓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벌컥-
“엘리스 있습니까?”
상처를 꿰매고 있는 와중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트리스.
엘리스는 속옷만 입고 있는 채 상처를 꿰매는 자신의 꼴이 이상해 멋쩍은 듯 눈을 피했다.
“뭔가 큰 소리가 나길래 방으로 와봤는데 뭔 일이 있긴 했나 보군요.”
“별일 아니었어요.”
“상처는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트리스는 방으로 들어와 엘리스가 쥐고 있는 바늘을 빼앗았다.
“이런 응급처치는 저도 할 줄 압니다. 자신이 하는 것보단 남이 해주는 게 훨씬 편하겠죠.”
“그럼 부탁할게요.”
트리스는 바늘을 빠르게 움직이며 최대한 엘리스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했다.
팔에 있던 상처와 어깨에 있던 상처.
허벅지에 난 상처까지 모두 트리스의 손이 닿자 깨끗하게 봉합되었다.
“오늘은 이렇게 두고 내일 사제한테 가면 될 겁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응급 상자를 닫고 다시 주머니에 넣자 뭔가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 말을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뭘 해야 할지는 모르는 이 기분.
“크흠…… 많이 아팠겠습니다.”
찾다 찾다 결국 꺼낸 위로의 한 마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엘리스는 옷을 주섬주섬 다시 챙겨 입으며 더러워진 암살복은 구석에 걸어놨다.
흙투성이에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은 암살복을 바라보던 트리스가 말했다.
“운동을 격렬하게 하셨나 봅니다.”
“조금 격렬했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할 만큼 아주 격렬했다.
그래도 목숨을 담보로 한 만큼 성취가 진일보했다.
“뭔 일인지는 깊게 묻지 않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쇼.”
“안녕히 주무세요.”
트리스는 빨리 엘리스가 쉴 수 있도록 방을 나가주었다.
엘리스는 잠시 창문 밖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다가 방의 불을 껐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