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갈까마귀
“뭐, 그렇게 됐다.”
덤덤하게 말하는 데카드를 보며 필립은 인생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는 뼈 빠지게 경력 쌓아서 대리, 과장순으로 올라갔는데 어떤 놈은 바로 다이렉트네.”
“그 어떤 놈 듣기 부끄럽겠다. 그만 칭찬해라.”
필립은 헛웃음을 내뱉더니 사과를 마저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건 비밀 부서라 너 같은 부장들 말고는 내가 존재하는지도 몰라.”
“그건 그렇지.”
만약 명예를 위한다면 퇴마부는 최악의 선택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뛰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까.
하지만 데카드는 처음부터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지금의 퇴마부 부원들도 마찬가지.
“근데 흑마법사 소탕 임무를 우리가 맡았으면 집행부는 뭐 하냐?”
“아, 그거?”
집행부가 하는 일이 흑마법사 소탕만은 아니지만, 이 부분이 가장 큰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 부분을 퇴마부가 가져갔으니 집행부는 시간이 나름 여유로워진 셈이 된다.
“우리는 유물이랑 미궁만 파고 있지.”
이제 전설에 따르면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유물.
다섯 개 중 두 개는 마법부의 손에.
하나는 썩은 쥐 보스의 손에.
나머지 두 개의 행방만 더 알아내면 된다.
그 두 개를 위해 지금 집행부의 사람들은 대륙 전역을 이 잡듯 뒤지고 있다.
“뭐어, 열심히 해라.”
“그러는 중이다. 후우…….”
데카드는 친구를 위해 심심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데카드가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밥 먹고 갈 거냐?”
“그럴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냥 가려고.”
아침도 먹고 과자도 먹다 보니 배가 다 차서 필립의 집에서 뭘 얻어먹진 않아도 될 것 같다.
바구니에 담긴 마지막 과자의 봉지를 뜯었을 때 방문을 열고 저택의 집사가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밖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필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고 주인 없는 방에 혼자 있는 건 좀 그런 것 같아 데카드도 따라나섰다.
솔직히 뭔 일인지 좀 궁금하기도 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1층 정문의 앞에서 필립과 어떤 무리가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 무리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무언가 음험한 분위기와 기묘한 살의를 뿌리고 있었다.
살의를 뿌리고 있긴 하나 딱히 대상이 없는 살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일상인 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병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의 용건이 뭡니까?”
필립은 뭔가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표정을 구기며 무리의 조장에게 되물었다.
“아까도 말했듯 우리는 단 한 가지만을 원합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 있는…… 그래, 저기 저자 말입니다.”
무리 중간에 있던 자의 눈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데카드에게서 멈췄다.
갑자기 정문에 있던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쏠렸다.
“데카드를 말입니까?”
필립은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정문까지 찾아와서 자신의 친우를 내놓으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당사자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평온했다.
왜냐하면 저들의 정체를 알 것 같았으니까.
“갈까마귀 암살단. 왜 나를 보러 온 거지?”
“정확히는 납치하려 했으나 하필 집행부장과 같은 방에 있더군.”
저택 경비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가능했으나 필립의 눈까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모시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게 정중한 방법인가?”
“그럼. 아무도 죽지 않았잖은가.”
“…….”
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온 이의 사고 회로는 평범한 이와 많이 달랐다.
데카드가 표정에서 슬슬 웃는 낯을 지워가자 암살조의 조장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가 당신을 모실 수 있게 허락해 주겠나?”
“거부한다면?”
“글쎄…… 평생을 우리 암살단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면야 말리지 않겠네.”
다른 암살단이었다면 코웃음 치고 무시하겠지만, 이들은 다르다.
갈까마귀 암살단은 암살자들의 종교라고 불린다.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칭송받는 이들은 일국의 왕까지 암살한 전적이 있다.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가 보호하는 왕의 침실에서 말이다.
“그냥 무시해라. 데카드. 이놈들은 내가…….”
“아닙니다. 부장님. 이들도 딱히 제게 적의를 품은 것 같지는 않군요.”
“큭큭…… 감이 좋군.”
데카드는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무리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그 넷을 깨울까요?]
짹짹이가 말하는 넷은 지배자급 마수들을 뜻한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암살단을 따라가는 것이니 여차하면 싸울 준비도 해야 한다.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심상치 않다.
최소 엘리스 수준이거나 더 높을 것이다.
이런 놈들과 싸우려면 마수들의 힘이 필요하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우리의 용건만 해결하면 조용히 사라져 줄 터이니.”
“나보단 당신들이 더 긴장한 것 같은데? 단검 만지작거리는 거 다 보인다. 혼자인 상대한테 그렇게 쫄았나?”
데카드의 말에 뜨끔한 몇몇이 급하게 손을 가만히 두며 짐짓 그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조사한 바, 당신도 엄청난 무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거든. 그러니 이렇게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건 이해하는데 내가 할 경계까지 다 가져가 버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명백히 자신이 위라는 투의 어조.
본인의 힘에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고 이럴수록 자만하기 쉬우나 무언가 이자는 달랐다.
무리의 조장은 작은 것에서도 끊임없이 데카드를 파악하려 들었다.
‘재밌네.’
[멋대로 주인님을 재고 있군요.]
‘뭐 톱클래스 암살자니까 알아서 거를 건 거르고 있겠지.’
