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각자의 과제
“캔 요리네.”
슬레이에서 삼시 세끼를 챙겨주던 캔 요리의 자극적인 냄새에 데카드가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왔다.
엘리스, 벨린다, 아스카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짝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듬고 자기 집처럼 자연스레 냉장고를 열자 한쪽 면에 캔 요리가 가득 차 있었다.
“뜨거운 물 넣어 드릴까요?”
“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스카가 자신의 캔 요리를 만들 때 쓰던 물을 마저 부어주었다.
“고마워.”
“피곤한 건 좀 어떠세요?”
벨린다가 다 만든 샐러드를 입에 넣으며 물었다.
“하암…… 좋아진 것 같아. 근데 배가 고파서 이것 좀 먹으려고.”
데카드는 말하면서 창문 밖을 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잔 것인지 바깥에는 벌써 해가 거의 다 저물고 있었고 트리스가 슬슬 돌아올 시간이었다.
‘짹짹아. 트리스한테 엘리스랑 나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데카드가 창문을 향해 손을 뻗자 까마귀 한 마리가 퍼드득 마법부로 날아갔다.
사람의 팔에서 까마귀가 생겨나는 모습에 아스카는 입을 쩍 벌렸지만 다른 두 명의 심심한 반응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으…… 우리 부장님은 도대체 뭐 하는 분이야……?”
전에 임무도 같이 다녀본 벨린다와 지금까지 줄곧 붙어 다니고 있는 엘리스에게 아스카가 소곤소곤 물었다.
“선배님은…….”
“데카드는…….”
둘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못 하는 게 없는 분이세요.”
“항상 믿음을 져버린 적 없는 사람이죠.”
말의 뜻이 같아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둘의 대답은 뒤돌아서 창문 밖 풍경을 보고 있는 데카드에게 잘 들려왔다.
칭찬에 또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에 마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수왕님은 약하다! 칭찬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오올, 네 머리에서 그런 말도 나오네?]
[…….]
마수들의 잡담을 반찬 삼아 캔 요리를 퍼먹던 데카드는 저 멀리 아까 보냈던 까마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빠르네.’
[트리스가 답장을 해주었습니다.]
짹짹이가 까마귀 다리에 묶여 있는 작은 종이를 보며 말했다.
까마귀가 창틀에 내려앉고 다리에 있던 종이를 부리로 풀어 데카드의 손에 얹어주었다.
“고맙다.”
까마귀는 다시 짹짹이에게로 돌아오고 데카드는 편지를 스르륵 풀어보았다.
선배에게.
퇴마부 숙소에서 주무시고 오신다는 얘기 잘 들었어요.
저는 호텔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 볼일 다 보시면 돌아와 주세요.
그리고 3일 이내에는 다시 마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마탑으로 돌아가면 선배와 엘리스는 마탑 전속 용병에서 빼내 드리도록 하겠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트리스의 필체로 정성스럽게 담긴 손 편지는 데카드가 완독하자마자 불타올라 잿가루로 사라졌다.
“하여간 철저하다니까.”
손에 남은 재 가루를 탈탈 털어버린 데카드는 남은 캔 요리를 마저 먹었다.
쓰레기까지 버리려고 할 때 저기 복도에서 누군가 터덜터덜 걷는 소리가 났다.
“고드윈, 잘 잤어? 몸은 좀 어때?”
아스카가 안부를 묻자 고드윈은 아직도 바이슨에게 얻어맞은 배가 아픈지 아랫배를 문지르며 카론의 다리를 치우고 소파에 앉았다.
“으으, 죽을 것 같아.”
“흐음…… 나름대로 살살 때렸는데.”
바이슨이 풀 파워로 쳤다면 그대로 몸이 이 분할로 나누어져 조각조각 떨어졌을 테니 행운인 줄 알아야 한다.
고드윈은 데카드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배의 고통은 무시한 채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부장님.”
“그래. 나도 열심히 하겠다.”
고드윈도 데카드를 퇴마부장으로 인정했고 그가 인사를 받아주자마자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맹장염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장이 꼬여오는 게 아무래도 하루 이상은 거뜬히 넘어갈 고통이다.
