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호칭 정리
“……!!”
카론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데카드가 잠깐 당황했다가 다시 정신을 빠르게 추스르고 기감을 넓혔다.
카론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깔린 잔디가 휘리릭 휩쓸렸고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건지 여전히 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고 있다.’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데카드의 감각은 속일 수 없다.
공터에 마나를 얇게 뿌린 데카드는 점점 카론의 속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네가 왜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간파했어.”
헤이스트라고 보기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지만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고 카론의 위치를 정확히 잡았다.
후욱-!!
카론의 강철 장갑을 낀 주먹이 데카드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냥 죽일 생각으로 때렸군.’
저 정도의 스피드와 장갑의 단단함이라면 사람의 머리 정도는 두부처럼 으깰 수 있을 것이다.
카론은 자신의 속도를 알아챈 데카드에게 살짝 놀란 표정을 내보였다가 다시금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주먹을 날렸다.
“너의 주특기는 마투학인가?”
마검학이 무기를 사용한다면 마투학은 신체를 무기처럼 사용해 상대와 싸워나가는 학문이다.
카론은 대답 없이 주먹을 펴고는 이번엔 손날로 데카드의 목을 그어버릴 듯 사선으로 내리쳤다.
슈아악 하며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데카드의 고막이 웅웅거렸다.
‘이동 속도뿐만이 아니라 주먹이나 발차기 속도도 굉장히 빠르군.’
조금만 기감이나 눈에 힘을 뺀다면 잔상으로 남을 정도로 빨랐다.
처음 데카드가 이 속도에 익숙해지지 않고 눈이 아니라 기감으로 먼저 정보를 획득하지 못했다면 당했을 것이다.
[이제는 제 도움 없이도 잘하시는군요.]
원래라면 슬레이의 현상금 사냥꾼 때처럼 짹짹이의 도움이 필요했을 작업이었으나 서클이 높아진 지금은 혼자서도 가능해졌다.
[짹짹이! 마수왕님도 성장한다!]
[그래! 너무 애기 취급하지 말거라!]
짹짹이는 그렇게 말하는 둘을 무시하며 데카드와 카론의 대결을 계속 지켜보았다.
마투를 전문적으로 배운 티가 나는 카론의 움직임은 주먹이나 발차기, 둘 중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괜찮네.’
데카드 또한 카론에게 맞춰 소환술을 쓰지 않고 같은 마투로 대응해 주고 있었다.
학창 시설 부전공으로 마투학을 배웠기에 데카드도 어느 정도 이 학문에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드는 조금씩 카론의 전투 스타일이 몸에 익어가기 시작했다.
카론의 공격을 데카드는 대부분 흘리거나 방어했고 그러다가 이따금 유효 타도 허용해 주고 말았다.
퍼억-!
오른팔로 날아온 주먹에 데카드가 미처 흘리지 못하고 충격을 전부 받아버렸다.
“크윽…….”
속도가 담긴 강철 주먹의 위력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약간의 침음을 삼킨 데카드가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카론과 거리를 두었다.
“언제까지 맞고만 있을 겁니까.”
맞은 팔을 감싸고 내상을 확인해 보는 데카드를 내려다보며 카론이 말했다.
“크하하…… 미안하다. 노안이 온 건지 이제야 반응이 되네. 역시 나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스타일인가 봐.”
데카드의 눈을 본 카론이 멈칫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공격한다.”
가드를 올린 데카드가 천천히 다가왔다.
풋 스텝이나 속도가 전혀 없는 그저 걸음걸이에 가까웠지만, 카론은 어찌 된 건지 그것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무언가 달라졌다, 이 남자.’
카론도 한 명의 복서처럼 가드를 올리며 벌어진 팔의 틈으로 데카드의 움직임을 보았다.
‘마투학의 기본은 회로에 마나를 고르게 피는 것에서부터 시작.’
데카드의 급류처럼 쏟아지던 마나가 조용한 호수처럼 정갈하게 회로를 감싸 안아 갔다.
마나를 몸에 담으면 담아낼수록 신체 능력은 본래보다 강해지고 빨라지게 된다.
