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고통 속에 피어나다
“꺄아아아악!!”
“……무시하자.”
어차피 지금 자신이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은 저주가 만들어낸 환상.
지금 들리는 비명 소리도 당연히 환상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거리가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지 모르겠지만,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면 돼.”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주와 환상 속에서의 탈출.
데카드는 애써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집중 상태에 들어가려 했다.
“모두 도망쳐!!”
“살인귀가 오고 있어요!!”
“꺄아아!!”
“으아아악!!”
데카드가 길바닥에 앉아 명상을 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다른 곳으로 도망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살인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불안한 가정은 빨리 지워버리려 했지만 저 멀리 달빛에 비치는 실루엣을 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아아아아-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할 정도로 데카드와 살인귀 사이에 거리는 꽤나 멀었음에도 그 살기가 아주 찌릿찌릿하게 느껴졌다.
심장을 후벼 파고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드는 농도 짙은 진짜 살기.
사람 한두 명 죽인 걸로는 이런 살기를 내뿜을 수 없다.
평생을 피와 시체 속에서 뒹굴어야 이런 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점점 다가오는 살인귀는 양손에 길쭉한 단검을 들고 있었다.
상의와 하의는 몸을 잘 감춰줄 수 있는 암살복에 밤과 어울리는 남색의 긴 머리는 풀어헤친 채 산발이 되어 있었다.
얼굴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겨주려는 것인지 흑색 무면탈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살인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에게서 도망치다가 넘어진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아으으으…….”
소년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숨이 턱턱 막혀오는 강력한 살기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눈이 뒤집히려 했다.
가면 뒤에 있는 얼굴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살인귀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들어 소년의 급소를 찔렀다.
푸욱-
“커흑……!!”
순식간에 절명한 소년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고 살인귀는 정말 소년이 죽었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 단검을 빼냈다.
단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닦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둔 살인귀는 자신의 단검을 달에 비춰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을 검신은 누군가들의 피로 점철돼 철을 부식시켜 갔다.
그럴수록 날은 무뎌지고 이가 빠지며 단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지만, 살인귀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도망치던 소년이 죽고 이제 살인귀와 데카드 사이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독한 배역이네. 엘리스.”
살인귀, 아니 엘리스를 보고 잠시 중얼거린 데카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길바닥에 앉아있었다.
트리스 때처럼 관여하려고 하면 상황은 순조롭게 악화될 게 뻔해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거리를 굴러다니는 오늘 자 신문처럼 존재감을 지웠다.
터벅 터벅-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스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데카드는 긴장으로 인한 심장 소리도 제어하며 아무 일 없이 엘리스가 자신을 지나치도록 빌었다.
그러나 그건 너무 데카드의 희망찬 생각이었다.
엘리스는 데카드가 있는 자리에 정확히 멈춰 서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뭐, 찌르게?”
이왕 이렇게 된 거 막 나간다.
데카드는 단검을 든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축 늘어뜨리고 있는 엘리스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엘리스의 눈에서는 일말의 동요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단검에서는 아직 마르지 못한 소년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 피는 곧 데카드의 피로 대체될지도 몰랐다.
“…….”
엘리스는 단검을 쥐며 날의 끝을 급소를 피한 애매한 장소에 갖다 댔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단검을 갖다 대기만 한 엘리스는 찌르지도 빼지도 않으며 가만히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처음으로 엘리스의 입이 열렸다.
“데카드를 고문할게요.”
“그래, 해라.”
데카드는 준비가 끝났다.
수우욱-!
급소가 아닌 부위라 죽지는 못했지만, 극한의 고통이 밀물처럼 찾아왔다.
뇌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오히려 좋았다.
“크흐흐흑……!”
데카드는 살짝의 광기어린 미소를 지었다가 엘리스에게 얼굴을 걷어차여 그대로 넘어졌다.
앞서 말한 준비가 끝났다는 말.
그건 당연히 고문 받을 준비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었다.
데카드가 생각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서클을 올린다.”
바로 서클 올리기다.
서클을 올리게 되면 몸에 심각한 부담이 가면서 동시에 방금 단검에 찔린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고통이 뒤따른다.
그런 무식한 고통을 겪은 몸은 정신을 최대 상태로 일깨우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정신력이 이 저주를 깨버릴 수 있다.
“웃지 마.”
엘리스가 손에 든 단검으로 귀신같이 급소는 피한 채 배 안쪽을 헤집어 놓았다.
“흐하핫!”
이런 상황에서도 데카드는 웃을 수 있었다.
어두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던 정신이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열리고 있어.’
깨닫고 실제로 이용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제는 할 수 있다.
환상 상태에 빠졌다고 하나 어차피 자신의 몸.
마음만 먹으면 지금 기절해 있는 육신의 마나룸을 충분히 열 수 있다.
칼을 맞더니 갑자기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 건지 조금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방법이 지금은 가능했다.
‘느껴진다.’
자신의 마나룸이 열리고 회로를 따라 쓰나미처럼 질주하는 마나들이 여실히 느껴졌다.
엘리스에게 찔린 부위를 후벼 파 이고 걷어차이고 두들겨 맞아도 데카드는 멈추지 않았다.
마나는 회로를 질주하다가 데카드의 신호에 맞춰 몸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크허헉……!!”
서클을 올릴 때 나타나는 고통은 지금의 자신에게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엘리스의 단검에 찔린 고통보다 이것이 수배는 더 아팠다.
