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89화 (89/208)

089 저주

마지아섬의 미개발 지역.

진저백이 바다를 앞에 두며 눈을 감고 서 있었다.

파도 부서지는 소리는 계속 귀를 간지럽히고 신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은 까슬까슬했다.

그러나 진저백은 사색 따위나 즐기려 해안가에 온 것이 아니다.

그것도 남들의 눈을 의도적으로 피해 가면서.

규칙적으로 철썩이던 파도가 갑자기 균형을 잃어가더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조화를 망쳤다.

“크큭, 오래 기다렸나 보군.”

“별로.”

온몸이 로브와 함께 흠뻑 젖은 남자는 저번 마탑 토벌 선두에 섰던 대장 흑마법사였다.

진저백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손부터 내밀었다.

“성격도 급하시군. 그래선 대업을 그르칠 수가 있어.”

“더러운 흑마법사에게 그런 소릴 들을 여유는 없다. 설마 준비 못 한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당장 너를 이곳에서 죽여주겠다는 듯 진저백의 몸에서 지직 하는 전류가 퍼져 나갔다.

흑마법사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끌끌 웃더니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저주다.”

모서리 부분이 조금씩 찢어진 스크롤은 둘둘 말려 있는 상태였다.

말아 놓은 것을 특수한 마력 줄로 묶은 모습은 이것이 말로만 듣던 흑마법사들의 즉발 저주 스크롤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용 방법은 알겠지?”

“그것은 알고 있으니 효과에 대해서 말해라.”

흑마법사는 말만 해도 재밌다는 것처럼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크하하…….”

그 웃음소리는 조율이 안 된 악기들로 펼치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정면에서 듣는 것보다 더 끔찍한 소리였다.

아이들이 들었다면 밤새 공포로 떨면서 자지 못 했을 그런 웃음을 내뱉은 흑마법사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내가 너무 자기 흥에 빠졌군. 설명은 한 번만 해줄 테니 잘 들어라.”

대장 흑마법사가 준비한 저주의 핵심은 은밀함이었다.

그동안 저주를 쓰면 누가 봐도 흑마법사가 사용한 것이란 게 티가 났지만, 이 저주는 일상생활에서 있을 법한 고통을 불러온다.

그럼으로 흑마법사의 저주라는 생각을 일단 배제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흑마법사의 마력에 민감한 처형인을 위해 이 저주는 흑마력을 쓰지 않았다.

제작은 흑마력으로 했으나 펼칠 때는 흑마력이 날아가고 순수 마력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너무나 어려운 이론이라 이 스크롤 하나 만드는 데도 돈이 얼마나 깨져나갔는지 모른다.

“저주의 증상은 이러하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통이나 두통으로 시작한다.

일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이런 고통을 사람들은 무시하기 일쑤고 자신이 아는 처형인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하지만 이 저주를 초기에 잡지 못한다면 고통을 점점 불려 나가 결국 혼절 상태까지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저주의 발동 방법에는 특별한 게 필요하지. 내가 준비하란 것은?”

“여기 있다.”

진저백은 병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냈고 그 속에는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

“이 저주는 상대가 일정 거리에 들어온다면 그 머리카락에 담긴 생체 정보로 그 주인에게 침식되지.”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군.”

옛날 데카드와 진저백이 재학생 시절일 때 진저백은 그의 강함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카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수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쓰고 남은 이 머리카락 한 줄은 그동안 상자 안에 처박혀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된 빛을 보게 됐다.

“그리고 저주의 특징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이것이다.”

혼절한 저주 대상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지인들에게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을 쉬지 않고 끝도 없이 듣게 된다.

그렇게 되다 보면 정신은 자연스레 피폐해질 테고 몸이 살아있더라도 마음이 죽어버린다.

“이 환상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면에서 부서버려야 하는데 저주가 그걸 계속 막을 것이다.”

흑마법사는 이 저주가 깨질 수 있는 경우도 얘기해 주었지만, 이것에 대해서 진저백은 별로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진저백, 네가 원하는 대로 무방비 상태인 그놈을…….”

“내가 죽이면 되겠군.”

진저백은 설명을 다 듣고 뒤를 돌아 다시 마탑으로 되돌아갔다.

트리스와 데카드가 오기 전에 저주 마법진을 완성해 두어야 한다.

조금씩 숲속으로 사라져 가는 진저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흑마법사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 * *

“데카드가 대체 왜 이런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트리스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후 책상으로 가 수정구를 매만졌다.

“사제를 빨리 내 집무실로 올려 보내!”

평소 존댓말이 기본이던 트리스가 마음이 급해 습관도 버린 채로 불안과 초조의 모습으로 소파에 눕힌 데카드를 바라보았다.

엘리스는 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며 데카드의 차가워진 손을 꽈악 붙잡았다.

“흑마법사의 저주가 아니라면 이러실 리가 없어……. 하지만 흑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트리스는 데카드의 주위를 계속 왔다 갔다 맴돌며 손톱을 깨물었다.

트리스의 상식으로는 흑마력이 없다면 저주가 아닌 것이고 그렇다면 결과는 그냥 데카드가 아픈 것이다.

차라리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데카드는 그냥 아플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극지방에 내놔도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 분명 흑마법사가 뭔 짓을 꾸민 거야…… 그런 거야…….”

계속 혼자 중얼중얼거리면서 눈에는 점점 핏발이 올라오고 동공은 수축되었다.

흑마법사들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당장에라도 마법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데카드가 먼저였다.

[문이 열립니다!]

“저……! 헉헉! 왔습니다!”

수정구로 들리는 트리스의 급한 목소리에 사제는 마탑과 거리가 있는 신전에서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왔다.

