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쇼핑
엘리스는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해보는 거야!’
지금은 임무 중이라 어차피 뭐라 할 사람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다.
당장 옆에 있는 트리스만 봐도 자신의 욕망을 마구 배출 중인데 자신이라고 못 할 게 뭔가.
엘리스의 왼손이 조금씩 움직이며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데카드의 손을 잡았다.
이 정도는 아까도 했기에 별 다른 점이 없었으나 엘리스가 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부터다.
‘여기서 손을…….’
데카드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껴서 서로 꽈악 잡게 만들자 정말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 정도 스킨십에도 엘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데카드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데카 님! 저희 보석 상점 가기 전에 저기 비단부터 살까요?”
“으음! 아주 좋은 생각이구나!”
아예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에 트리스의 연기는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쪽이 깜빡 속을 것 같았다.
크게 떠들고 거리마다 물건을 족족
사들이는 탓에 점점 사람들이 자신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스도 행복감을 느끼다 말고 골목이나 옥상에서 느껴지는 눈빛에 암살자의 감각이 곤두섰다.
“데카드, 누군가가 뒤를 밟고 있어요.”
조용히 그의 귀에 다가가 방금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하자 데카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할 말을 마친 엘리스는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기 전에 여기 귀 근처까지 다시 올 일이 없을까 봐 조금 고민했다.
짧은 고민 사이에 할까 말까 하는 생각이 수백 번 왔다 갔다 했다.
“죄, 죄송해요.”
엘리스는 그의 목에다가 입술 자국을 남겼다.
아스카가 화장할 때 립스틱을 진한 걸로 발라줬기에 엘리스의 입술 자국이 형형하게 남았다.
물론 지금은 어떤 육체적 접촉을 해도 임무라는 경계 안에서 전부 허용되었기에 데카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딸랑-
비단 가게에 문을 열고 셋이 들어왔다.
가게 안에서도 계속 붙어 다닐 수는 없으니 둘은 아쉽다는 눈치를 보이며 그에게서 잠시 떨어졌다.
“어이구! 어서 오십쇼! 손님! 어떤 비단을 찾으십니까?”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문의 대부호라는 사실을 알아챈 가게 주인은 양손을 파리처럼 비비며 대접했다.
데카드는 가게를 스윽 둘러보았다.
“여기서 괜찮은 비단을 팔고 있다던데.”
“네네! 맞습니다! 저희가 단연 최고 수준의 제품을 자랑하지요!”
“그런가?”
데카드는 별 관심 없다는 투로 말을 하다가 검지를 들어 가게에 있는 비단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주게.”
“그…… 죄송합니다만,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답하게 하는군.”
“죄, 죄송합니다!”
데카드는 조금 더 쉽게 말하기 위해 검지로 가게 전반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거 다 주게.”
“……?”
가게 주인은 ‘지금 자신이 뭘 들은 거지’라는 표정과 함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주인은 내버려두고 데카드는 자신의 할 말만 했다.
“곧 내 비서가 올 거야. 그에게 포장한 비단을 전부 넘겨주라고. 계산은 먼저 하지.”
데카드는 자신의 카드를 내밀려다가 누군가에게 막혔다.
뒤에서 느껴지는 포옹에 누군가 하고 봤더니 트리스였다.
“선배, 여기서는 제 카드를 쓰죠.”
“됐어. 그냥 내가 쓸게.”
“계속 그러시면 안 놔드릴 거예요?”
둘은 매우 작은 소리로 대화하고 있어 가게 주인에게는 입을 달싹이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 남의 가게에서 대놓고 펼치는 애정 행각에 가게 주인은 자신이 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카운터로 들어갔다.
“후우…… 알았어. 네 카드로 할게.”
“좋은 선택이에요. 그리고 이건 저도 하나 남겨야겠네요.”
“뭘?”
트리스는 데카드의 목을 잠시 옆으로 꺾었다.
