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침식
“아오…… 도저히 안 되네.”
눈을 감든 뜨든 보이는 건 똑같이 없었지만 데카드는 명상 상태에서 벗어나며 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이 새까만 공간에 온 지도 30분이 지났다.
이 공간에 시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어도 데카드는 들어온 순간부터 1초씩 쌓아가며 지금이 30분 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말이야.”
흑마법사들이 썼다고 알려진 저주의 기록들은 전부 읽어보았는데 이런 저주는 처음 들어보고 또 처음 겪어보았다.
집행관으로 살면서 온갖 저주를 다 겪어본 데카드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저주라는 것이 그냥 이런 공간 안에서 계속 살게 하는 건가?”
만약 저주의 효과가 이것이라면 자신은 고통 때문이 아닌 심심해서 죽을 확률이 높았다.
고통 하니까 아까까지 데카드를 괴롭혔던 두통들이 씻은 듯이 나아있는 것이 인지됐다.
“이곳에 오니 괜찮아진 건가?”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을 점점 잠식해 나가자 데카드는 고개를 털며 정신을 붙잡았다.
“이곳에서 나가는 게 우선이야.”
감히 자신에게 저주를 건 흑마법사들을 부숴버리는 것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었다.
지금 제일 급한 건 이 저주를 푸는 것이리라.
“다시 한번 해보자.”
데카드가 다시 아까 전처럼 명상 자세에 들어가고 강한 집중력으로 저주를 깨트리기 위해 먼저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
“응?”
눈을 감자마자 빗소리가 들리더니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곧 무릎 위에 올린 손에도 툭툭 물이 떨어졌다.
데카드는 눈을 떴다.
아까와는 달리 모든 촉감이 제대로 느껴졌고 눈을 뜬 세상에서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긴 뭐지?”
데카드는 지금 비를 피하려고 이곳에 들어온 것처럼 다 쓰러져 가는 폐가의 지붕 아래에서 앉아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방금 다 타버린 듯이 숯처럼 검은색으로 그을린 집들이 태반이었다.
“일단 가보자.”
여기 앉아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고 이것도 흑마법사의 저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장대비는 생각하지 않고 데카드는 마을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집에 붙은 불들은 비가 오고 있음에도 잘 꺼지지 않았는데 데카드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아냈다.
“마법이군.”
누군가 마법으로 이 마을을 불태운 것이다.
그리고 그 범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캬하하! 전부 타버려!”
날카로운 목소리는 흑색 로브를 입은 사람에게 들려왔고 남자로 보이진 않았다.
날렵한 몸매에 앙칼진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흑마법사 새끼들은 왜 내 저주에서도 난리인지, 참.”
어쨌든 흑마법사를 막기 위해 데카드는 뚜벅뚜벅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지척까지 왔음에도 장대비의 소리 때문인지 여자는 데카드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다.
“야, 너 죽을…….”
데카드는 여자의 후드를 벗기고 제압을 위해 목을 잡은 순간 동공에선 지진이 일어나고 손에는 힘이 풀렸다.
“트……리스?”
“아앙? 이게 누구야? 데카드 선배님이잖아?”
트리스의 얼굴은 흑마법의 여파로 창백해져 있었고 강렬했던 적발은 연하게 변해 있었다.
입술에는 피어싱 고리를 달고 화장을 진하게 한 모습은 자신이 알던 트리스와 너무나 달랐다.
“오랜만이야! 선배!”
트리스는 데카드를 꽉 껴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장대비로 축축하게 젖은 데카드였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거칠게 자신을 밀착시켰다.
달라붙어 오는 트리스의 어깨를 잡아 떼어낸 데카드는 그녀를 돌려 불타는 집을 보게 했다.
“……이것들 네가 한 짓이야?”
“응! 문제 있어?”
“…….”
순식간에 마을이 불타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살아가던 터전과 일자리를 잃었는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트리스는 문제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데카드를 쳐다봤다.
