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마탑 잠입
“엘리스.”
“에……?”
아직 잠에서 덜 깬 엘리스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던 침을 훅 삼키며 일어섰다.
“조용히 하고 저길 보십쇼.”
아직 어두컴컴한 숲속.
그녀는 갑자기 들린 인기척에 불을 꺼버리고 숲 한쪽을 가리켰다.
“이게 웬 떡이야? 몬스터 시체가 많이 떨어져 있다니.”
“사냥꾼이라도 왔다 갔나?”
“닥치고 좀비나 만들고 있어. 나 오줌 누고 오게.”
산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세 남자의 목소리.
“흑마법사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숲 속에서 몬스터 시체나 들추고 다니는 걸로 보아 썩 강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근처에 또 다른 동료들이 있다면?
저들과 싸워서 이긴다 해도 유리한 상황은 아니게 된다.
“저들이 거슬리세요?”
트리스의 마음을 알아챈 엘리스.
“네. 매우 거슬립니다.”
하지만 자신이 마법사인 이상 조용한 암살은 불가능…….
암살?
트리스가 옆을 바라봤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진 후였다.
“어우, 너무 많아서 좀비로 만들기도 벅차네.”
“그래도 이런 일 자주 없다고. 지금 전력을 늘려놓지 않으면 또 다른 흑마법사놈들한테 빼앗길지 몰라.”
암흑시대의 흑마법사들은 동료이면서 경쟁 상대였기에 약육강식의 표본이었다.
“어쨌든 힘든 건 힘든 거지. 그렇지 않냐?”
흑마법사의 말은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다.
따라오는 대답이 없어 뻘쭘해진 흑마법사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라울?”
하지만 방금까지 있던 자신의 동료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야! 어딨어! 장난치지 말고 나와!”
몬스터의 습격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과 라울이 기척을 못 느꼈을 리 없다.
“뭐야?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아, 아니 라울이 사라졌어!”
“라울이?”
볼일을 보고 돌아온 다른 흑마법사는 갖고 있던 스켈레톤과 좀비들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달그락- 달그락-
우어어-
스켈레톤들의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와 좀비의 낮은 울음소리.
악몽에 나올 정도로 끔찍한 이 소리는 숲을 진동시켰다.
“산 자를 찾아라.”
흑마법사의 명령을 받은 언데드 군대가 산 자의 기운을 쫓기 시작했다.
그때 몇몇 좀비들이 나무를 손톱으로 긁었다.
“블랙 애로우!”
슈우욱-!
나무 위에 적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흑마법사가 검은 화살을 날렸다.
“커흑!”
따라 들어온 비명.
화살이 적중한 건 좋은 소식이었으나 목소리가 익숙했다.
털썩-
“라울!”
몸에 블랙 애로우로 인한 화살 구멍이 난 채 나무에서 떨어진 라울.
흑마법사들은 급하게 그의 시체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걸 노린 한 사람.
“다중 암살.”
나지막하고 아름다운 미성은 흑마법사들이 듣는 최후의 소리였다.
나무에서 떨어져 낙법과 함께 흑마법사들의 목 또한 바닥을 굴렀다.
“대단하군요.”
은신처에서 보고 있던 트리스는 마음 같아선 박수라도 크게 쳐주고 싶었다.
“근처에 동료는 없는 것 같았어요. 제가 죽인 셋이 끝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나서야겠군요.”
“네?”
은신처에서 나온 트리스가 양손에 뜨거운 불길을 만들어 모았다.
“파이어 미스트.”
촤아아아-
작은 불꽃 알갱이들이 하늘을 천천히 부유하다가 스켈레톤과 좀비들에게로 떨어졌다.
저들은 이제 흑마법사가 죽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보통의 시체에 불과하다.
좀비와 스켈레톤에 알갱이들이 하나둘 떨어지자 그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갔다.
“이제 편히 잠드십쇼.”
“수고하셨어요.”
트리스의 의도를 알아챈 엘리스도 옆에 다가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었다.