고드윈이 소파에서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진동에 바로 옆자리에 기절해있던 카론의 눈이 떠졌다.
“일어났냐?”
뻐근해져 오는 뒤 목과 복부를 문지르며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카론도 지금 자신이 어지럽고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카론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나 고드윈처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장님. 카론 알프레드라고 합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워.”
데카드는 곧바로 카론의 성향을 눈치 챘다.
충성을 얻어낼 때까지는 까다롭고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얻으면 절대 그 상관을 배신하지 않는 성격.
마치 레오와 비슷했다.
레오도 마수계에 있을 때 가장 계약하기가 힘들었었다.
뭔 말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벼락이 떨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본인도 말을 잘 안 하는 성격이었다.
[…….]
안에서 레오는 머쓱한 듯 시선을 조금 아래로 깔았다.
‘어쨌든 인정도 받았고……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냐가 중요한데…….’
데카드가 아사이드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3일.
그 안에 엘리스를 제외한 네 명의 부원에게 간단한 팁과 교정해야 할 부분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런 머리 아픈 문제야 자기 전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조금 급한 문제가 있다.
“우린 어디서 자?”
자신의 잠잘 곳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겠는가.
“절 따라오세요!”
주방에 있던 아스카가 앞장을 섰고 복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빈방이 두 개가 보였다.
“이쪽 방들을 쓰시면 될 것 같아요.”
“방이 깔끔하네, 아스카.”
“히힛, 제가 청소했거든요. 언니. 그럼 짐이라도 풀고 계세요!”
아스카는 다시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갔고 데카드는 아까 아스카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잡아냈다.
“언니?”
“네, 아스카와 벨린다랑 반말을 트기로 했는데 제 나이가 가장 많아서 뜻하지도 않게 언니라고 불리게 됐어요.”
남한테 언니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엘리스는 그 단어로 누군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조금 부끄러웠다.
“엘리스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고?”
실례가 되기도 하고 궁금하지도 않아 물어보지도 않았던 엘리스의 나이는 얼굴만 봤을 때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벨린다와 아스카의 나이가 적지도 않을 테고…….’
[내 생각엔 스물다섯!]
[아니다! 스물일곱이다!]
[어떻게 저 얼굴에 스물일곱이란 말인가! 스물셋이 틀림없다!]
마수들 사이에선 엘리스의 나이를 알아맞히기 놀이가 한창이었고 레오도 조용히 손가락으로 24란 숫자를 썼다.
“네, 그렇더라고요.”
엘리스는 자신도 신기한 듯 외투를 방에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둘의 방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방음도 잘 되지 않아 말을 하면 옆방으로 전부 들려왔다.
그래서 둘은 옷이나 물건들을 방에 내려놓으면서 얘기하는 게 가능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은 뭘 하실 건가요?”
“내일?”
데카드는 조금 생각하다가 급한 불을 먼저 끄기로 했다.
“부원 애들 좀 가르쳐야지.”
* * *
“다 모였나?”
“네!”
“넵!”
일렬로 선 부원들의 힘찬 대답이 들려오고 새벽의 찬 공기가 졸린 정신을 바짝 긴장시켜 주었다.
새벽은 데카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자 수련의 골든 타임이라고 불리는 때이다.
데카드는 수련을 할 때면 가장 좋아하는 잠을 포기하고 항상 새벽에 일어나 수련을 했다.
“좋아, 오늘 이렇게 새벽부터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당연히 훈련을 위해서다.”
데카드는 부원들의 앞을 왔다 갔다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나와 엘리스는 3일 후면 마탑으로 돌아가서 용병 계약을 해지하고 와야 한다. 그러면 며칠간은 너희들끼리 남겨질 텐데 그때 동안 그냥 기다리기 심심할 테니 과제를 내주고 갈 생각이야.”데카드는 어제 잠자기 전부터 고민한 이들의 과제를 하나씩 호명과 함께 말했다.
“고드윈 빌리.”
“넵!”
“너는 나와 대결을 할 때 백염의 화력으로만 밀어붙이려는 습관이 있었어. 백염은 단순한 도구일 뿐. 그걸 쓰는 네가 성숙하지 못하다면 쓰레기와 다르지 않아.”데카드의 신랄한 비판에 고드윈의 고개가 떨어진 채로 올라올 줄 몰랐다.
