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세 번째 유물
아침도 못 먹고 밤새 일만 하고 있었을 트리스를 위해 데카드와 엘리스는 간단한 즉석 음식들을 사서 그녀의 업무실로 올라갔다.
[문이 열립니다.]
휑하게 뚫려 있던 외벽도 이제 마감 공사를 하고 있어 업무실에선 약간의 페인트 냄새와 콘크리트 냄새가 풍겼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잠깐 눈을 붙이는 중인지 소파에 누워서 외투를 이불처럼 사용해 쿨쿨 자고 있는 트리스가 보였다.
두 명이 이렇게 아침부터 올 줄은 몰랐는지 트리스는 편지를 보내고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엄청 열심히 일하시나 봐요.”
“그러게 말이야.”
책상에는 다 먹은 에스프레소 잔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소파 팔걸이에 기댄 머리는 오랫동안 감지 못해 떡져 있었다.
곤히 자는 트리스를 굳이 깨우지 않고 두 명은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
“이제 멀쩡해요!”
트리스의 어나더 선에 당한 것치고는 가면의 힘 덕분인지 검은 오라로 직접적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정신이 날아갈 뻔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지만, 이 정도면 싼값이었다.
사제들 몇 명이 달라붙어 집중 치료를 반나절 동안 하고 푹 자자 엘리스는 금세 돌아왔다.
“으응…….”
옆에서 소곤대며 말하는 소리에 트리스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둘을 바라보았다.
“크흠…… 일찍 오셨네요.”
자신이 너무 곤히 자고 있었단 걸 깨달은 트리스는 머리를 빠르게 묶고 덮고 있던 외투를 걸쳤다.
살짝 곁눈질로 거울에 비춰본 자신의 몰골은 엉망이라 해도 좋았다.
오랜 밤샘 작업으로 인한 다크서클.
피부도 푸석푸석해졌고 머리는 떡이 졌으며 손톱도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
“지금은 꼴이 이상하지만 두 분을 부른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예요. 첫 번째 이유는…….”
트리스는 조금씩 뜸을 들이더니 엘리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크게 숙여 용서를 구했다.
“훨씬 더 일찍 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날 멈춰 줘서.”
이런 트리스의 모습에 엘리스는 너무 놀란 듯 어버버거리며 데카드의 눈치를 보았다.
데카드는 어려워할 것 없다는 듯 엘리스를 트리스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괘, 괜찮아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요.”
“감사합니다.”
트리스는 데카드를 제외한 타인에게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엘리스도 빙긋 웃더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드디어 둘이 가까워진 것 같네.’
역시 큰 사건이 하나 있어야 서로 우정도 돈독해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흐음…… 제 눈에는 뭔가 일시적인 동맹의 느낌으로 보입니다!]
[그러게요? 뭔가 묘한 투기가 서로를 공격하고 있어요.]
[그런가? 난 모르겠다!]
[…….]
마수들의 의견은 뒤로하고 어쨌든 둘은 전보다 친해진 것이 맞으니 데카드는 그것에서 만족했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야?”
“바로 설명 드릴게요.”
트리스는 서랍에서 수정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나를 살짝 흘려주자 수정구가 발광하면서 이미지 하나를 허공에다 크게 띄웠다.
“세계 지도네.”
“맞아요. 이걸 왜 보여드리냐면 세 번째 유물의 위치가 파악됐기 때문이에요.”
“유물…….”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사용자를 중독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가고 왕국 하나를 전복시킬 만한 힘을 가진 무서운 물건이다.
데카드는 대충 트리스가 왜 자신들에게 이런 걸 알려주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서 가져오라는 거구만.”
“정확해요.”
“그 험난했던 유적에서 또 유물을 가져와야 한다고요?”
엘리스는 고대의 함정과 알 수 없는 시험, 저주로 가득 찼던 유적을 떠올렸다.
까딱하다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공간이 바로 유적이었다.
“퇴마부와 제가 가서 저희처럼 유물을 노리는 자들을 떨치고 유적의 소유권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유물만이라도 저희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흑마법사도 있나 보지?”