“왜 그런 거야?”
“아니! 이 새끼들이 나 보면서 계속 수군대고 손가락질하잖아! 열 받아서 전부 불태웠지! 어차피 요즘 스켈레톤들도 부족했으니까!”
트리스는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데카드의 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예쁜 짓 하면 선배가 나 머리 쓰다듬어줬잖아. 헤헷.”
트리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데카드는 무시한 채 그의 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부터 뒷목까지 부드럽게 쓸었다.
그 행동이 반복될 때마다 트리스는 입에서 흐르는 침을 츄릅 삼켰다.
그러다가 지금 막 생각난 듯 눈을 퍼뜩 뜨고 데카드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아 맞아! 선배한테 보여줄 게 있어!”
트리스가 데카드의 손을 붙잡고 달려간 곳은 스켈레톤들이 주민들을 포위해 놓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도망치지도, 스켈레톤에게 맞서지도 못한 채 가만히 공포에 웅크려 벌벌 떨고만 있었다.
“아까…… 여기 있었는데…….”
트리스는 스켈레톤 사이를 뚫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더니 눈여겨본 뭔가가 있는 듯 계속 두리번거렸다.
“찾았다!”
트리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앉아있는 한 여자를 일으켰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히힛. 살고 싶으면 곱게 따라와!”
트리스는 여자의 팔을 잡고 데카드의 앞으로 끌고 왔는데 가까이서 보니 임신한 지 몇 달이 지난 듯 배가 불러 있었다.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트리스는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안에 있는 생명의 태동을 느꼈다.
“키히힛, 여기 아기가 있네?”
“사, 살려 주세요…….”
트리스는 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녹슨 칼을 빼앗았다.
“선배! 잘 봐! 지금부터 아주 재밌는 실험을 할 거니까 말이야!”
한 손에는 불을 피워낸 트리스가 칼을 여자의 앞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어 여자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내가 너의 발에 불이 붙게 할 거야.”
“네……?”
“불은 빠르게 번질 테고 점점 네 다리는 타들어 가겠지? 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좋아. 이 칼로 네 다리를 자르면 되니까.”
여자는 덜덜 떨리는 얼굴로 바닥에서 비를 맞고 있는 녹슨 검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게 자르면 안 돼? 그랬다간 안에 있는 아기가 산 채로 삶아질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하하핫!!”
트리스는 광기에 젖은 목소리로 장대비를 즐기며 손에 피어오른 불을 여자의 다리에 던지려 했다.
“이제 시작한……!!”
“그만해.”
트리스가 불을 던지려는 제스처를 취하려고 하자 데카드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왜…… 막으시는 거예요?”
“미친 짓이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살인이 눈앞에서 벌어지려고 하는데 그 행동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트리스라도 막아야 했다.
“미친…… 짓이요?”
“그래.”
“킥킥킥…… 하하하하하!!!”
처음에는 고개를 떨구고 작은 조소 같은 웃음이 트리스의 입에서 삐져나오더니 이제는 참지 못하고 아까보다 훨씬 크게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이게 미친 짓이라면 선배가 한 건 뭐죠?”
“내가 한 거?”
“그래! 선배가 나를 버리고 그 암살자 계집년에게 갔잖아요!! 내가 그딴 별 볼 일 없는 년에 비해 어디가 부족해서?”
“무슨 소리야 대체.”
저주가 만들어내는 상황극이란 것을 알고 있어도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빨려 들어갈 만큼 혼미했다.
“그래서 내가 죽여 버렸죠!! 이 흑마법의 힘으로 발가락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차근차근 세포 하나하나 태워 죽였어요!!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선배는 제 거예요!”트리스는 창백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과 몸을 매만지더니 다가와 데카드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나 처음 달밤에서 트리스가 데카드에게 한 그것과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달밤에서는 트리스도 하면서 본인이 해도 될까 안 될까 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조심스러움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먹이를 조여 숨을 쉬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한 마리의 아나콘다처럼 데카드에게 끈적하게 다가왔다.