그 모습은 마치 뱀파이어가 사람의 목을 물어뜯을 때와도 비슷했는데, 앞으로 트리스가 할 행동은 그것이 아니었다.
쪽-
[이것들이 쌍으로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좀 참아라! 참아! 지금 임무 중이지 않느냐!]
[그래, 그래!]
[…….]
엘리스의 입술 자국 옆에 트리스의 입술 자국 또한 새겨졌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데카드를 놓아준 트리스는 훗 하며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쳇.”
엘리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틀었고 데카드는 트리스의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갔다.
잠시간 둘이 눈을 부딪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데카드는 자신의 카드로 바꿔치기한 후 계산을 완료했다.
슬레이에서 부자로 유명한 바이퍼 보스의 재산을 전부 털었으니 사실 이 정도 사치는 별 티도 안 났다.
계산을 마치고 셋은 다시 가게를 나왔다.
다시 아까처럼 꼭 붙으며 거리를 걷던 중 저기 보석 가게 간판이 보였다.
“어머! 데카 님! 저기 보석 가게가 있어요!”
“빨리 가자!”
애교가 잔뜩 섞인 이런 트리스의 목소리면 어떤 남자라도 당장 보석 가게로 달려갈 것이다.
보석 가게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그 빛에 비치는 보석의 반짝거림 때문에 눈을 다 뜨기가 힘들었다.
“마음껏 고르거라!”
“와아! 데카 님! 너무 멋져요!”
“고마워요! 데카 님!”
두 여자들이 가게 안을 활보하며 자신에게 맞는 보석을 찾고 있을 때 데카드는 잠시 가게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짹짹아.’
[걱정하실 만큼 미행이 많이 붙어있진 않습니다. 그들이 검은 전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소문은 확실히 잘 퍼져 나가고 있는 것 같군요.]
짹짹이는 데카드의 걱정을 한 번에 알아맞히며 뒤를 따라오는 이들에 대해 말했다.
‘고드윈은 어때?’
[그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재 코끼리가 끄는 마차를 이끌고 주인님이 결제를 끝낸 비단 가게로 가는 중이지요.]
짹짹이가 비단 가게로 가라고 알려주었기에 고드윈은 그쪽으로 코끼리를 이끌며 가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즐기기만 하고 있는데 고드윈은 땡볕에서 열심히 일만 하고 있었다.
사실 가장 힘든 역할은 비서가 아니었을까.
잠시 이런 당장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에 엘리스가 다가왔다.
“저…… 어때요?”
푸른색 계통의 사파이어들로 무장한 엘리스는 보석이 그 외모를 한층 빛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보석을 차면 보통 그쪽으로 눈이 가기 마련인데 엘리스가 착용하니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예쁘네.”
“헤헤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웃은 엘리스는 발을 베베 꼬았다.
“저도 다 골랐어요! 데카님!”
엘리스가 사파이어라면 트리스는 루비.
그 선홍빛 색깔의 보석들이 트리스의 이미지와 맞물려 더욱 강한 인상을 주었다.
불타는 듯한 보석은 트리스의 적발과 비슷했으며 금을 더 추가해 화려함을 더 했다.
“트리스도 예쁘네.”
“후훗.”
다 고른 것 같자 데카드는 계산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 얼마인가?”
“지금 아가씨들이 착용한 보석의 값은…….”
“아니 아니.”
계산기를 두드리던 종업원의 손을 멈춘 데카드는 다시 한 번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다’ 얼마인가.”
“다…… 말씀이십니까?”
“그래.”
“허허허…….”
힘없이 너털웃음을 뱉은 종업원을 뒤로하고 계산을 마친 셋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하루 종일 쇼핑만 하다 보니 허리가 다 뻐근하다.
이제는 벌써 해가 지고 있기 때문에 드디어 쉴 수 있게 됐다.
“주변에 괜찮은 호텔이나 그런 데 없나?”