“그럴 확률이 높죠.”
굳이 퇴마부를 임무에 포함시켰다는 건 흑마법사들이 유적과 가깝다는 신호였다.
“언제 출발해야 돼?”
“지금이요.”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전혀 없는 임무이긴 하다.
의무감보단 귀찮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지만, 유물이 관련돼 있다면 데카드도 함부로 뺄 수 없다.
“그래도 서로 준비할 시간은 어느 정도 필요하겠죠.”
트리스는 목욕할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녀는 일어나서 자신의 업무실에 배달된 상자를 들어 엘리스의 앞에 놓아 주었다.
“엘리스의 주문 제작한 무기입니다. 시험해 보고 계십쇼. 저는 샤워를 하고 오겠습니다.”
트리스는 쓸데없이 비장해지며 떡이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업무실 안에 있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헤헤헤.”
“그렇게 좋아?”
“네!”
이렇게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포장을 뜯는 경우는 엘리스가 새로운 단검을 받았을 때다.
심지어 이번에는 과학적 설비도 마친 블랭슘 소재의 단검 열 개.
투척용도 될 수 있고 직접 들고 싸울 수도 있는 다재다능한 단검들이다.
“와아!”
엘리스가 포장을 전부 뜯고 꺼내 본 단검은 회색 빛깔을 띤 무광의 날을 가지고 있었다.
암습의 특기를 살리기 위해 빛에 비치지 않는 무광을 선택한 브란의 솜씨가 돋보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날의 예기는 또 어찌나 날카로워 보이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길이도 제가 말한 딱 그 정도예요!”
엘리스는 단검들을 양손에 쥐고 한 번씩 휘둘러보며 금방 길이와 무게에 익숙해졌다.
강철 날보다 훨씬 가벼운 블랭슘 날은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전부 받아치거나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들게 했다.
“그거 한 번 해봐. 자동 회수 기능.”
“아! 맞다.”
브란에게 넣어달라고 한 자동 회수 기능은 단검을 던지고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게 만든 최신식 과학 기술이다.
엘리스는 단검 하나를 집고 벽면을 향해 던졌다.
쐐에엑-!!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던 단검은 엘리스가 설명서에 적힌 대로 단검 벨트에 버튼을 누르자 다시 휘리릭 돌아와 검 집에 꽂혔다.
“진짜 신기해요!”
옛날 말단 암살자로 활동했을 때는 단검 살 돈도 부족해 시체에 박힌 단검들을 하나하나 뽑으면서 활동했다.
그러다 보면 이는 다 나가 있고 피로 인해 철은 부식되어 무 하나 자를 수 없게 돼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피가 묻는다 해도 부식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가면의 힘을 사용했을 때 이 단검을 던지면 어떻게 될지도 매우 궁금했다.
건물의 벽도 두어 개는 한 번에 부술 정도로 강력한 힘이 나올 것이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놀고 있는 엘리스를 흐뭇하게 보고 있던 데카드는 샤워실에서 들린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슈우우우-
안에 서려 있던 수증기와 김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트리스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시 사람들이 알던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결 낫군요.”
트리스는 바람 속성 마법 블로우를 사용해 미풍으로 머리를 빠르게 말려갔다.
머리를 다 말리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몇 개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트리스는 힐끔 데카드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려주세요.”
“아, 미안.”
데카드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트리스는 원래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벗고 깔끔하고 섬유 유연제 냄새가 강한 깨끗한 옷을 입었다.
손톱도 조금 깎자 트리스의 준비는 완벽히 끝이 났다.
엘리스 또한 단검을 전부 허리춤에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짐을 느꼈다.
데카드는 뭐 신발만 신으면 언제나 오케이였다.
“이제 갈까요?”
트리스가 선두로 서며 퇴마부원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아사이드로 출발했다.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아사이드까지 도착했고 숙소까지도 빠르게 올 수 있었다.
숙소 주변 공터들은 말끔하게 메꾸어진 상태였다.
똑똑-
문을 두드려서 나온 아스카와 부원들에게 임무 이야기를 하자 각기 반응은 조금씩 달랐지만 대부분 이러했다.
