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각자의 입장
“트리스, 잠깐 멈춰요.”
짹짹이의 날개로 트리스보다 먼저 1층에 도착한 엘리스는 이제 막 마탑 밖으로 나온 그녀를 멈춰 세웠다.
“…….”
앞을 가로막은 엘리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트리스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며 계속 걸었다.
“잠깐 멈춰 보라니까요!”
말도 없이 어딘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트리스의 손을 엘리스가 붙잡았다.
그제야 트리스는 탁 하고 멈췄다.
아무 말 없이 엘리스에게 손이 잡힌 트리스는 미동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유일한 움직임은 지금 엘리스가 잡고 있는 손이 나지막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거 놔…….”
“못 놔요.”
지금 트리스자신은 멈출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인외의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을 이제야 겨우 만났다.
10년이 지나고서야 만났는데……
이제는 정말 헤어질 일이 없다고 믿었는데……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내가 이 남자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놈들이야…… 흑마법사…….”
분명 그 족속들밖에 없다.
저번에 놓쳐버린 크라켄 침입 때의 흑마법사들.
그놈들이 복수를 위해 저주를 쓴 것이다.
저주는 그 시전자를 죽이면 풀리게 되어 있다.
“죽여야 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트리스는 자신의 손을 붙잡은 엘리스를 뿌리치고 마법을 시전했다.
“아케인 체인.”
엘리스의 주변에서 마법진이 빛과 함께 튀어나오더니 녹색의 사슬들이 그녀를 칭칭 묶었다.
순식간에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엘리스는 트리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흑마법사들이 어디 있는 줄 알고요!! 지금 달려가면 그놈들 잡을 수는 있어요?”
“시간 없어.”
트리스가 손을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자 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엘리스의 무릎을 꿇렸다.
팔도 서로 만날 수 없게 한쪽씩 따로 묶어 양쪽 끝으로 벌리자 완전 포박이 순식간에 끝이 났다.
자신을 방어할 수 없도록 엘리스를 이대로 방치해 둔 채 트리스는 다시 길을 걸어갔다.
“가면을 꺼낼 수도 없었어.”
가면을 품에서 꺼내기도 전에 양팔이 묶여버려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됐다.
이대로 트리스를 보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등에 달려있던 깃털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짹짹이 님……?”
깃털들은 서로를 엮고 엮어 칼날의 모양을 갖춰갔다.
짹짹이의 마력은 깃털들을 강화시켰고 그대로 사슬을 내려쳤다.
쩌어어어엉-!!
짹짹이의 힘이 온전히 들어간 공격이었으나 사슬은 한 번에 끊어지지 않았다.
7서클 마탑의 총장의 마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짹짹이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여덟 번을 찍었을 때 사슬은 끊어지고 엘리스의 한쪽 손이 자유를 되찾았다.
“고마워요, 짹짹이 님.”
지붕에서 마탑으로 날아가는 까마귀 한 마리를 보며 엘리스가 작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풀려난 한쪽 손으로 가면을 꺼내며 엘리스는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썼다.
고오오오오-
새까만 흑무가 일대를 잠식하고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과 만족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이 마약 같은 느낌에 잘못 빠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
“후우…….”
폭주의 위험을 잠재우기 위해 감정을 바로 다스린 엘리스는 넓어진 기감으로 살기를 흩뿌리는 트리스를 찾았다.
잠깐 사이에 벌써 도시를 반이나 지난 트리스는 방향으로 볼 때 텔레포트 기계로 가고 있었다.
“마법부로 가려는 걸 거야.”
총장이라면 흑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의심 지역들을 알고 있을 테고, 그곳은 탈리스가 아닌 다른 나라의 영토다.
그곳을 별도의 연락도 없이 막무가내로 데려온 마법부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는 순간 전쟁 선포와 다름없었다.
설령 그 나라에 흑마법사가 정말 있더라도 트리스가 찾는 흑마법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아예 없다면 그 나라는 온갖 비난을 쏟아놓을 것이다.
평소 마법부에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갖고 있던 왕국들도 좀처럼 보기 힘든 기회에 개떼처럼 달려와 물어뜯을 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마법부는 개인적으로 독단 행동을 펼친 트리스에게 모든 화살을 돌릴 게 뻔했고 그 순간 트리스는 마탑 총장에서 해임된다.
“당신이 총장 자리에서 쫓겨나면 데카드가 좋아할 것 같아?”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할 것이 뻔했다.
엘리스는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고 그렇기에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가면으로 원래보다 훨씬 강해진 완력을 사용해 엘리스는 바닥이 부서져서 파편으로 날릴 만큼 땅을 박차 트리스를 쫓아갔다.
5분 정도를 뛰어가자 분노로 그 똑똑한 머리가 완전히 멈춰버린 트리스가 보였다.
“멈춰!!!”
엘리스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자 트리스가 멈춰 서며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슬을 끊었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으나 가면을 쓴 모습을 보고는 이해한 듯 오른손을 뻗었다.
“쫓아오지 마.”
사제를 죽이려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세게 불타오르는 화염은 커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들기만을 반복하던 화염은 어느새 작은 점만 해졌고 그것은 검지 끝에 물방울처럼 맺혔다.
뭘 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에 엘리스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트리스의 입이 달싹였다.
“블레이즈 샷.”
퓨슉-!!
물총을 쏘는 것처럼 튀어 나간 한줄기의 불꽃은 엘리스의 다리를 노렸다.
