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결산
“모, 못 일어나겠어…….”
“쿨럭……! 쿨럭……!”
“하아…… 하아…….”
마수들과의 훈련은 잠시 기절한 벨린다가 부러워질 정도로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훈련을 마친 부원들의 꼴은 방금 빈민가에서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스카는 로브 곳곳이 얼어붙고 장시간 얼음 속성 공격을 당한 탓에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고드윈은 고오른과의 화력 맞대결에서 당연히 중간에 힘이 빠져 머리카락 끝 부분이 타버렸고 손은 화상으로 살짝 빨개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티이라와 강철 속성을 배우던 카론은 온몸을 구타당하다시피 맞아 조금만 걸어도 온몸이 잔뜩 쑤셔왔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을 대가로 부원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터덜터덜 훈련이 끝나고 숙소에서 모인 부원들이 저마다 오늘 얻은 성과를 이야기했다.
“좀 발전이 있었어?”
“백염의 기본 화력은 더 세진 것 같은데…… 뭔가 살고 싶다고 간절해지니까 백염과 내가 뭔가 통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어.”
아직은 애매모호한 느낌이라 고드윈은 자신이 오늘 느낀 그 감각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성과는 있었다는 거군.”
부원들은 모두 고드윈에게 심심한 축하를 보내주었다.
“카론은?”
“나는 아이언 커팅을 어떻게 해야 전투 중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지 배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도록 맞았다, 라는 말은 생략했다.
어차피 같은 공터에 있었던 부원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니까.
“아스카는 어땠어? 그 백발 선생님. 엄청 빡세 보이던데.”
“빡세긴 한데 귀여운 분이셔. 선생님은 나에게 얼음 속성의 팁이나 노하우를 알려주셨고 무빙 캐스팅을 자연스레 유도해 주신 것 같아.”
요르가 하늘에서 뾰족한 고드름을 내리면 아스카는 얼음 방패를 들고 피해야 했는데, 중간에 방패가 부서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방패가 부서져도 고드름은 멈추지 않았고 아스카는 움직이면서 다시 얼음 방패를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스카는 자신도 모르게 무빙 캐스팅을 해냈다.
“무빙 캐스팅? 대단하네.”
마법은 큰 집중을 필요로 해서 움직이면서 시전하기가 절대 쉽지 않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평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최대의 집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언니는 어땠어?”
“나? 나는…….”
오늘은 짹짹이와 함께 가면의 힘을 중점적으로 배웠지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은신술을 짹…… 아니 카라스 선생님께 배웠어.”
“그렇구나!”
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복도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많은 걸 배웠어.”
“벨린다! 괜찮아?”
“응.”
기절해 있던 벨린다가 머릿속으로 계속 오늘 레오와의 대련을 반복해 떠올리며 부원들 사이에 앉았다.
“레오 선생님 검술의 묘리…… 그 힌트를 알려주려고 하신 걸 거야.”
거대한 흐름으로 작은 파문을 감싸 안아 흩트려 버린다.
그런 스타일의 검술은 어느 나라의 검술 교습서를 찾아봐도 볼 수 없었고 벨린다는 그의 검술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어쨌든 다들 얻은 게 있다니 다행이네. 으윽……!”
고드윈은 기지개를 쭉 켜며 우두둑거리는 관절들을 풀고 냉장고로 갔다.
“배고파 죽을 것 같네.”
“내 것도!”
부원들이 숙소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마수들과 데카드는 잠시 엉망이 되어버린 공터 위를 걷고 있었다.
“오늘 하루 어땠어?”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하고 싶을 정도로요!”
수만 년의 세월에서 누굴 가르쳐 본 적이 없는 마수들은 선생님 노릇이 이렇게 재밌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재밌다! 잘 알아먹는다! 그래서 안 귀찮았다!”
“티이라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이 똘똘한 게 마음에 들더군요!”
인간계 쪽에서는 천재 부류에 들어가는 부원들이라 마수들도 큰 힘 들이지 않고 잘 알려주었다.
그렇게 알려주는 것을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해 버리니 선생된 마수들의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흡족할 것이다.
“레오는 어땠어?”
시종일관 별을 바라보던 레오에게 데카드가 물었다.
“…….”
그는 데카드가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약간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것만으로도 데카드는 레오의 의사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짹짹이는? 엘리스와 뭐 했어?”
“가면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연습했습니다.”
“위험하지는 않았어?”
“네. 폭주의 위험은 없어 보였고 엘리스에게도 중독이나 저주의 증상은 따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잘됐네.”
가면의 힘은 적재적소에 잘 활용만 한다면 분명 엄청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공터를 한 바퀴…… 두 바퀴를 더 돌자 슬슬 배가 고파왔다.
“숙소로 가서 밥이나 먹어야겠다.”
마수들이 다시 데카드의 안으로 들어오고 짹짹이는 코트의 형태로 변해 그의 어깨 위로 안착했다.
숙소 안으로 들어오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오자 가까이 있는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라면 끓이고 있어?”
“네! 부장님도 드실 거죠?”
“당연하지.”
출출한 새벽에는 야식으로 라면만큼 맛있는 게 없다.
데카드는 주방 식탁에 앉아 그릇을 꺼내고 라면을 담았다.
“선생님들은 가셨나요?”
고드윈이 후루룩 라면을 먹으며 물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숙소로 가셨어.”
“아쉽네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기회야 많으니까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돼.”
마수들은 언제나 데카드의 안에 있을 테니 같이 밥 먹는 것쯤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데카드는 거실에서 라면 말고도 저마다의 저녁을 먹고 있는 부원들 사이로 와 말을 꺼냈다.
“나하고 엘리스는 내일 마탑으로 가야 돼.”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부원들은 모두 일제히 행동을 멈춘 채 데카드의 말에 집중했다.