‘저희가 유물을 찾으러 간다고요!?’
벨린다에게 유물과 유적에 들어서 그것이 뭔지는 이미 알고 있던 부원들은 이게 얼마나 사이즈가 큰 임무인지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부원들은 크게 놀랐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부원들을 이끌고 다시 텔레포트 기계를 타기 위해 걸어가던 중 트리스가 간단한 브리핑을 했다.
“저희는 극남쪽에 있는 도시인 샤릴마로 갑니다. 저희의 임무는 유적의 소유권을 가져오거나 유물의 탈취. 절대 어느 세력에게도 유물을 넘겨줄 수 없습니다.”부원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트리스의 설명을 들었다.
“해서 저희는 샤릴마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유적 근처에 있는 베이스캠프로 이동할 겁니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세력들이 즐비할 것이고 음지에선 흑마법사들도 도사리고 있습니다.”흑마법사라는 말에 퇴마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질문이 있으면 해도 좋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스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씀하십쇼.”
“아스카 멀린입니다! 흑마법사와 싸우는 건 두렵지 않지만, 주의할 점이 혹시 있습니까?”
트리스는 뒤에 있는 부원들이 볼 수 없게 앞에서 살짝 웃고는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그건 퇴마부장님이 더 잘 아실 것 같군요.”
“흑마법사와 싸울 때 주의할 점이라…….”
사실 나열하자면 너무나 많이 이거다라고 말해 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흑마법사에게 제일 많이 당하는 경우를 말해 줄 순 있었다.
“걔들 말을 너무 주의 깊게 듣지 마. 그놈들은 너희를 흔들기 위해 어떤 짓이든 가감 없이 할 수 있어. 그러다가 저주에 홀리는 건 한순간이고.”
흑마법사의 세 치 혀에 놀아난 집행관들은 하나같이 흙 속에 누워있거나 그 시체조차 보존하지 못했다.
“새겨들으십쇼. 흑마법사의 공포이자 천적이며 한때 집행관의 전설이라 불렸던 남자의 조언이니.”
“……야.”
“크큭.”
갑자기 트리스가 저기 달에 손이 닿을 정도로 띄워 주자 데카드의 얼굴이 다 뜨거워졌다.
그러나 효과는 아주 확실했다.
뒤에 있던 퇴마부원들의 눈에서 광채가 나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빛나게 데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원들의 기대가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아 데카드는 한숨부터 나왔다.
텔레포트 기계까지 도착한 일행은 샤릴마로 텔레포트 했다.
* * *
“덥다.”
“덥네.”
“덥군요.”
다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샤릴마로 도착하자마자 한 소리는 ‘덥다’였다.
일행은 마법사 집단답게 빠르게 얼음 속성의 마나를 몸에 둘러서 체감 온도를 정상보다 조금 낮게 맞췄다.
이러면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선선한 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부장님.”
“응?”
고드윈이 데카드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코트 여기서는 너무 눈에 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가?”
[걱정 마십쇼.]
짹짹이는 순식간에 도시에서 낙타를 타고 지나다니는 상인의 옷을 스캔한 후 코트를 변형시켰다.
화아악-!
깃털들이 빠져나가고 안이 살짝 비치는 실크 소재의 얇은 코트가 된 짹짹이는 살짝의 바람만 불어도 하늘하늘거렸다.
‘괜찮은데?’
[이쪽 스타일로 변신을 해봤습니다.]
극남쪽의 왕자가 입을 법한 스타일의 옷은 따가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통풍도 시원하게 잘 됐다.
데카드는 짹짹이의 스타일링에 만족하며 옷의 이곳저곳을 만져보았다.
“그럼 이제 베이스캠프로 갈 준비를 하죠.”
사막에서 긴 거리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낙타나 물, 보존 기간이 긴 식량이 필수다.
이곳 샤릴마는 극남쪽에서 유명한 무역 도시로 파는 것도 많고 살 수 있는 것도 많은 곳이니 여행 용품 정돈 손쉽게 구매할 수 있으리라.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