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흑마법사와의 조우
“제길. 함정이 무슨 끝이 없군.”
유적 안을 걸어갈 때 마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함정은 꼭 티가 나는 함정과 완벽히 숨겨둔 함정이 짝을 이루고 있었다.
전자는 빠르게 찾을 수 있었으나 후자는 찾으려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함정이 가진 공격력이 만만치 않았다.
굳이 여기서 힘을 뺄 필요도 없으니 흑마법사들은 잠자코 함정을 해체하는 중이었다.
그럼으로 인해 당연히 이동 속도는 달팽이와 거북이 정도.
“젠장! 젠장!”
한스가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등장한 함정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이 빌어먹을 함정이 이동 속도를 늦추고 있다.
“함정 깐 새끼는 만나면 무조건 죽인다!!”
“조용히 좀 해라. 목소리가 울린다.”
한스를 제지한 쉬엔은 인내심도 좋게 함정 해체를 끝냈다.
그러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이 함정의 주인은 생각 외로 서클이 우리보다 낮을 것이다.”
“엉? 근데 이렇게 발견하기가 어렵다고?”
“단순한 은밀함의 정도가 기괴할 뿐 공격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
크론은 방금 해체된 함정으로 다가가 마나의 잔재를 손가락으로 스윽 쓸어보았다.
“……역겨울 정도로 순수하군.”
너무 순수하고 퓨어한 것을 보게 되면 사람은 반대로 역겨움을 느낀다고 한다.
크론에겐 방금이 딱 그 순간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깨끗함에 토악질이 올라왔다.
“어쨌든 남은 건 전진밖에 없다.”
“네가 그때 방향을 꺾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탈출했을 텐데 말이야?”
“크흠…… 지나간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는군.”
“시간 어쩌고 하던 놈이 미로에서 길을 잃어?”
쉬엔은 더 이상 한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며 뒷짐을 지고 앞장을 섰다.
흑마법사들이 있는 미로를 넘고 함정을 두어 개 넘으면 지금 부원들과 트리스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
트리스와 부원들은 현재 저 반대편으로 지나가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중이었다.
“일단 저 구멍에서 뭐가 나오는지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커다란 구멍에선 두껍고 사람만 한 도끼날이 떨어진다.
작은 구멍에선 뭐가 쏟아질까?
독극물? 화살? 창?
뭐가 됐든 기분 좋은 것은 아니리라.
“흐음…… 부장님처럼 마수를 미끼로 쓰면 편할 텐데…….”
데카드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일 때 마수를 던져보고 그 파훼법을 마련해냈다.
하지만 지금 데카드는 유물을 얻기 위해 부재중.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해야겠군요.”
“도박이요?”
엘리스가 묻고 다른 부원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트리스를 쳐다봤다.
“일단 제가 먼저 건너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지나갈 수 있게 다리를 놓아주십쇼. 저는 몸에 베리어를 두르겠습니다.”
“자신의 몸을 미끼로 쓰시겠다는 거예요?”
“짧게 줄여 말하면 그렇게 되는군요.”
뭐가 나올지 모르니 여기서 제일 강한 트리스가 자진한 것이다.
다른 부원들은 머리론 이해하고 있으나 위험한 일을 트리스에게만 떠맡기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가 제일 함정에서 살 확률이 높으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미안하면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서 보답하십쇼.”
트리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바닥.
“흐읍!”
다시 한번 아스카의 조형 다리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강도에 특히 신경을 썼기에 저번처럼 속절없이 부서지진 않을 것이다.
덜컥-
곧 구멍이 열리고 도끼날이 떨어져 내렸다.
여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
탁-! 탁-! 탁-!
트리스는 뛰었다.
부서져 가는 다리를 밟고 최대한 달렸다.
부서지는 파편을 밟으면서 달리는 와중에도 극도의 집중력을 짜내 발동시킨 아케인 베리어.