그녀의 뛰어난 기동성을 불능으로 만들어 더 이상 쫒아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어림도 없어요.”
가면을 쓰지 않았다면 당했을지도 모르는 빠른 속도였으나 지금은 정확한 반응이 가능했다.
몸을 틀어 총알 같은 화염을 피한 엘리스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이 갔다.
“쯧.”
마탑에 와서 받기로 했던 새로운 단검은 아직 수중에 없었고 그 뜻은 무기도 없이 마탑의 총장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혀를 찬 엘리스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앞에 있는 트리스를 보았다.
이 ‘본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시각이라는 개념에 한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호흡이나 근육의 움직임.
속눈썹의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어야 정말 상대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트리스는 불안정하다.
엇나간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려 하는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트리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섬 안에서 단 한 명밖에 없다.
“이기지 말고 버틴다.”
데카드가 깨어날 때까지.
* * *
“흠흠~”
여기 한 남자가 즐겁게 마탑의 도시를 걷고 있다.
평소 그의 모습답지 않게 콧노래도 부르는 이 모습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남자, 진저백은 데카드를 죽이기 위해 마탑으로 가고 있었다.
“놈은 아마 총장의 집무실에 있겠지.”
총장인 트리스와 데카드의 동료 엘리스란 여자는 지금 도시 한쪽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그 말의 뜻은 집무실에 사람이 없고 비어있다는 것.
산책하듯 걸어가서 그놈의 목에 칼만 꽂아 넣어 주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다.
평생의 염원을 이루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진저백은 편안하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트리스의 집무실까지 이동했다.
꼭대기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커다란 소파에 누워있는 데카드가 보였다.
“하아…….”
목표가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진저백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설레는 이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해 왔는지 모른다. 네놈의 목을 내 손으로 조르겠다는 다짐을 매일 밤마다 했었는데 오늘에서야 이루어지는구나.”
진저백은 데카드가 누워있는 소파 앞까지 걸어오며 소매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냈다.
이 단검으로 목을 찌른다면 아무런 거슬림 없이 두부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그 감촉은 카스테라보다 부드럽고 초콜릿보다 달콤할 것이며 진저백이 상상으로만 해왔던 것이었다.
“이제 그만 끝내 주지.”
언제나 자신의 머리 위에서만 살아왔던 숙적을 죽이기 위해 진저백이 단검을 위로 크게 치켜들었다.
“멈춰라.”
우뚝-
“감히 내가 모시는 주인께 날붙이를 들이대느냐.”
마나의 감각이나 사람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집무실의 구석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또 누구냐?”
그림자에서 흑색의 인형이 솟아오르더니 까마귀의 깃털들이 허공을 부유했다.
그러면서 집무실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흑색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까지 닿았다.
“네가 이놈의 부하라는 건가?”
“그분의 종이자 신하이며 마수계의 밤을 다스리는 까마귀. 원래라면 너 같은 인간이 쳐다보지도 못 할 위치에 있는 자지.”
“웃기는 놈이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짹짹이를 그저 단순한 미친놈이라고 진저백은 치부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데카드의 목에 꽂아 넣으려 했다.
슈우욱-!!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짹짹이가 순식간에 소파 뒤에서 나타나 진저백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날 죽이겠다는 거냐?”
진저백의 손목을 잡고 있는 짹짹이가 점점 팔에 힘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그러자 이상한 소리가 나며 팔이 꺾여나갔고 진저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팔에 번개를 둘렀다.
지지지직-!
팔을 잡고 있는 짹짹이의 몸까지 전기가 퍼지며 그를 감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초에 사람의 형상만을 하고 있을 뿐 본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짹짹이는 전기의 영향을 대부분 받지 않았다.
“찌릿하군.”
감전은 무시하고 짹짹이는 진저백의 팔을 부러뜨렸다.
콰직-!
“끄으윽……!!!”
뼈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에 보통 사람이라면 괴성을 질러댔을 만한 고통이 진저백을 덮쳤다.
마탑 교수의 경력과 그동안의 고난을 그냥 거쳐 온 건 아니라는 건지 진저백은 비명을 속으로 눌러 담았다.
“감히 네놈 같은 벌레 따위가……!!”
잡히지 않은 팔에 번개를 욱여넣은 진저백은 짹짹이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넓은 집무실이 충격음에 진동하고 벽장에 책들이 하나둘 떨어졌다.
강한 충격에 튕겨져 나간 짹짹이는 트리스의 책상에 부딪혀서야 멈출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강하다.’
마탑의 교수라는 신분에 안심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더 엄청났다.
심지어 방어 마법도 없이 맨몸으로 노출되어 있는 데카드를 지켜야 하니 싸움은 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놈도 이곳이 불편한 건 마찬가지.’
집무실의 아래층은 지금도 마탑의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함부로 규모가 큰 마법을 썼다가는 아래층에서 이상함을 느껴 위층으로 올라올 수 있다.
데카드만은 안전한 곳으로 빼내고 싶었지만 그걸 곱게 두고 볼 진저백이 아니었다.
‘이럴 때 그놈들이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지금 데카드의 안에 있는 마수들이 전부 나온다면 진저백을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데카드의 혼절로 마수들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태.
온전히 짹짹이의 힘으로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주인님이 일어나실 때까지 버틴다.’
엘리스와 짹짹이.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