마수들과 데카드의 마나가 몸 곳곳에 스며들며 그 방대한 양의 마나가 마투를 위해서만 움직였다.
후우욱-!!
데카드의 군더더기 없는 스트레이트.
허리를 비틀며 날린 스트레이트가 카론이 가드하고 있는 얼굴을 갈겼다.
양 팔뚝으로 가드하고 있었던 카론은 팔에서 오는 격통과 함께 씨익 웃는 데카드의 얼굴을 보았다.
‘봐줬다는 건가.’
카론은 데카드의 주먹을 놓치고 말았고 그가 가드하고 있지 않은 복부나 하체로 충분히 데카드가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카드는 일부러 카론이 방어하고 있는 얼굴로 공격을 내질렀다.
카론이 속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다시 간다.”
데카드가 방금 전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이번에는 레프트 훅을 카론의 복부로 꽂아 넣었다.
“크흑……!”
이번에도 역시 반응하지 못한 카론은 순간 쉬어지지 않는 숨 때문에 뇌로 공기가 들어오지 않아 앞이 깜깜해졌다.
“잠깐 누워 있고 조금 이따 보자!”
“자, 잠깐.....!”
카론의 뒷목을 손날로 강타하자 그는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힘을 잃고 쓰러졌다.
카론을 업기 위해 오른팔을 움직이려는 찰나 느껴지는 고통에 데카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으! 감히 마수왕님의 옥체를……!!]
[…….]
'아니야. 내가 부족했던 거지.'
마수들이 길길이 날뛰는 것을 잠재우고 데카드는 카론을 업어 멍하니 광경을 지켜보던 아스카와 벨린다, 엘리스에게 걸어왔다.
“이제 인정하냐?”
벨린다야 원래부터 데카드가 퇴마부장을 하는 것에 대해 의의가 없었고 남은 세 명 중에서 지금 유일한 정상인 아스카에게 물었다.
“물론이에요.”
아스카는 이런 사람이 자신들의 대장이라는 소리에 눈을 빛내며 카론을 업은 데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우 개무겁네.”
기절한 카론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피곤한 몸을 잠시 의자에 뉘이자 벨린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선배님? 아, 아니 퇴마부장님.”
“그냥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불러.”
데카드가 조금이라도 피곤을 죽이기 위해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선배님,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선배와 헤어지고 루비아에서도 퇴마부로 발령받고 나서도 강해지기 위해 피를 토하며 노력했어요.”
데카드의 한쪽 눈이 반쯤 떠지며 검을 쥐고 있는 벨린다를 바라보았다.
“그 힘을 시험해 보고 싶다…… 이거지?”
“네, 맞아요.”
그녀가 다루는 번개처럼 찌릿찌릿한 투기가 데카드의 투쟁심마저 자극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 투쟁심을 이기는 피곤함 때문에 이 의자에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내일이나 아니면 저녁 때 하면 안 되겠어?”
“아!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연이은 대결로 쌓인 데카드의 피로를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은 벨린다는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왔다.
“뭐라셔?”
“지금은 쉬고 다음에 상대해 주시겠데.”
서로는 이미 반말을 튼 사이인지 아스카와 벨린다는 허물없이 서로에게 야, 너 거렸다.
그런 모습을 빤히 뒤에서 지켜보던 엘리스는 버릇 때문에 소리 소문 없이 유령처럼 다가왔다.
“저기.”
“아악! 깜짝이야!”
엘리스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아스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유적 때부터 알고 지낸 벨린다는 익숙한 듯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저하고도…… 같이 반말해 주실 수 있나요……?”
부끄럽고 쑥스러운 듯 손가락을 배배 꼬는 엘리스는 못 남성들의 애간장과 마음을 녹여내기 충분했다.
“당연하죠! 엘리스 님은 몇 살이에요?”
아스카가 너무 귀여운 엘리스를 안고 방방 뛰며 물었다.
“저는 26살이에요.”
엘리스가 나이를 밝히자마자 장내에는 왠지 모를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어, 언니시네요.”
“그, 그러게.”
자칫하면 10대로 보이는 엘리스의 얼굴 탓에 당연히 자신들보다 어릴 줄 알았다.