화장이 끝나고 불어온 거친 바람.
“저분들도 자유로워지겠죠?”
바람 사이사이 스며든 뼛가루는 참 자유로이 하늘을 날았다.
“그럴 겁니다.”
“이 시대에는 저런 사람들이 넘쳐났을 거예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암흑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마을 주변의 무덤을 비롯한 공동묘지들은 하나같이 텅 비게 되었다.
모두 흑마법사들이 언데드로 일으켰으니까.
“벌써 해가 뜨네요.”
비가 멈추고 물안개 낀 숲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네.”
* * *
[마수왕님! 보고 싶었어요!]
[팔찌를 찾아오셨군요!]
[…….]
[이제 돌아갈 수 있다! 집!]
“이제 내 거만 찾으면 되겠네.”
“그동안 찾아봤어?”
필립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탑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장관님의 마나를 기초로 해서 추적하려고 해봤는데 신호가 너무 미약해.”
팔찌는 분명 젠킨스의 마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물건에 담긴 힘이 연약한 탓에 추적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었다.
“결국 발로 뛰어야 해.”
“괜찮아. 내가 또 누구냐.”
“양아치?”
순간 이 원수 같은 놈을 두고 자신만 떠나버릴까 심히 고민되었다.
“아, 미안 미안.”
그 기세를 느낀 필립의 재빠른 사과 덕에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수들을 뿌려볼 테니까 일단 기다려 보자고.”
[그 방법이 가능하겠습니까?]
‘왜?’
짹짹이가 드물게 반대하자 데카드는 하던 소환을 멈추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법사. 그리고 주인님이 소환하실 마수들은 마나로 이루어진 생명체입니다. 갑자기 도시 곳곳에 외지인의 마나가 흩뿌려져 있으면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의심할 겁니다.]
‘맞는 말이야.’
마수들을 대량으로 소환해서 팔찌를 찾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나 동시에 여러모로 귀찮아지는 방법이다.
“흐음……. 마수 말고 다른 방법으로 팔찌를 찾아야겠다.”
필립에게 짹짹이가 말한 이유를 똑같이 설명해 주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그렇겠다. 그럼 정말 발로 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건가?”
“그건 아직 모르지.”
뒤쪽에 있던 필립은 보지 못했지만, 마수들은 데카드의 입가에 핀 음흉한 미소에 부르르 떨었다.
[또 어떤 계획을……!]
[이젠 무섭다!]
‘…….’
아니 사람 생긴 것 가지고 자꾸 그럴래?
라고 말하면 정말 찔리는 것 같으니까 이 말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모두들 내 말을 들어봐.”
그의 작전은 이러하다.
과거의 데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복을 받아 그가 마탑의 학생 신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3학년의 권한을 사용해 창고에 있는 마나 탐지기를 가져온다.
그 탐지기는 다른 이의 마나를 소량 넣으면 그것과 같은 마나를 찾아주는 기계다.
구식 기계이긴 하지만 얻기만 한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진다.
“좋은 작전이긴 한데 네가 쉽게 납득할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그는 다시 과거의 자신에게로 달려갔다.
“교복? 빌려줄 수 있지.”
“잠깐 휴가 간다고 생각해.”
“참내……. 이제 별 이상한 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데카드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덧붙여주었다.
“지금 이거 말고도 이상한 일은 잔뜩 일어날 거다.”
“설마 이것보다 이상하다고?”
미래의 자신이 나에게 교복을 빌려갔다.
과거의 데카드는 이것보다 더 이상한 일을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어쨌든 고맙고 어디 안 보이는 데 가서 쉬어!”
과거의 데카드와 현재의 데카드는 서로 옷을 바꿔 입은 후 다시 헤어졌다.
“그보다 머리는 어떡하지?”
과거의 자신은 장발이라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비슷하나 머리는 아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 같군요.]
[그냥 잘랐다고 하면 되지 않나요?]
