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계획과 역할
레오의 검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휘둘렀지만 칼날이 멈추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검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헤엄치는 한 마리의 상어처럼 허공을 유려하게 움직여 나갔다.
“와아…….”
그 모습에 벨린다는 감탄을 감추지 못하며 자연스레 입을 벌렸다.
10분 동안 레오가 쉼 없이 검을 휘둘렀을 때 벨린다도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후웅-! 훙-!
그러고는 레오처럼 검을 휘두르며 엉거주춤,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잔동작도 많고 군더더기가 많이 붙어있어 깔끔하지 못한 동작.
딱 그 정도 수준이었고 벨린다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레오는 옆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조금씩 교정해 주며 전체적인 움직임을 보았다.
자신의 검술은 하나의 나무가 아닌 숲이 제일 중요하다.
완벽히 흐름에 넣을 수 없는 소는 과감히 버리고 상대의 대를 소로 만들어버릴 만큼의 대를 만들어야 한다.
이 끊이지 않은 칼날의 움직임은 그것의 시작이다.
벨린다의 칼날은 확실히 끊이지 않고 다음 동작으로 잘 이어졌으나 그건 마치 기계가 입력된 다음 동작을 실시하는 것 같았다.
“하아…….”
자신의 딱딱한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머릿속에서 일전에 레오와 대결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레오의 모습은 정말 빛 그 자체.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
벨린다는 잠시 검을 멈추고 편안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자신의 깨달음을 검 속에 녹여내었다.
‘정해진 초식은 없어. 오직 이 흐름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는 거야.’
파도는 계속 일렁이며 자신만의 흐름을 갖는다.
개구리도 일정한 시간에 한 번씩 울며 자신만의 흐름을 갖는다.
일상적인 곳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 흐름을 이해만 한다면 검으로 표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
벨린다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살짝 떨어져 있던 레오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검에 담은 묘리를 이렇게 빨리 깨닫고 검으로 풀어낼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저 따라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인간 여자는 천재라는 소리가 아깝지 않았다.
벨린다는 그대로 검을 멈추지 않으면서 울타리 위에 올려진 물 잔을 칼날로 들어 올려 검신 위에 안착시켰다.
분명 물 잔 안에 물은 가득 들어있었음에도 그것은 찰랑거릴 뿐 단 한 방울도 바깥으로 나갈 기미가 없었다.
‘흐름을 만든다.’
벨린다는 수백 번은 했던 것 같은 이 과제를 오늘에서야 성공시키기 위해 하늘 높이 물 잔을 튕겨 올렸다.
태에엥-!
유리 물 잔이 검의 위력에 탄력을 받아 허공을 잠시간 날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린다의 검은 멈출 줄 몰랐고 하늘을 날다가 이제 떨어지기 시작한 물 잔은 상관없어 보였다.
물 잔은 점점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흐름을 담아낸 물 잔은 뒤틀리거나 떨지 않고 날렸던 그대로 평형을 유지했다.
물 잔이 가진 고유의 흐름.
이것을 지금 자신이 가진 거대한 흐름으로 삼킨다.
탁-
정직하게 뻗은 검 위에 조그마한 물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장시간 집중에 집중을 더한 탓에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도 몰랐다.
레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 행동에는 수고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위로의 의미도 있다.
지금도 무척이나 힘드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벨린다는 이 토닥임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짧은 감사 인사와 함께 검을 꽈악 부여잡았다.
“조금만 더 해볼…….”
다시 검을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으려던 찰나 무릎에 힘이 풀렸다.
털썩-
모래 위에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은 벨린다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 다리는 도저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매일매일 단련한 몸도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할 만큼 레오의 검술은 거대한 집중력으로 인한 근육의 피로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레오도 그것을 알기에 오늘은 더 다른 것을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저, 저 혼자 일어설 수 있어요.”
도리도리-
그럴 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레오가 가장 잘 안다.
그녀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한 번에 들어 올린 후,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살짝 붉어진 얼굴과 함께 레오의 품에서 내려오며 벨린다는 그의 눈을 피했다.
레오는 쉬라는 듯 침대를 톡톡 건드리고는 언제나처럼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 * *
아침이 되자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함께 부원들을 맞아준 건 근육통과 멍이었다.
“어으…….”
“눈이 안 떠져…….”
“나 여기 파스 좀 붙여줘라.”
카론이 내민 파스에 고드윈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디에 붙여야 하는데?”
“여기다.”
카론이 등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의 흉터투성이 등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는 사람이 다 아픈 느낌이었다.
파스의 차가운 느낌에 카론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더니, 천천히 가시는 고통에 다시 편안해졌다.
“너는 맞는 게 수련이야? 맨날 이렇게 맞고 다니냐.”
“그래도 실력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맞으면서 배우는 게 제일 빠르다고 했던가.
카론은 그 옛 격언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너도 멀쩡해 보이진 않다만.”
“나? 나도 미치긴 했지.”
고오른과 같이 수련하다 보면 어느 한 쪽이 타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타 죽는 쪽은 고드윈이 될 게 뻔했지만.
그리고 마법부 베이스캠프 중앙에 놓인 공용 캠프로 아스카가 들어왔다.
“어…… 다들 여기 있었네.”
“너도 딱히 다른 건 없군.”
“내가 뭐 다를 게 있겠어.”