데카드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허리를 자신의 쪽으로 꽉 끌어온 트리스는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가 겨우 떨어진 트리스가 데카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나밖에……!! 나밖에 없다고 말해 줘요…… 지금까지 선배만 보고 살아왔는데…… 선배가 날 거부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찢어 죽일 거예요.”
“너는 진짜가 아니야.”
“네……?”
“너는 진짜가 아니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선배……? 내가 진짜가 아니라뇨? 여기 선배가 제일 아끼던 후배 트리스 아드리안이라고요?”
데카드는 또 입맞춤하려고 하는 트리스를 밀쳐냈다.
“아니. 너는 트리스가 아니야.”
“왜…… 왜…… 나는 선배에게 알맞은 여자가 될 수 없는 거야……?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흑마력을 삼켜가면서 왔는데 아직도 뭘 더 버려야 하는 거야……?”데카드는 털썩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트리스를 외면하고 뒤를 돌았다.
“아니야…… 네가 가짜인 거야…… 진짜 선배라면 나를 봐줄 거야…… 내가 아니라 네가 가짜라고!!!”
트리스는 아까 자신이 여자 앞에 떨어뜨린 녹슨 검을 들고 달려가 데카드의 등을 관통해 배까지 찔러서 뚫어냈다.
“…….”
데카드의 입에선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잠시 살짝 고개를 돌려서 본 트리스의 얼굴은 자신이 선배를 죽였다는 사실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고.
한편으로는 살인이라는 행동이 너무 즐거워 입꼬리가 찢어지게 올라가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환상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 이상 트리스의 얼굴을 보면 정말 이것이 현실이라고 믿을까 봐 눈조차 감아버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의지와 관계없이 그는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 입에 들어온 흙들은 너무나 썼고 얼굴을 때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 * *
“그곳을 비켜라!!”
“절대 그럴 수 없다.”
짹짹이가 등에서 날개를 펼치며 사각지대에서 데카드의 목숨을 노려오는 전격을 튕겨냈다.
진저백은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짹잭이의 무력과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방어에 이를 악물었다.
“주인님의 옥체에는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다.”
“너 같은 노예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진저백은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전류를 뭉치고 꼬아내 한 줄기의 번개 화살을 손바닥 위에서 만들어냈다.
짹짹이는 그 화살 안에 들어있는 마나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더욱 단단히 데카드의 앞을 막아섰다.
‘걱정 마십쇼. 절대 저자가 주인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곁눈질로 본 데카드는 간간이 몸을 움찔거리고 흘리는 땀의 양은 아까보다 더 많아져 상의를 축축하게 적셨다.
딱 봐도 굉장히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지금 짹짹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육신을 지키는 것뿐이다.
짹짹이의 날개에서 까마귀들이 부리를 내밀더니 퍼드덕거리며 집무실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점점 늘어나는 까마귀의 숫자는 어느새 100마리를 훌쩍 넘겼다.
그것들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내는 바람이 진저백의 머리를 휘날리게 만들었다.
“벼락 화살.”
“까마귀의 군무.”
콰르르릉-!!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저백의 손바닥 위에 있던 화살들이 뇌명과 함께 사라졌다.
분명 크기는 일반 화살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것이 가져온 후폭풍은 작지 않았다.
짹짹이가 까마귀들로 방어막을 만든 것도 화살이 내뿜는 전류 때문에 타죽거나 감전되었다.
그 공격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하마터면 짹짹이마저 놓칠 뻔했다.
정말 번개의 속도와 가까웠던 진저백의 공격은 짹짹이의 방어를 전부 뚫어내 버렸다.
최후의 방어선까지 뚫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짹짹이의 눈이 커지고 곧 살을 꿰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욱-!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