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서로간의 첫인상
“이, 이건 너무한 것 아니오!”
계약서 내용을 본 라지오가 발끈하며 대꾸했다.
“어쭈? 그게 싫으면 난 그냥 갈게.”
“자, 잠깐만! 내가 언제 싫다고 했소! 조, 좀 너무한 것 같다 했지.”
라지오가 죽음의 공포도 순간 잊어버리고 대든 계약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계약서-
1. 데카드(갑)는 라지오(을)에게 절대적 명령권을 가진다.
2. 라지오(을)은 자신의 나라에서 흑마법사들을 직접 잡아 죽이기 위한 추적대를 만든다.
3. 생포한 흑마법사들에게서는 유물과 그분이라는 키워드로 심문을 한다.
4. 심문의 내용은 철저히 비밀로 한 채 모두 데카드(갑)에게 보낸다.
5. 계약서 내용은 절대 비밀이며 어느 누구도 이 계약서 내용을 알아선 아니 된다.
거의 노예 계약서와 다름없어 보이는 이 종이에 결국 사인까지 마친 라지오는 데카드를 조심스럽게 올려보았다.
애초에 지금 자세가 양발과 한쪽 손이 얼음에 묶여 있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제 알들을 없애 주시게!”
“알들은 동면 상태로 머무를 거야.”
“이,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내가 언제 없애주겠다고 했나?”
라지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 가고 세상 더러운 오물을 본 것 같은 눈으로 데카드를 쳐다봤다.
저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니 데카드도 살짝 무안해져 헛기침을 살짝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동면 상태니까 깨어나거나 네 피를 먹거나 그러지 않아. 하지만 네가 그 계약서 내용을 지키지 않는다면 혹시 모르지.”
데카드는 계약서를 챙기며 연무장을 빠져나왔고 그곳에는 멍한 라지오만이 우두커니 남겨져 있었다.
* * *
아침은 빠르게 찾아오고 단검 제작자와 연무장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 또한 빠르게 오고 있었다.
트리스는 잠시 마법부로 잔업 처리할 게 있다며 갔고 데카드와 엘리스만이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왔다.
연무장 안은 어제의 그 소란이 일어난 곳이라고는 믿기 어렵게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일은 잘 끝내셨어요?”
“당연하지.”
잘 끝내다 못해 왕자 노예 한 명을 구했다.
데카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잠시 엘리스와 구석 벤치에 앉아 단검 제작자를 기다렸다.
[문이 열립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서 성인 남성 키의 절반 정도까지 오는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는 게 두 팔로 드러나는 우람한 근육질 팔과 길게 길러 단정하게 묶은 수염은 이들이 누군지 설명해주었다.
“드워프.”
광물의 사랑을 받는 종족으로 대장장이 일에 천부적인 소질과 재능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이름난 무구들을 만들었다.
지금 전 세계에 명검이다 최고의 갑옷이다 하는 것들은 전부 드워프가 만든 것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드워프고 이름은 브란이라고 합니다.”
“데카드 아르마다입니다.”
“엘리스예요.”
상대가 정중한 자세를 취하며 나오니 막가파인 데카드도 고개를 숙이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엘리스의 인사도 끝이 나고 브란은 등에 멘 커다란 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총장님의 부탁이니 드워프 무구점 점장인 제가 직접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민폐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민폐라니요. 그 덕에 저희 가게에서는 좋은 철과 나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도 전혀 손해 본 게 없지요.”
“그렇군요.”
브란은 가방에서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가져온 광석 주괴들과 단검들의 설계도를 내려놨다.
“혹시 두 분 중에 단검을 쓰실 분이?”
“저예요.”
“아아. 아가씨 쪽이었군요. 그럼 오늘 해야 할 것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스는 귀를 열고 경청했다.
“오늘은 단검의 맞춤 제작을 위해 사용자와 알맞은 광석을 정하고 또 적당한 단검의 길이도 알아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단검의 모양까지 정하면 됩니다.”
“할 게 많네요.”
“하핫! 저희가 원래 만들어 둔 단검을 드리는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맞춤 제작이니 이 정도 노력은 당연합니다.”
데카드는 잠시 벤치에 앉아 둘을 구경하고 엘리스는 브란이 모포 위에 늘어놓은 광석들을 손으로 두드려봤다.
하나같이 품질이 좋아 빈틈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강력한 힘과 만나더라도 부서지지 않을 재료가 이 중에 있을까요?”
“부서지지 않는 광석이라…… 그렇다면 이놈이 적절하겠군요.”
브란은 엘리스의 요구 사항을 들으며 한 주괴를 들었다.
“이놈의 이름은 블랭슘. 강철보다 열 배는 가볍지만 백 배는 강한 내구도를 자랑하며 들어온 힘을 담지 않고 입자 단위로 분산을 시키죠.”
“그럼 결과적으로는 절대 부서지지 않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대포가 이 주괴를 코앞에서 쏴도 부러질 걱정이 없죠.”
“그럼 재료는 이것으로 할게요.”
단검의 재료는 블랭슘으로 결정이 되었고 아마 이것만으로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데카드가 알기에도 블랭슘은 굉장히 희귀해 많이 갖고 있는 대장간이 드물고 다루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만들기만 하면 최소 명검 취급을 받기에 이름난 검사들이 애용하는 소재다.
“이왕 블랭슘으로 만드실 거면 이 옵션을 추가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건데요?”
“자동 회수 기능입니다.”
자동 회수 기능은 단검을 던졌을 때 자신이 스스로 돌아오게 하는 기능이다.