“빨리 데카드를 봐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트리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마치 오늘 수틀리면 다 같이 끝장이라는 저 표정은 옛날 몇 년 전 철혈의 트리스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사제는 급하게 누워있는 데카드에게로 다가와 가방을 열고 도구를 책상 위에 꺼냈다.

“빨리하세요.”

서릿발 고드름 떨어지는 것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트리스가 읊조리듯 짧게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사제는 장비의 보존이고 뭐고 자신의 목숨부터 생각하며 가방에 있던 모든 것을 바닥으로 쏟아버렸다.

사제는 양손을 데카드의 배 위에 올리며 신성을 발동시켰다.

신성은 사제들의 전유물 같은 것으로 평생 고기나 기름진 것들을 멀리하고 수양을 하다 보면 일정 확률로 얻게 되는 마나의 사촌과도 같은 능력이다.

신성으로는 마법의 발현이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다친 몸을 치유하거나 활기를 돌게 하는 등 강한 양기를 띠고 있다.

우우우웅-

황금색 신성이 방 안을 비추며 데카드의 몸 구석구석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일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마나 회로로 신성이 진입했다.

‘왜 이렇게 깨끗해?’

사제는 자신보다 더 군더더기 없는 마나 회로를 가지고 있는 데카드를 보며 감탄했다.

하마터면 자신이 마나 회로가 아닌 다른 부분을 훑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데카드의 마나 회로는 100일 동안 금식을 한 사제와 견줄 만했다.

‘마나 회로에는 문제가 없고…….’

사제가 슬쩍 위를 쳐다보자 광기와 살기에 침식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트리스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멎을 만큼 무서운 트리스와 눈이 마주친 사제는 절로 입을 닫았다.

실수로 열면 비명이 새어 나올까 봐.

“지금 저와 눈 마주칠 시간이 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사제는 다신 고개를 안 들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며 데카드의 진찰을 속행했다.

장기들과 뼈, 뇌와 혈관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저주가 끼어있는 곳은 없었다.

“저주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정말입니다……! 저도 최대한 신성을 넓게 퍼트리고 작은 부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저주를 찾아볼 수가…….”

화르르르르-

트리스의 오른손에서 거대한 화염이 타올랐다.

맹염의 불꽃은 금방이라도 사제를 태워 죽일 것처럼 점점 더 크기를 키워 나갔고 곧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분명 있어…….”

“히익……!!”

사제는 뒤로 넘어지면서 더 다가가면 피부가 녹아버릴 듯 뜨거운 화염을 피해 물러섰지만, 벽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트리스가 오른손을 사제를 향해 겨누고, 사제는 이제 내 인생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주마등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정말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트리스를 보다 못한 엘리스가 양팔을 넓게 벌리고 막아섰다.

“그만하세요! 이러는 걸 데카드가 좋아하겠어요?”

“그러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나는…….”

데카드라는 말에 트리스의 눈이 다시 돌아오며 불도 잠잠해졌다.

“흑흑흑……!”

사제는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울고 있었고 엘리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가세요.”

“가, 감사합니다……!!”

사제는 자신을 구해 준 엘리스에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넨 후 도망치듯 장비도 버리고 엘리베이터로 사라졌다.

트리스는 자신의 눈물을 보이기 싫은 듯 뒤로 돌며 빠르게 휴지로 눈물을 훔쳤다.

“하아…….”

엘리스는 다시 데카드의 앞으로 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짹짹이 님. 듣고 계세요?”

그 순간 코트의 깃털들이 파악 공중으로 퍼져 나가고 다시 뭉쳐지며 사람의 형상을 취해갔다.

트리스는 초면이지만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엘리스는 짹짹이와 많이 만나봤다.

“주인님의 몸 상태는 우리 마수들도 아는 바가 없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아.”

“다른 마수 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주인님이 의식불명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다들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 안에서 잘 있다.”

“다행이네요.”

트리스가 아까의 눈물로 눈이 살짝 부은 채 짹짹이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선배를 도와드릴 방법은 하나도 없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그렇다.”

트리스는 그 절망적인 소식에 제자리에서 주저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또…… 또…… 선배를 놓치고 말았어……. 전부 죽일 거야…….”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트리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딘가로 움직였다.

“따라가는 게 좋을 것이다.”

“네?”

“가면의 힘. 잘 사용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엘리스는 트리스가 사라진 엘리베이터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짹짹이는 깃털 몇 개를 뭉쳐 엘리스의 등에 달아주었다.

깃털들은 서로 빠르게 분열하더니 곧 거대한 까마귀의 날개를 만들어주었다.

“그 날개면 트리스보다 빠르게 1층으로 도착할 거다.”

“감사합니다.”

엘리스가 창문을 넘어 그대로 날아가고 짹짹이는 데카드와 가까운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믿습니다, 주인님. 이번에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주십쇼.”

* * *

“여긴 어디야…….”

주변은 온통 까맣고 말할 때마다 목소리가 울리는 게 꼭 깊은 동굴 안에 있는 것 같다.

정말 이곳이 동굴이었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눈에 보이는 것은 칠흑뿐이라 지금 어딜 밟고 있는지, 앞은 맞는지,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걸어볼까.”

두 다리를 움직이고 있지만 정말 앞으로 가고 있는 게 맞는 건지 헛발만 짚고 있는 건 아닌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하아……. 흑마법사 새끼들이 한 건 했나 보네.”

자신도 처음 겪어보는 저주로 흑마력의 전조도 없이 펼쳐지는 이런 저주는 듣도 보도 못 했다.

자신이 진화하는 만큼 흑마법사도 진화하고 있다는 질 안 좋은 농담에 데카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데카드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갔다.

“나가서 보자, 개새끼들아.”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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