트리스의 유일한 구명조끼라고 할 수 있다.
“도와줘!”
“알겠다.”
아스카와 카론은 트리스가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만들어 발밑에 붙여주었다.
그 타이밍을 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그걸 밟고 지나가는 트리스는 자신들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작은 구멍이 열립니다!”
고드윈이 외친 대로 벽면에서 작은 구멍들이 촤라락 하고 열렸다.
피융-!! 탱-! 탱탱-!
그곳에선 화살들과 창, 사슬낫 등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냉병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마나도 담지 않은 무기로는 트리스의 베리어를 뚫을 수 없었다.
“무기에 독들이…….”
날아오는 냉병기에 심상치 않은 독들이 발라져 있는지 베리어가 치익 하고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지금 트리스의 꼴이 딱 그러했다.
“후우…… 건넜습니다.”
다행히 베리어에 큰 구멍이 뚫리기 전에 건널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데카드가 가고 있을 이 앞쪽으로 달려가 그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선배는 무사하시겠죠?”
트리스는 작게나마 그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 * *
“드디어 손에 넣었어.”
유물을 잡고 재빨리 아공간 주머니 안에 쑤욱 넣어버리자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도 사라졌다.
드디어 숨쉬기가 편해진 데카드는 바닥에 드러누우며 땀범벅이 된 몸을 식혔다.
분명 유적 안은 시원하고 오히려 시리기까지 한데 자신만 지금 폭염의 날씨였다.
“여기도 나가는 길이 없나?”
유물이 있는 방에 나가는 길도 하나 더 만들어두면 좋을텐데 꼭 입구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아주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다.
10분 동안 누워서 땀을 말리고 체력을 회복한 데카드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주인님.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아서 말씀드리는 걸 미루고 있었는데 흑마법사들이 모래 병사의 함정을 깨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네.”
함정의 수가 부족했던 걸까?
지금쯤 미로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흑마법사들이 벌써 모래 병사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나.”
데카드는 헤이스트를 사용해 아까 독충이 있던 방까지 순식간에 내달렸다.
그곳에는 이미 건너온 트리스와 이제 막 건너오려는 준비를 마친 엘리스, 부원들이 보였다.
“서, 선배?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나한테는 엄청 긴 시간이었다고.”
데카드가 트리스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고 건너편에 있던 아스카가 외쳤다.
“유물은 찾으셨어요?”
“여기 안에 있다!”
데카드는 트로피를 받듯 아공간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그에 딸려오는 부원들의 감탄과 함성.
“오오오!”
“대단하십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
이런 기쁨도 잠시 데카드는 찬물을 끼얹었다.
“흑마법사가 가까이 있어. 지금 모래 병사들이 있는 쪽에 있지.”
“아아…….”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겠군요.”
엘리스는 단검의 날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지금은 아직 모래 병사를 상대하고 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그놈들은 아직 병사의 파훼법을 찾지 못했을 거야.”
“병사를 방패막이로 쓰면서 싸우자는 뜻. 맞습니까?”
“정확해.”
데카드의 기발한 의견에 모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럼 빨리 가자.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데카드는 트리스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순식간에 들어올렸다.
펄럭-!
그리고 짹짹이의 날개를 펼쳐 함정들이 날아오기도 전에 반대편으로 도착.
한 마디로 순식간이었다.
잠깐 전력을 다해서 날면 이런 속도도 가능했다.
5서클로 올라가면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이리라.
“조심스럽게 걷고 마나룸도 닫아버려.”
상대가 이쪽의 위치를 다 알아버리면 기습의 의미가 사라진다.
모래 병사의 함정으로 점점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자 기합 소리와 더러운 흑마력이 느껴졌다.
“크하핫! 이놈들 패는 맛이 있군!”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파훼법만 찾으면 이놈들은 금방이다!”
지금은 한스가 먼저 도전하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뒷짐 지고 불구경 중이었다.