동갑에 벨린다와 아스카는 예상외의 결과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그럼 저희가 언니로 부를게요! 언니!”
“좋아요, 언니.”
갑자기 동생 두 명이 생겨버린 엘리스는 무언가 핀트가 어긋났다는 걸 느꼈다.
“아, 아니에요! 언니는 무슨. 그냥 반말로 편하게 해주세요.”
“나는 좋은데요? 아!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아스카가 의견을 냈다.
그녀의 의견은 말은 반말로 하고 호칭만 언니로 부르는 것.
“좋네.”
벨린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고 아스카는 툭하면 귀여움을 마구 활화산처럼 뿜어내는 엘리스를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때, 언니?”
“조, 좋은 것 같아.”
엘리스도 그녀들의 눈을 피하며 조용히 동의했고 아스카는 어떻게 이 귀여운 언니를 놀려 먹을지 벌써부터 기대됐다.
“그럼 언니는 잘하는 게 뭐야?”
아스카가 벤치 등받이에 턱을 괴며 엘리스에게 물었다.
“암살이나 암습, 정보 수집, 정보 위조, 변장.”
“와아…… 완전 뒷골목 스타일이네!”
아스카는 엘리스의 말에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 싱글벙글했다.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사람치곤 굉장히 밝은 모습에 아스카는 또 질문 세례를 쏟아냈다.
“애인은 있어?”
“아, 아니…….”
“좋아하는 음식은?”
“토마토 파스타.”
“좋아하는 취미는?”
“단검 던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데카…… 헙……!”
엘리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스카는 월척이다 하는 어부의 표정으로 얼굴을 엘리스에게 들이밀었다.
“데카……?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네? 우리 퇴마부장님이랑 이름이 비슷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그만해, 아스카.”
이제는 조금씩 울먹거리려 하는 엘리스를 보고 벨린다가 아스카를 말렸다.
“하하핫! 하지만 이 언니가 너무 귀여운 걸 어떡해!”
아스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엘리스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히힛! 미안해 언니!”
“대, 대신 비밀로 해주기야……?”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코를 킁 하며 먹어가면서도 비밀로 해달라는 엘리스의 말에 아스카는 콧김을 훙훙 뿜었다.
“으으! 못 참겠어! 너무 귀여워!”
“넌 좀 참아야 해.”
벨린다가 아스카를 한쪽 어깨에 업고 숙소로 걸어갔다.
“언니. 저녁 먹을래?”
해도 조금씩 지고 있는 지금은 저녁 먹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데카드가 먹겠다고 하면 먹을게.”
“알았어.”
“헤헤헤. 귀여운 언니.”
벨린다가 아스카와 함께 숙소로 들어가고 잠시 엉망이 된 공터를 보고 있던 엘리스도 따라 들어갔다.
숙소 거실에서는 소파에 카론이 아직까지 기절해 있었고 그 옆에는 데카드가 기절한 듯 자고 있었다.
“으음……. 곧 깨어나실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숙소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인 셋은 기절한 남자들을 보며 일단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오늘은~ 뭘 먹을까요~”
아스카는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고를 열어보았고 가득 차있는 재료들 중 캔 요리를 꺼냈다.
저녁은 이렇게 대충 때우는 성격인 아스카와 달리 벨린다는 여러 가지 야채나 과일을 꺼내 체계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저녁은 이렇게 다 따로 먹는 건가?”
한 명은 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고 한 명은 야채와 과일을 손질하며 샐러드를 만들고 있었다.
“응! 다들 입맛이 달라서 이게 편해! 한 명이 준비하면 그 사람이 많이 힘들기도 하고. 언니도 캔 요리 먹을래?”
“아니야. 언니는 분명 이 닭 가슴살 샐러드를 원할 거야.”
“야! 그런 풀떼기를 너 말고 또 누가 좋아해!”
둘이 음식 가지고 투닥투닥 싸우는 걸 잠시 바라보고 있자 의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암…… 잘 잤네.”
몸을 한 번 쫘악 펴서 굳은 관절을 펴낸 데카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