“얼마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길어야 이틀이지.”
서류를 작성해야 하고 양식에 맞게 정리한 후 통과되려면 기본 이틀 정도는 걸린다.
서류가 통과되는 순간 데카드와 엘리스는 마탑 용병 신분을 벗어던지고 온전한 퇴마부 소속이 될 수 있다.
“저희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카론이 먹던 닭 가슴살을 내려놓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알겠다. 그럼 오늘 고생 많았을 텐데 편히 쉬어라.”
원래 상급자는 이런 자리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
부원들만 불편할 뿐이니 데카드는 눈치껏 알아서 침실로 올라갔다.
데카드가 방문을 열자 창문에 편지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는데 레드 와인색의 편지지는 딱 봐도 그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선배에게-
선배. 아무래도 저는 먼저 마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할 일이 워낙 많이 쌓여 있다 보니까 저도 버텨보려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마탑 용병 퇴출 준비는 미리 하고 있을게요.
텔레포트 담당 마법사한테도 말했으니까 불편할 일은 없으실 거예요.
그럼 내일 마탑에서 봬요.
추신: 선배가 보고 싶어요.
-트리스 아드리안
또 전처럼 편지는 화르륵 불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데카드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내일 보자. 트리스.”
* * *
내일 아침 일찍 부원들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데카드와 엘리스는 올 때 타고 왔던 텔레포트 기계로 갔다.
길이 어지러워서 살짝 헤매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목적지까지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었다.
“호, 혹시! 총장님의 손님들이십니까?”
기계 담당 마법사가 데카드와 엘리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몸이 경직되고 잔뜩 긴장하며 살짝 굽어있던 허리가 곧추 펴졌다.
“맞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데카드의 깃털 코트를 보고 알아차렸는지 마법사는 친절하게 기계 안쪽으로 손짓했다.
“이쪽으로 올라가주십쇼!”
두 명이 기계 위로 올라가고 담당 마법사가 레버를 당기며 말했다.
“목적지는 마탑이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십쇼!”
마법사의 인사와 함께 둘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더니 마지아섬의 쨍쨍한 햇살이 느껴졌다.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이 익숙한 향기는 온몸을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
“트리스 님께 곧장 갈까요?”
“그러자.”
아침 식사로 토스트 하나 당기고 싶은 기분은 잠시 접어두고 둘은 마탑으로 곧장 걸어갔다.
“근데…… 뭔가 속이 좀 이상한데…….”
“어디 아프세요?”
“아픈 건 아닌데…… 속이 불편하다 해야 하나?”
데카드가 몸의 이상을 얘기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원체 내장도 튼튼해서 급하게 먹는다고 체하지도 않을 뿐더러 상한 음식을 먹어도 멀쩡한 게 데카드였다.
[마수왕님! 괜찮나!?]
[감히 누가 마수왕님에게!!]
[조용히 좀 해 봐! 멍청이들아! 마나로 마수왕님 몸 좀 쓸어보게!]
[…….]
티이라와 고오른이 안에서 날뛰는 사이 레오와 요르가 자신들의 마나를 움직여 데카드의 전신을 검사했다.
꼼꼼하게 미세 혈관들도 놓치지 않으며 전부 검사를 해보았지만, 체내의 영향은 없는 것 같았다.
“으으…….”
이제는 머리까지 살짝 찡해 오는 게 단순한 식중독이나 감기는 아닌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당장 사제한테 갈까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는 데카드를 옆에서 엘리스가 부축하며 주변에 사제들의 신전이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 정도는 아니야.”
데카드는 살짝 한숨을 쉬며 다시 원래대로 멀쩡하게 걸어갔다.
“정말 괜찮으신 것 맞죠?”
“그렇다니까.”
배가 좀 아프고 머리 어지러운 것으로 쓰러질 자신이 아니다.
데카드는 걸어가면서 자신의 몸을 계속 스캔했다.
하지만 아까 요르와 레오가 했다시피 아무런 이상도 나오질 않았다.
‘분명 외부에서 들어온 뭔가가 있을 텐데…… 설마…… 아니겠지.’
데카드는 머릿속에서 떠오른 한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가 지워버렸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몸 상태로 마탑에 들어온 데카드와 연신 그를 쳐다보며 걱정하는 엘리스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데카드.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있어요.”
엘리스의 말대로 데카드의 이마에서는 지금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마수왕님! 아프지 마라! 흐으윽……!]
[정말…… 어디가 아프신 거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으셨는데……]
[…….]
[몸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거늘……이상합니다.]
“하아…… 진짜…… 괜찮아…….”
엘리베이터 벽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으며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을 참고 있는 데카드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문이 열립니다.]
마탑의 최상층, 트리스의 업무실까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덜컹하며 문이 열리고 책상에 며칠 동안 산처럼 쌓인 파일들을 처리하던 트리스가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봤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으로 읽고 있던 파일을 집어던지고 트리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어…… 트리스…….”
마음 같아서는 반갑게 인사해주고 싶지만, 몸 상태가 도저히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조금 하다가 그칠 줄 알았던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시야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뇌가 좌우로 마구 흔들리는 듯한 이 느낌에 데카드는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몇 번 걸어가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선배!”
“데카드!!”
데카드는 쓰러지면서 정신을 잃은 듯 약간의 신음성을 내뱉으며 몸을 움찔거렸다.
* * *
“검은 깃털 코트의 남자가 마탑에 들어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진저백은 하수인에게 보고를 받고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창문 밖 마탑을 바라보았다.
마탑 안 광경이 보이진 않았지만, 놈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신음이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듯하다.
직접 듣지 못한다는 게 살짝 아쉽지만 상상하는 걸로도 너무 즐거워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하!!!”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