데카드도 입은 웃고 있으나 단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라도 단검의 날을 바깥으로 내보인 순간 갈까마귀와 평생 척을 지더라도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인다.
이런 암살자들 사이에선 한시라도 방심할 수가 없어 데카드도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이들과의 싸움을 계산하고 있었을 때 암살단은 으슥한 골목이나 폐가가 아닌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함정을 준비한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민간 가게에 들어왔다.”
“그런가.”
이런 가게조차 이들이 섭외한 곳일 수 있기에 데카드는 대충 긍정해 주고 자리에 앉았다.
무리의 조장만이 데카드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머지는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둘만 남았으니 본격적으로 우리의 용건을 말하겠네.”
“해봐라.”
“우리 갈까마귀 암살단은 엘리스의 복귀를 원해.”
“…….”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게 만드는 조장의 용건에 데카드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여기 술 제일 독한 거로 한 병.”
“알겠습니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잔 두 개와 술이 담긴 유리병을 갖다 주었다.
“미안한데 한 잔만 할게.”
“이해한다. 갑자기 정들은 동료를 내놓으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
쪼르르- 꿀꺽- 꿀꺽-
데카드가 술을 따르고 한 번에 들이켜고 있을 때 조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의 동료이기 이전에 우리의 암살자였다. 그녀를 돌려줘라.”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닌가? 엘리스의 복귀를 원하면 본인한테 가야지, 왜 나한테 온 거야?”
“암살자의 맹약. 그것 때문이다.”
데카드가 엘리스의 생명을 구해 주고 그녀는 맹약에 따라 데카드의 목숨을 한 번 구하기 전까진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맹약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 존재한다.
“암살자가 지키기로 한 대상이 맹약을 스스로 파기한다면 그 암살자는 다시 자유로워진다.”
“……그 말은 꼭 내가 엘리스를 묶어두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럼 틀린가?”
쿠구구구구구-
데카드의 마나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며 순간 지진이 난 듯 테이블을 마구 떨리게 했다.
마나와 더불어 울긋불긋 피어오른 살기가 쿡쿡 조장의 피부를 찔렀다.
“뭐, 뭔 일이야!”
“지, 지진이다!”
“모두 피하세요!”
사람들이 갑자기 바닥을 울리는 마나의 공명을 지진과 착각하고 가게에서 빠져나갔다.
[주인님.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안다.’
데카드는 심기를 안정시키며 마나가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전에 가라앉혔다.
마나의 방출이 멈추자 가게 벽면에는 금이 갔고 창문 몇 개는 깨졌으며 천장에선 부서진 나무 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생각보다 더한 괴물이군.”
“…….”
데카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속을 식히기 위해 술을 따랐다.
“맹약을 파기해 주면 엘리스는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어. 시체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적을 가차 없이 죽이는 그 광경은…… 하아…… 참으로 아름다웠지.”
“내가 아는 그녀는 그렇지 않아. 엘리스는 꽃을 좋아하고 선물을 좋아하며 놀이동산을 좋아하는 순수한 소녀였다.”
굉장히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조장이 데카드의 말에 전에 없는 폭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내가 자신 있게 말하지. 그건 엘리스가 아니다.”
“네놈이 엘리스에 대해서 뭘 아나.”
“나는 엘리스가 기어 다닐 때부터 보아왔고 암살자로 키웠다. 반대로 묻지. 네놈이 엘리스에 대해서 아는 게 무엇이 있나.”
데카드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조장의 말에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가게를 나가는 그를 조장은 막지 않았다.
그저 데카드가 남긴 술을 마저 따를 뿐이었다.
“흐음…… 맛이 좋군.”
술을 잔에서 한 바퀴 돌린 후 쭈욱 들이키자 정신이 한결 말끔해졌다.
조장은 마지막으로 가게를 나와 후드를 뒤집어썼다.
“쫓지 않으셔도 됩니까?”
무리 중 한 명이 물었다.
점점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는 데카드를 지금 납치하거나 확답을 받아내지 못하면 일행과 합류할 것이기 때문이다.
“놔두어라. 시간은 많으니.”
* * *
“기분만 잡쳤군.”
데카드는 입에 남은 술의 쓴맛과 잡생각을 한데 모아 하수구에 침을 뱉었다.
아무래도 괜히 만났다는 느낌과 함께 그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슬슬 저녁때가 되어서 문을 열고 들어온 데카드에게 자고 있었던 마수들이 달려왔다.
“마수왕님! 별일 없으세요? 갑자기 짹짹이가 깨우길래!”
“어. 괜찮아.”
“마수왕님? 기분 안 좋아 보인다!”
티이라가 데카드의 표정을 보고 단번에 알아맞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별일 아니야.”
데카드는 싱긋 웃어보이곤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뉘이자 아직 잘 때가 아니라는 듯 배꼽시계가 울려댔다.
꼬르륵-
이 놈은 제 주인 기분도 모르는지 자기주장만 열심히 펼치는 중이었다.
[밥은 드시고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낫겠네.”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먹으면 기분이 좀 풀리지 않겠는가.
데카드는 다시 계단을 내려와 웬만한 집의 거실보다 넓은 주방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는 창고만 한 냉장고.
문을 열자 시원한 냉기가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사라졌다.
“어디 먹을 거 없나.”
“데카드?”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와중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 큰 프라이팬을 들고 살짝 홍조를 띠고 있는 엘리스가 보였다.
“파스타…… 같이 드실래요?”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