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협상
저녁도 여느 때처럼 간단하게 캔 요리로 해결하자 유물 협상 시간인 아홉 시에 딱 맞춰졌다.
“저하고 퇴마부장이 다녀오겠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이기에 협상 자리에서는 암묵적으로 최소한의 인원들만 대동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마법부 쪽의 협상을 이끌어 갈 트리스와 경호원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데카드 정도.
이 두 명이 딱 적당했다.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세요.”
부원들의 안부 인사와 함께 데카드와 트리스는 유적과 가장 가까운 샤릴마의 협상 캠프로 이동했다.
캠프로 들어가기 직전, 트리스가 멈춰 서며 데카드에게 말했다.
“여기부터는 저만 들어갈 수 있어요. 선배는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괜찮아! 나 간이용 침대도 가져왔어.”
데카드는 이런 상황이 언젠가 생길 줄 알고 캠핑용으로 쓰는 간이용 침대를 가져왔다.
오래 걸린다 해도 그냥 자 버리면 그만이니 상관없었다.
“하핫,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잘하고 와.”
트리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데카드는 살짝 떨어진 곳에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간이용 침대를 꺼냈다.
촤악-!
손짓 한 번에 펴진 간이용 침대는 그 편리함이 대단했다.
“어이구, 좋다.”
다 늙은 할아버지 같은 추임새와 함께 침대에 누운 데카드는 다른 도시보다 유난히 더 밝게 보이는 사막의 별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쏟아질 듯 펼쳐진 은하수와 밤을 밝혀주는 조그마한 별들.
사막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드도 여기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저 별들 사이를 헤엄치듯 날고 있는 까마귀들이 흑마법사의 체취나 흔적을 찾는 중이었다.
‘아직 보이는 거 없어?’
[그렇습니다. 까마귀들을 조금 더 풀어볼까요?]
‘그 정도까진 안해도 돼.’
여기서 까마귀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면 데카드의 마나를 흑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이쪽이 별일 없으니 괜히 트리스의 쪽이 걱정되었다.
‘조용히 엿보고 싶은데.’
[방법이 있습니다.]
짹짹이는 까마귀 하나를 불러내더니 그 한 마리에 자신의 마나를 최대한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까마귀의 깃털이 점점 더 까맣게 변하며 눈을 부릅뜨지 않는 이상 초 근거리에 있어도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림자 은신.]
짹짹이의 명령과 기술을 받은 까마귀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더니 땅속으로 쏙 들어갔다.
정확히는 지면에 깔린 어둠 속으로.
참새 정도 크기의 까마귀는 어둠 속을 이동하며 트리스의 그림자로 들어갔다.
‘선배……?’
그 변동을 감지한 트리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전 준비가 모두 끝나자 짹짹이가 말했다.
[이제 저만 할 수 있었던 까마귀하고의 시야 공유를 5서클로 올라서면서 주인님도 하실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군.”
[오른쪽 눈을 잠시 감아주십쇼.]
짹짹이의 말대로 오른쪽 눈을 살짝 감자, 마나가 쑤욱 들어오면서 조금씩 신경을 잠식해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짹짹이의 말대로 눈을 뜨자 트리스의 그림자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까마귀의 시야로 협상 테이블이 보였다.
까마귀가 듣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이 전부 데카드에게로 들어왔다.
마수계에서도 몇 번 해보았던 이 기술은 인간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좋아, 딱 맞춰온 것 같네.”
영화관에서 광고는 다 지나치고 영화 시간에 딱 맞춰온 것처럼 협상 테이블에서는 서론이 다 끝나고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샤릴마는 저번부터 얘기했듯 백금화 만 개를 원합니다.”
“크흠…….”
“백금화 만 개라니…….”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숨이 턱 막혀오는 금액에 몇몇 작은 왕국이나 세력들은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커다란 제국이나 다른 무역 도시의 영주들은 그렇게 절망한 표정은 아니었다.
백금화 만 개는 자신들의 사비까지 다 털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금고를 다 내바치면서까지 유물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저희가 파격적으로 값을 깎아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세력들에겐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소식이었다.
이 조건은 몇 차례 이어진 협상 시간에서도 처음 말하는 것인 듯 모두의 이목이 샤릴마 협상가의 입에 집중되었다.
“바로 저희 샤릴마 근처 대사막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검은 전갈’들을 깡그리 죽이는 겁니다. 그럼 저희는 백금화 천 개로 유적과 유물을 내드리도록 하지요.”무려 십분의 일로 가격이 깎여나갔지만, 그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방금 검은 전갈이라고 그러셨소?”
“그렇습니다.”
검은 전갈은 아까도 만났었던 거대 전갈을 타고 다니는 사막의 도적 집단.
어쩌면 이 사막에 살고 있는 전갈보다 검은 전갈들의 수가 더 많다는 소리가 있을 만큼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어딘가에는 남아있었다.
“밑에 잔챙이들만 죽이는 것으론 어림도 없을거고…… 그 대장을 죽여야겠구려.”
한 협상가의 말에 샤릴마 협상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검은 전갈의 대장은 전설적인 도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시 하나를 털은 전적이 있다.
그가 몸을 숨기면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얘기도 있고 마법사들도 그를 찾다가 포기한 적이 많았다.
“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이것이 저희 샤릴마에서 제시하는 최소 조건입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트리스는 가만히 손가락 사이에 동전을 굴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우리의 전력으로 검은 전갈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가능할까.’
검은 전갈 전체와 사막 한가운데에서 맞붙게 된다면 마법 하나로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검은 전갈에 대해 조금 알아본바, 그들은 한꺼번에 모여 다니지 않고 점조직의 형태로 사막 전역에서 활동한다.