“그러니 앞으로 마법의 화력보다 내실을 더 신경 쓰도록.”
“알겠습니다.”
데카드는 고드윈 옆에 서 있는 아스카의 앞으로 왔다.
“아스카 멀린.”
“네!”
“너는 실전된 멀린 가문의 마법 사용법을 위주로 수련을 해라.”
멀린 가문의 마법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아스카의 표정이 싹 굳으면서 시선을 데카드와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아스카의 반응을 본 데카드가 말했다.
“멀린 가문의 마법이 전부 실전된 것은 아닐 텐데? 마법부가 전해 준 몇 가지가 있을 거다.”
“그건 맞는데…… 저는 멀린 가문의 마법을 쓰지 못 해요.”
“뭐?”
“아스카의 몸에 퍼진 저주는 활동을 멈추고 잠들어있지만 멀린 가문의 마법을 쓸 때마다 깨어나서 아스카를 죽여가고 있어요.”
입을 열지 못하는 아스카를 대신해 벨린다가 대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핏속에 녹아내린 저주…….”
흑마법사의 저주 중 가장 끔찍한 종류이자 절대 용서받아서는 안 될 죄악의 저주였다.
그러나 데카드는 집행관 시절 흑마법사의 기록 중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후손 대대로 내리는 저주를 풀 방법이었지.’
그때의 데카드도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니 해석이 가능했다.
“아스카.”
“네, 부장님.”
살짝 낮아진 톤의 아스카가 힘 빠진 대답을 해왔다.
“만약. 너에게 걸린 그 저주를 내가 풀 수 있다면 어떻겠어?”
“저, 정말 부장님이 풀 수 있다고요……?”
그 말을 들은 아스카와 나머지 부원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데카드를 바라봤다.
지금껏 수많은 마법사들이 이 멀린 가문의 저주를 풀려고 노력해 왔지만 어림도 없었다.
오히려 저주는 나아지는 것 없이 악화됐고 그렇게 멀린 가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런 저주를 지금 데카드가 해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부장님이 하라는 것은 다 할 수 있어요! 멀린 가문의 마법을 숨 쉬는 것처럼 할 수 있다고요!”
“좋아. 그렇다면 내가 너의 저주를 풀어줄게. 하지만 명심해야 해. 이 방법은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고 네가 중간에 고통으로 혼절하면 넌 영원한 폐인이 될 거야.”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리스크였지만 아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하고 있어요.”
“좋아. 아스카는 조금 있다가 나를 보도록 하지.”
데카드는 아스카 옆에 있는 벨린다에게 왔다.
“나는 아직 너의 실력을 보지 못했다.”
“네.”
“그래서 당장 생각해 온 과제는 이거다.”
데카드는 가져온 바구니에서 물통과 손바닥보다 작은 물 잔을 꺼냈다.
쪼르르-
물 잔 위에 물을 가득 담았고 그것을 그대로 벨린다에게 건넸다.
“이걸로 뭘……?”
당연히 벨린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데카드는 검과 물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신 위에 물 잔을 올리고 공중에 띄워라. 그리고 떨어지는 물 잔을 검신으로 받는데 안에 들어있는 물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
말로 들어서는 절대 가능해 보이지 않고 실제로 해보면 더더욱 가능해 보이지 않는 과제를 덜컥 쥐어준 데카드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카론은 그 속도가 아주 인상적이더군.”
“감사합니다.”
“마법으로는 주로 어떤 속성을 다루나?”
“강철 속성입니다.”
강철 속성은 그 뛰어난 방어력과 한 방의 공격력으로 마니아 층이 확실한 속성이다.
단단하고 고지식한 성질이 카론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강철 속성의 마법 중 아이언 커팅이라는 마법이 있다. 그 마법은 강철의 모양을 자신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이지.”
“그 마법을 연마하란 말씀이시군요.”
“바로 맞췄다.”
엘리스는 나중에 따로 알려주면 되고 이제 남은 건 아스카의 저주 해독이다.
“아스카는 날 따라와.”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