평소 초하이 텐션의 아스카는 좀비처럼 냉장고로 걸어가 차디찬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리까지 띵해지는 감각에 한순간 돌아온 정신은 다시 그녀를 정상 상태로 돌려주었다.
“그런데 이 샤릴마 대사막까지 선생님들이 어떻게 오신 거지?”
“뭐 어떻게든 왔겠지. 대마법사급이던데.”
지금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서클을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펼치는 마법이나 숙련도를 보면 절대 낮지 않았다.
최소 대마법사라는 인정을 받을 만한 7서클!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선생님들의 서클이었다.
물론 지금은 소환사와 마수의 계약 관계로 있어 힘이 평준화되었기에 데카드의 서클에 맞춰 그들도 5서클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온 연륜이나 비법들이 그들을 원래 실력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부원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캠프의 문을 젖히고 엘리스, 트리스, 데카드가 들어왔다.
“다들 여기 있었네?”
“좋은 아침입니다.”
데카드와 트리스는 각각 인사를 하며 냉장고로 가 육포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다.
엘리스도 데카드가 준 육포를 받아들고 부원들이 앉아있는 소파로 와 아침을 나눠 주며 물었다.
“어제 수련은 어땠어? 아아…… 그렇구나.”
대답은 그들의 고단한 표정으로 대체되었다.
데카드와 트리스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의자를 끌어와 가까이 앉았다.
“일전에 봤던 검은 전갈, 기억하십니까?”
“네.”
“고드윈이 다 불태웠잖아요! 하핫!”
트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놈들은 잔가지에 불과할 뿐 뿌리는 땅 깊숙이 숨어있지요.”
“혹시 유물과 그놈들이 관련돼 있습니까?”
눈치 빠른 카론이 단번에 트리스의 저의를 알아차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샤릴마의 거래 조건 중에서 검은 전갈을 잡으면 가격을 십 분의 일가량 가격을 인하해 준다는군요.”
트리스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여 저희는 검은 전갈 두목의 목을 쳐서 자연스레 그들이 무너지게 만들 겁니다.”
“두목의 위치를 알고 계신가요?”
아스카의 물음에 트리스가 대답했다.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막에 숨은 두목을……?”
“그래서! 내가 계획을 짜왔지!”
갑자기 대화에 데카드가 끼어들며 가져온 샤릴마 대사막의 지도를 책상 위에 쫘악 폈다.
지도에는 무역 도시 샤릴마와 지금 일행이 있는 베이스캠프, 유적 등 지표라 할 만한 것들이 다 들어가 있었다.
“검은 전갈들은 보통 샤릴마를 막 나온 상단 마차나 여행자들에게서 돈을 뺏어.”
“저희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미끼가 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데카드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던 부원들은 다시 트리스에게 눈이 갔다.
“퇴마부장의 설명을 풀어서 얘기해 보자면 바로 이겁니다.”
일행은 대상단으로 변장할 것이다.
수레를 끄는 낙타들로 이루어진 긴 행렬.
또 그것을 지키는 호위 용병들.
검은 전갈의 보스라는 대어가 나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매력적인 미끼가 되는 것이다.
호위 병력이 충분해야 일반 부하들로는 그 행렬을 뺏을 수 없다는 위세를 주면서 또 너무 어렵다는 느낌은 주면 안 된다.
이것에서부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고 수레 안에는 값비싼 물건들로 채워 넣는다.
그 과정은 매우 유난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소문을 막 퍼뜨리고 상단주가 조심성 없다는 것이 샤릴마에 있는 검은 전갈의 피라미에게도 들어가도록 시끌벅적하게 이동한다.
행렬이 완성되고 대사막을 횡단하다 보면 미끼를 문 검은 전갈과 대적.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승리한 후 두목의 목까지 딴다.
“도박이긴 한데 난 확률이 높다고 본다!”
일행이 얼마나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성공률은 천장에 닿을 만큼 높아진다.
“가능성이 보이네요!”
“저는 찬성입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부원들 모두가 찬성표를 던졌고 그렇다면 이제 역할을 정해야 했다.
“조심성 없는 상단주. 이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지원자 있습니까?”
방탕하고 조심성이란 없으며 여자를 밝히는, 말 그대로 망나니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에 난이도가 무척이나 높았다.
하지만 이 조건들을 모두 아슬아슬하게 충족하며 정작 자신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자 데카드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퇴마부장이 하면 딱 맞겠군요.”
“그렇네요.”
“역시 부장님이십니다.”
상단주는 그렇게 데카드가 맡기로 하고 두 번째로 어려운 역할을 정해야 했다.
“샤릴마에서 상단주가 품에 끼고 다닐 음탕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크흠…….”
꽤나 직설적인 트리스의 말에 다른 부원들이 헛기침을 했다.
“……그거 꼭 필요한 거냐?”
“당연합니다. 평소 저희가 보는 부패한 관리나 귀족을 보면 딱 알 수 있지요.”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없애기 위해 트리스는 완벽함을 주고 싶었다.
“그럼 그냥 샤릴마에서 적당한 사람 몇 명을 구하자.”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동시에 절대 반대를 외치며 박차고 일어난 엘리스와 트리스는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안 되는데?”
“외부인력을 받아들이면 그만큼 정보 유지가 힘들어집니다.”
“그런가?”
“당연하죠! 이 작전은 비밀이 생명이잖아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따라 쿵 짝이 잘 맞는 둘을 보며 데카드도 더 이상 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그 역할을 우리 중에서 누가 하게 되는 건가요?”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