아직 이쪽의 위치를 알아채지는 못한 듯 일행이 있는 곳으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늦지 않았어.”
데카드는 막사에서 짠 작전들을 부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짧은 틈 사이가 저희에겐 골든타임이군요.”
“맞습니다.”
“그럼 시작한다.”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다.
짧고 간결하게.
흑마법사를 쳐부수고 모두 다 같이 루비아로 돌아간다.
“그림자 호수, 그림자 커튼.”
그림자 호수.
바닥으로 그림자를 넓게 펴서 그 일대를 잠식하는 기술.
그림자 커튼.
허공을 그림자로 채워서 햇빛 같은 그림자의 방해 요소들을 지워주는 기술.
이 두 가지의 기술을 순간적으로 융합하면 세상은 갑작스럽게 암전 상태로 바뀐다.
사람이 어둠에 눈이 적응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적응에 걸리는 시간인 몇 분.
이런 고서클 흑마법사들에겐 몇 초.
엘리스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지금 이 몇 초 안에 승부를 걸었다.
‘최대한 수를 줄인다……!’
지금 자신의 공격이 완벽할수록 죽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확률이 천정부지로 늘어난다.
엘리스는 그림자에 몸을 녹여내며 순식간에 뒤로 돌아 흑마법사의 지척까지 왔다.
‘됐다……!’
단검의 날이 흑마법사 하나의 목을 날리려는 순간 표적이 갑작스럽게 목을 틀었다.
슈와아악-!
그 탓에 완전히 베지 못하고 절반 정도만 날아간 목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고서클 흑마법사에겐 경상.
“간지럽네.”
목이 베일 뻔한 흑마법사는 바늘을 허공에서 움직여 잘린 부분을 꿰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어둠으로 주변이 물들었으나 모래 병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스는 순간 보이지 않는 시야에 병사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다.
“일단 저 바보는 내버려두고…… 아까 함정을 깔았던 놈이로군.”
어둠의 마나를 파악안 쉬엔과 크론은 서로의 등을 맞대서 사각지대를 없앴다.
그들은 기감을 펼쳐 적의 수를 알아냈다.
마법을 준비 중인 듯 마나를 가감 없이 뿜어내는 중이었고 유일하게 파악 안 되는 것은 바로 이 어둠의 주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마법을 펼치고 있으면서 가장 티가 안 났다.
화르르르르르-!!
“여덟 시 방향.”
“알고 있다.”
백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덩이가 흑마법사들에게 작렬했다.
그 새하얀 불꽃에 잠깐 흑마법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오…… 백염?”
“꼭 저놈은 살려서 해부해야겠어.”
백염을 자신들이 막는 사이 공격자의 마나는 다시 자취를 감췄다.
필시 이 어둠 속에서 위치를 바꿔 공격의 방향을 어지럽게 하려는 거겠지.
“대충 하나 날려볼까.”
크론은 마나가 느껴지는 곳으로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칠흑 화살을 쏘았다.
피융-
어둠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날아간 칠흑 화살은 아스카의 다리 옆에 텅 하고 꽂혔다.
“…….”
순간 놀람의 비명이 터질 뻔한 아스카는 자신의 입을 겨우 틀어막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의 마법 전조를 전혀 느낄 수 없어 방어 마법을 제때 펼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둠 마법을 지우면 상대가 언제 마법을 쓰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
즉석 저주는 상대를 육안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하기에 그들의 장기 중 하나인 저주가 지금 막혀있는 상태였다.
마법 준비를 끝낸 아스카가 얼음 창들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게 했다.
하나만 제대로 맞더라도 뼈에 골수까지 스며들 차가운 냉기가 가득한 창이다.
“쳇, 또 빠지는군.”
흑마법사들은 얼음 창을 던지고 또 사라진 공격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지금까진 잘 되고 있어.’
유효타는 많지 않으나 다행히 작전은 잘 먹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여유로움이 언제까지 갈까?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