하지만 입가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고통이 또 다른 고통을 뒤엎고 더 큰 고통이 이 고통 위에 얹어질수록 점점 환상에 묶인 정신의 족쇄가 풀려나가고 있었다.
“웃지 마.”
가면을 쓴 엘리스가 자신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해도 그런 것쯤이야 다 웃으면서 포용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하핫!!”
그래서 데카드는 웃었다.
길게 웃었다.
술이라도 독한 걸로 한 병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은 고통이 몸을 뒤덮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으헉……!”
엘리스가 얼굴을 주먹으로 연신 구타하면서 한쪽 눈이 보이지가 않게 부어올랐다.
손가락을 비롯한 연약한 뼈들은 이미 부러진 지 오래고 폐도 망가진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쪽 환상의 엘리스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자신을 이렇게 죽도록 패는지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만 더…….’
이제 막 마나 회로의 파괴가 끝이 나고 남은 부가 기관들의 파괴까지 거의 다 진행됐다.
데카드는 힘없이 쓰러진 채 말이 없었다.
일어날 힘조차 서클을 올린 데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시 전직 암살자라 그런지 사람이 죽지 않고 고통만 받을 수 있는 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엘리스의 단검이 다시 한번 데카드를 찌르려는 순간.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니.
지금 데카드가 숨 쉬고 있는 이 세계가 멈추고 있다는 것이 더 어울리리라.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이 멈추고 엘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멎었으며 피부로 닿는 촉감들이 모두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말의 뜻은 즉.
“완성했다. 5서클.”
데카드가 서클을 올림으로 인해 모든 기관들이 빠르게 회복을 시작하고 데카드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어섰다.
세상이 멈춤으로써 데카드의 몸에 가해지던 폭력의 흔적과 고통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꺼져라.”
왼손을 가로로 크게 휘두르자 유리창이 깨지듯 환상이 파편으로 부서져 잘게 흩어졌다.
와장창-!!
눈이 슬며시 떠졌다.
눈을 따갑게 하는 전광이 오랜만에 빛을 본 눈에 피로를 주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짹짹이와 저 멀리 진저백 교수가 보였다.
‘뭔 상황인지 알겠네.’
지금 진저백은 어떤 큰 마법을 준비 중인지 그 주변의 마나가 격동하고 있었다.
진저백 오리지널 - 벼락 찌르기
진저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기술 하나로 저 까마귀와 같이 뒤에 있는 원수이자 숙적을 한꺼번에 통구이로 만들어 줄 것이다.
한 줄기 뇌전의 푸른 창이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짹짹이를 향해 날아갔다.
턱-
짹짹이가 침음을 삼키며 공격을 방어하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수고했다.”
“주, 주인님…….”
데카드는 짹짹이를 앞에서 치우고 손바닥을 폈다.
[마수왕님!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날 불러줘서!]
티이라는 콧김을 길게 뿜으며 현세에 무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거대한 양날 도끼, 리바이어던이 데카드의 양손에 꽈악 들어왔다.
“흐읍……!!”
데카드가 숨을 들이마신 채 날아오는 야구공을 치듯 리바이어던을 크게 휘둘러 벼락 찌르기를 집무실의 외벽으로 날려버렸다.
꽈아아아앙-!!!
“네, 네놈 깨어난 것이냐. 대체 어찌…….”
“이제야 기억나. 네가 누구인지.”
데카드는 진저백을 바라보며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레지. 맞지? 네 진짜 이름. 나하고 학교 같이 다녔잖아.”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늦었다. 네놈은 곧 내 손에 죽을 터이니.”
지금 저놈이 깨어있든 기절해 있든 상관없다.
서클의 차이는 확실하고 순수 역량의 차이도 벌어질 만큼 벌어져 있다.
지금 자신이 저놈에게 질 요소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날아간 집무실의 외벽에서 휑한 바람이 들어와 데카드를 감쌌다.
“힘들었겠지.”
“뭐……?”
“항상 1등은 따놓은 당상이었는데 웬 듣도 보도 못한 고아 평민이 하나 와서 네 자리를 꿰찮은 게 아주 못마땅했을 거야.”
데카드는 리바이어던을 어깨에서 들어 올리며 한 바퀴 크게 돌렸다.
휘이이이잉-
고막을 때리는 칼바람이 집무실에 맴돌았고 그것은 곧 도끼의 날에 맺혀 절삭력을 높여주었다.
“다 아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라!!”
“그때 네가 나한테 뭔 짓을 하던 부정행위를 하던 상관 안 했거든? 딱히 악감정 품은 것도 없었어.”
그때의 진저백은 데카드를 넘기 위해 온갖 부정행위나 그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 소문에 이끌린 학생들이 데카드를 보며 수군거려도 딱히 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자신은 누가 뭐라 해도 이 파라미드의 꼭대기 포식자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지금 이건 선을 넘은 행동이야.”
리바이어던을 땅에 쿵 꽂자 집무실이 한 차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죽이러 왔으면 죽을 각오는 당연히 했겠지?”
“크크큭!! 고작 기술 하나 쳐낸 거로 우쭐해 하지 마라.”
진저백은 번개를 갑옷처럼 쓰기 위해 몸을 뒤덮은 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몸을 한 줄기의 번개로 만들기 시작했다.
입을 열 때마다 파지직거리며 약한 뇌류가 튀어나왔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