돈을 흥청망청 쓰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웬만한 숙소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큰 호텔에 묵어 줘야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갈 것이다.
“아직 잠을 잘 곳이 없으시다면 제가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뒤에서 데카드 못지않게 비싸 보이는 것들로 몸을 치장한 남자가 셋을 멈춰 세웠다.
“누구시죠?”
“하핫. 저는 이곳 샤릴마에 있는 호텔 중 가장 커다란 헤라 호텔의 주인인 스웬이라고 합니다.”
“데카입니다. 상단을 운영하고 있죠.”
간단한 통성명을 마친 둘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스캔에 들어갔다.
아주 잠깐 눈동자를 흔드는 것으로 상대에 대한 정보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 작업에는 1초가 채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지금 저 스웬이라는 남자가 입고 있는 옷.
한눈에 봐도 보통 가격이 아닌 것 같다.
‘호텔 주인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군.’
그런 데카드의 의심을 눈치챈 스웬이 자신의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하면 같이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제가 데카 님과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어서 그럽니다.”
“저야 나쁠 게 없죠.”
비싼 물품을 족족
사들이고 있다는 신흥 대부호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데 잠깐은 어울려줘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셋은 작은 오두막만 한 마차에 올라탔다.
다그닥 다그닥-
말들이 투레질과 함께 호텔로 출발하고 스웬은 잠시 엘리스와 트리스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주 아름다운 여성분들을 대동하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이곳 출신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저 또한 이곳 출신이 아니지요. 제 고향에서 데려왔습니다.”
스웬의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 데카드는 망나니의 모습을 더 강조하기 위해 옆에 있는 둘을 더욱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잠깐 놀란 표정을 지은 두 명은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들이 더 달라붙었다.
“후훗. 데카 님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군요.”
호텔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짧은 잡담 몇 번에 도착할 정도면 말이다.
내려서 본 헤라 호텔은 가장 커다랗다는 스웬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아사이드에서 묵었던 호텔과 비견될 만큼 커다란 헤라 호텔은 그 끝을 보려면 목을 한계까지 꺾어야 했다.
“들어가시죠.”
스웬이 호텔 입구에 가까워지자 안에 있던 직원 모두가 나와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호텔 주인이라기엔 생각보다 나이가 젊어 보여서 의심했는데 정말 호텔 주인이 맞았다.
스웬을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간 셋은 밤이라 쌀쌀해진 바깥과 다르게 급격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 처리가 되어 있군.’
이런 거대한 건물에 전부 온열 마법 처리를 하려면 돈이 보통 깨지는 게 아니었다.
“혹시 저녁 드셨습니까? 안 드셨다면 제가 대접하고 싶군요.”
“오늘은 밤도 늦었고 저녁은 딱히 생각이 없으니 사양하겠습니다.”
“아쉽군요. 그럼 방은 제가 최고급으로 잡아 드릴 테니 올라가서 쉬쉽쇼.”
“호의에 감사합니다.”
데카드는 호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면서 보이는 스웬의 얼굴에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진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점점 올라가다가 최상층에서 멈췄고 방은 최고급이라는 스웬의 말처럼 아름답고 샤릴마의 성격이 묻어났다.
아사이드와는 또 다른 매력의 방에 데카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뭐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호텔이니까 냉장고에서 적당히 아무거나 꺼내 먹으면 되겠지.’
[오오! 마수왕님! 똑똑하다!]
저녁 한 번 좋은 거 먹자고 능구렁이 백 마리는 삼킨 것 같은 스웬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머리만 피곤해질 뿐.
‘고드윈은 지금 뭐 하고 있어?’
[저의 안내를 따라 코끼리와 마차를 끌고 보석 상점에서 물건을 받는 중입니다.]
‘끝나면 이쪽으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 거하게 일을 벌여놨으니 검은 전갈도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똑똑-
이제 원래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려던 그때, 방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룸서비스입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