조금 생각해 보니 어차피 머리 잘랐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가까이 갔다가 괜히 맞으면 어떡하나.
데카드는 안심하며 다시 필립에게 왔다.
“좀 까리한데?”
“교복이 작진 않네. 다행이야.”
마탑의 교복은 맞춤형이라 현재의 데카드는 내심 걱정했었다.
‘입었는데 안 맞으면 좀 부끄럽지.’
필립은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뭔가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다 발견된 한 가지 문제.
“네 얼굴.”
“너보단 잘생겼거든?”
“아니 그게 아니라!”
괜히 발끈한 필립은 화를 잠재우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과거의 너랑 분위기가 너무 달라. 지금은 뭐랄까…… 낮잠 자는 사자 같아.”
“확실히 그렇긴 해.”
과거의 데카드는 누구 하나 걸리면 잘근잘근 씹어줄 준비가 끝난 목줄 풀린 사냥개였다.
그러나 마수계에선 그럴 필요가 없어 나름 유순해지고 밝아졌다.
필립은 주머니에서 손거울 하나를 꺼냈다.
“이거 보고 표정 연습해 봐.”
그걸 받아든 데카드는 방금 봤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갑자기 하라고 하면 안 나올 것 같은데.”
“무조건 해야 해.”
“후우…… 알았어.”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다 잡았다.
난 지금 매우 화가 났다.
화가 났다.
근데 왜 화가 났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든 의문에 집중이 팍 깨져버리며 다시 평소의 데카드로 돌아와 버렸다.
“더럽게 힘드네.”
“뺨이라도 때려줄까?”
“……해봐.”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짝-!
청명한 소리가 지붕 위에 울려 퍼졌다.
“뭔가 감정이 들어간 느낌인데?”
그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필립을 노렸다.
“그, 그럴 리가.”
“어쨌든 살짝 화는 나네.”
표정이 굳어지고 눈매도 한층 매서워졌다.
“그럼 갔다 와. 가서 탐지기만 빼 오는 거다?”
“그래.”
지붕에서 내려온 데카드.
교복까지 입고 옛날 마탑 도시의 거리를 걷다 보니 정말 학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마탑의 정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진짜 오랜만이네.”
현재의 마탑과는 많이 다르다.
오직 이때의 마탑만이 품고 있던 또 다른 분위기.
“지금이 무슨 시간이더라?”
과거의 데카드는 지금 수업을 빼먹는 중이라 원래대로라면 속성 수업 중 하나인 얼음 속성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이다.
“한 번 들어가 볼까.”
[오오! 궁금하다!]
오랜만에 듣는 마탑의 수업.
데카드는 얼음 속성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강의실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창고야 수업 하나만 듣고 가도 늦지 않는다.
[문이 열립니다.]
수업 도중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에 교수는 말을 멈추고 학생들은 일제히 뒤를 쳐다보았다.
‘과거의 나는 아마 죄송하다는 말없이 그냥 빈자리에 앉았을 거야.’
데카드가 입을 꾹 닫고 자리에 앉자 교수는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다가 잠시 데카드의 이름을 불렀다.
“데카드 아르마다?”
갑자기 들어온 교수의 관심에 착실하게 수업을 들으려던 데카드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교수가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합니까?”
“아앗, 죄송합니다.”
정말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는지 교수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졌다.
“허헉……!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저 망나니가 사과도 할 줄 아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니라 아예 안 뜬 거 같은데?”
사과 한 번 했다고 나오는 참혹한 교수들과 학생들의 반응에 마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수왕님은 모범생이 아니었다!]
[흐응…… 사과 한 번으로 이런 반응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뭔가 대단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엄청 안 좋게 쌓인 이미지도 필요할 것 같고.]
오히려 당황한 교수는 헛기침하며 짐짓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았다.
“크흠…… 그럼 다시 수업을 시작하겠다.”
“드르릉…….”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같이 시작되는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마수왕님 잔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데카드는 유감없이 3학년 시절의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