가격이 싼 단검들은 그냥 휙휙 던지고 버리면 되지만 블랭슘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는 건 매우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옵션 중에는 전자기력을 이용해 자석처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네.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브란은 돈 벌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원하시는 단검의 길이가 어느 정도 인가요?”
“으음…… 딱히 생각은 안 해봤는데…….”
단검의 길이야 어찌 됐든 한 번 그립을 만진 순간 엘리스는 곧바로 그 단검에 적응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 이 정도?”
자신이 썼을 때 가장 편한 길이를 떠올린 엘리스는 양손을 펼쳐 대략적인 길이를 말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브란은 그 작은 표현으로 이해가 되는지 가져온 노트에다가 슥슥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어느새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이제 단검의 모양을 정해 주시면 됩니다.”
브란은 묶어둔 설계도를 쫙 펴내며 다양한 단검의 모양을 제시했다.
화려한 장식용 단검부터 투박하지만 그 멋이 살아있는 특이한 단검도 존재했다.
엘리스는 자신이 앞으로 평생을 쓸 단검이라 생각하며 신중하게 고민했다.
“저는 이걸로 할게요.”
엘리스가 고른 모양은 선이 깔끔하게 떨어지면서도 끝이 예리하게 모이는 유려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앞으로 딱 2주일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원하시는 주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일단 마탑으로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브란은 창고에 박혀두었던 블랭슘도 두드리고 돈도 왕창 벌 생각에 다시 가방을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럼 우리도 이제 일하러 갈까?”
“좋아요!”
트리스의 잔업은 아마 호텔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일 테니 자신도 이렇게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퇴마부의 팀원들을 이제 슬슬 만나볼 차례다.
* * *
“여기가 맞을 텐데…….”
젠킨스가 알려준 퇴마부원들의 숙소는 여기 주소가 맞았다.
“굉장히…… 황량하네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한 엘리스가 황량하다라는 단어로 이 풍경을 말했다.
퇴마부원들의 숙소는 주변 1km에 민가가 없었고 상점가 또한 없었으며 수련을 위한 공터만이 즐비했다.
공터에는 방금까지도 수련을 했는지 마나의 잔향이 깊숙이 묻어있었고 약간의 탄내가 진동했다.
“첫 인상이 중요한데 말이야.”
첫인상에 대해 생각해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엘리스는 내 첫인상이 어땠어?”
“데카드의 첫인상이요?”
“응.”
주머니에서 막 꺼내졌을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시야가 어질어질 거렸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페일이 준 캔 음식을 먹고 나서야 제대로 된 데카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 본 데카드의 얼굴은…….
“약간…… 한량 같았어요.”
“한량?”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데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수왕님! 한령이 뭐냐?]
[한량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봅니다!]
[뭐겠어요! 그냥 엄청 잘생기고 강한 남자란 뜻이겠지!]
[…….]
[하하하…… 주인님이 살짝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요.]
여기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짹짹이만이 한량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조금씩 웃어댔다.
“한량처럼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그, 그래도! 나중에는 확 바뀌었어요! 조금 양아치 같은 면도 있는데 영웅적인 면도 있어서…….”
엘리스는 말을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 나는 그런 거에 신경 안 쓰니까.”
데카드는 눈을 내리깔고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만지작거리는 엘리스의 뒤통수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강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풀어지듯 엘리스의 표정이 녹으며 몸에 들어간 긴장이 빠져나갔다.
“이제 들어가자.”
잡담을 나누다 보니 벌써 퇴마부 숙소의 문 앞이었다.
데카드가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네, 나가요.”
택배 받으러 오듯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에는 무게가 많이 담겨있지 않았고 목소리도 익숙했다.
덜컥- 끼익-
문이 열리자 안에서 짙은 청발의 여자가 칫솔을 입에 물며 놀란 눈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벨린다!”
엘리스는 정말 오랜만에 본 친한 친구에게 와락하고 안겼고 벨린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안겨오는 그녀를 따라 안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뭔 어쩐 일이야. 일단 들어가자.”
밖이 쌀쌀해서 더 있기가 싫어졌다.
막무가내로 일단 들어온 데카드와 엘리스는 안쪽을 둘러보았다.
“건물도 새로 지었나 보네.”
건물 자체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약간의 페인트 냄새와 새로 뜯은 나무의 향이 코를 간질였다.
조금 더 깊숙한 실내로 들어가자 명상을 하고 있는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모두 데카드가 프로필 사진으로 본 퇴마부의 팀원들이었고 이름과 얼굴을 외워두었기에 벌써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벨린다와 등장한 외부인 두 명에 명상을 하고 있던 이들의 눈이 떠지며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왼쪽에서부터.”
데카드가 먼저 입을 열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데카드는 검지로 한 명 한 명 지목해 가며 이름과 특징을 말했다.
“아스카 멀린. 멸문당한 멀린 가문의 후예.”
보라색 머리의 여자는 흠칫 놀란 표정과 함께 눈이 살짝 커졌다.
“다음은 카론 알프레드. 흑마법사에게 실험체로 잡혀있었지. 또 그 실험으로 5서클을 이루어내고 말이야.”
눈에 안대를 끼고 머리를 틀어 올린 남자는 처음과 크게 얼굴이 달라지지 않았다.
“벨린다는 전 집행관.”
벨린다야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으니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넘어갔다.
“고드윈 빌리. 백염의 사용자. 지금까지 내가 틀린 게 있나?”
장내에는 적막이 감돌았고 이 중에 유일하게 데카드와 친분이 있는 벨린다가 손을 들며 물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 않나, 벨린다.”
카론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이 생각한 정답을 얘기했다.
“우리를 이끌러 온 퇴마부장. 맞으십니까?”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