무수한 점조직 중 하나에 대장이 있다.
머리만 부숴주면 밑에 것들은 자연히 부서지기 마련.
결국 문제는 추적이다.
그냥 돈을 낼까도 생각해 봤지만 마법부는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한 공공 기관.
그렇게 큰돈을 축적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트리스라도 이런 큰돈을 마법부의 입장으로 덥석덥석 낼 수가 없다.
“검은 전갈의 보스를 잡으면 일이 쉬워진다는 거네.”
그리고 편한 간이용 침대에 누워서 협상의 모든 얘기를 듣고 있던 데카드는 방법을 구상해 보았다.
어떻게 해야 꼭꼭 숨어있는 전갈을 잡을 수 있을까.
솔직히 추적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샤릴마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사막은 전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대사막.
이곳을 집으로 삼은 이들을 추적해서 죽이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잘하면 가능하려나.”
데카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방법에 살을 붙여가며 다시 협상에 집중했다.
“백금화 오천 개는 어떻소. 여기서 당신이 수락하면 우리 왕국은 지체 없이 값을 지불하겠소.”
“절대 안 됩니다. 샤릴마는 백금화 만 개 혹은 검은 전갈의 소탕 시 백금화 천 개. 더 이상 조건의 변동은 없습니다.”
“고집불통이시군.”
“저는 영주님의 말씀을 전할 뿐, 저의 의지는 아닙니다.”
이렇게 달라지지 않는 줄다리기만 계속 이어가던 중 어느새 협상 시간의 끝이 다가왔다.
샤릴마의 협상가는 이제 금일 협상의 끝을 알리려다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트리스를 보며 말했다.
“오늘 총장님은 처음 오셨는데 따로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그 물음에 트리스가 샤릴마 협상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호박색 눈을 결국 피한 협상가는 자신이 질문해 놓고 주눅이 들었다.
“저는 오늘 그저 테이블의 분위기를 알아보러 왔을 뿐 수확을 하러 오지는 않았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오늘 협상은 여기서 마칩니다.”
샤릴마의 협상가가 제일 먼저 캠프 바깥으로 나갔다.
다른 협상가들은 꼭 한 명의 군왕과도 같은 기세를 내뿜는 트리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트리스는 그런 시선에는 조금의 신경도 두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데카드에게 갔다.
그녀의 그림자에 들어갔던 까마귀는 다시 짹짹이에게 돌아왔고 데카드는 잠깐 하는 사이에 또 자고 있었다.
[주인님, 일어나십쇼.]
“응……? 나 안 잤어…….”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데카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바로 옆에 있는 트리스가 보였다.
사막의 바람이 조금씩 불 때마다 그녀의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사라졌다.
“왜 안 깨웠어?”
“선배가 너무 잘 자고 있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요.”
데카드는 기지개를 쭉 켜고 일어나 긴이용 침대를 다시 접어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협상 캠프에서 다시 마법부의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길에 트리스는 조금씩 데카드의 옆으로 붙었다.
“협상 내용은 다 들으셨죠?”
“어. 검은 전갈을 전부 치워버리면 되는 거라며?”
“맞아요. 생각나는 방법 있으세요?”
“하나 있긴 한데…….”
워낙 도박성이 짙은 방법이라 먹힐진 모르겠다.
지금까지 구상해 둔 방법을 트리스에게 말해 주자 그녀가 눈을 빛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방법이네요. 역시 선배예요.”
“그래? 다행이네.”
“그 방법이면 돈도 절약할 수 있고 추적이라는 방법을 안 써도 되겠어요.”
트리스와 데카드가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있을 때는 부원들이 각자 수련을 하고 있었다.
고드윈은 사막의 모래를 백염으로 녹여내는 중이었고 아스카는 다시 멀린 가문의 마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벨린다는 다시 레오와의 일전을 떠올리며 검신으로 물 잔을 받아내고 있었다.
아직까지 물은 모래를 적셨지만, 그 양은 꾸준히 줄었다.
카론은 모래에 계속 정권을 날리며 주먹을 강화하고 강철 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
벨린다를 보고 있던 레오가 데카드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정말?’
끄덕끄덕-
데카드가 다시 한번 물어도 레오는 결심했다는 듯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알았어, 그럼 갔다 와.’
데카드의 배려에 레오는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 벨린다에게 갔다.
[마수왕님! 나도 카론!]
[저희도 갔다 오고 싶습니다!]
[아스카가 가르치는 맛이 있긴 했죠. 크흠…….]
레오가 밖으로 나가자 다른 마수들도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마수들이 전부 나가면 특별 선생님들이 외딴 사막까지 와 있는 셈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고 이상했다.
“에이 모르겠다. 너희 전부 갖다 와.”
마수들은 기쁨의 함성과 함께 모두 자신만의 제자들에게 달려갔다.
“서, 선생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네가 너무 못해서 내 눈이 다 버려졌다! 빨리 다시 해봐!”
갑작스럽게 나타난 특별 초빙 선생님들에 부원들은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마수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탓에 이상함도 못 느끼고 얼떨결에 가르침을 받았다.
“…….”
벨린다의 앞에 나타난 레오는 자신이 정립한 검술의 초식을 그녀의 앞에서 천천히 보여주었다.
달밤에 찬란히 빛나는 광검(光劍)은 그 잔상이 반딧불 수만 마리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흐헉……!”
어디 구석에서 카론이 두들겨 맞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벨린다의 신경은 오로지 레오의 움직임에 있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