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도둑
발을 콩콩 구르며 요르는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어필했지만 봐주는 데카드가 없어 그만두었다.
“나 빼고 짠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 혼자 바위를 낸단 말인가.
이건 지금 자신을 놀려먹기 위한 나머지 마수들의 계략이라고 믿으며 요르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건물이 하도 높아서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쳇.”
요르가 혀를 차고 엘리베이터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도중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금발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도 아래층에 볼일이 있는 것인지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렸다.
“응?”
그러다가 문득 옆에 있는 백발의 여자, 요르를 본 남자는 눈이 뒤집어졌다.
‘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했다니……!’
요르의 인간형은 조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미(美)라는 개념을 전부 때려 박은 완성체다.
당연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기에 나올 수 있는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무조건 내 침대로 데려간다!’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가져야만 직성이 풀렸고 그것이 가능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갖고 싶은 게 땅이든 건물이든 여자든 그의 아버지에게 부탁만 하면 다음 날 이뤄져 있는 게 남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루해져 아사이드에 휴가 차 놀러 왔는데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지금 앞에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남자가 요르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산타가 일찍 온 게 틀림없군요. 당신이라는 선물을 제게 주고 갔으니.”
갑자기 웬 처음 보는 오징어가 자신에게 붙으며 해괴한 말을 해대자 요르는 남자에게 이빨을 박아 넣기 위해 송곳니를 세웠다.
‘아, 잠깐만.’
데카드의 안에 있을 때 붉은 머리 암컷이 여기 있는 사람들과 절대 싸우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이 남자를 죽이거나 다치게 만든다면 결국 그 피해는 자신의 주인인 데카드에게 온전히 돌아갈 것이다.
“하아…….”
요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남자를 철저히 무시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극서쪽에 있는 나라인 사라비의 셋째 왕자, 라지오입니다.”
“…….”
요르는 레오가 빙의한 것처럼 무표정과 침묵을 이어나갔다.
“아름다운 미녀 분께서는 혹시 이름이?”
“…….”
계속 요르에게서 대답이 없자 라지오는 피식 웃으며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뭘 원하는지 알겠군.”
곧 그의 손에서 아공간 주머니 하나가 딸려 나왔다.
“돈? 돈을 원하나? 이런 것이야 마음껏 줄 테니 나의 아내가 되어라. 밤새도록 귀여워해 주지.”
[문이 열립니다.]
기다렸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요르는 라지오를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대답은 하고 가야지.”
그러자 요르의 손을 잡으며 라지오가 요르를 막았다.
“이거 놔라.”
손을 못 대니 지금 요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분노를 억제하는 것과 이런 작은 경고뿐이었다.
“못 놓겠다면? 지금 이대로 내 방에 가서 널 가져야겠다.”
라지오는 보지 못했지만, 순간 요르의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지며 사람의 것이 아닌 뱀의 것으로 변했다.
‘참아야지.’
참지 못하고 라지오를 먹어버릴 뻔한 요르는 겨우 참으며 다시 인간의 눈으로 돌아왔다.
“놔.”
결국 힘으로 라지오의 손을 뿌리쳐 낸 요르는 아직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콰앙-!
그러자 라지오는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발로 차버렸다.
그 충격으로 계기판에서 약한 전류가 튀며 엘리베이터의 불이 꺼졌다.
“……뭐 하는 짓이야.”
“나한테 거스르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수락을 하거라.”
“나는 이미 임자가 있어.”
“크하핫! 그놈한테 돈 몇 푼 쥐어 주면 너는 그냥 버려질 것이다. 그렇게 해줘야 울면서 내 발가락을 핥을 것이냐?”
요르는 라지오보다 지금 이 망가진 엘리베이터가 훨씬 더 신경 쓰였다.
엘리베이터는 지금 이거 한 대뿐이라 계단을 이용하게 되면 너무 오래 걸린다.
아직도 요르가 힐끔힐끔 엘리베이터를 보고 있자 라지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와 당장 방으로 가자. 일생에서 겪어본 적 없는 천국을 보여주지.”
또다시 요르의 손을 억지로 붙잡고 끌고 가려는 걸 그녀는 힘으로 계속 버텼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인간 따위 우습게 죽일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한이었다.
스아아아-
한기처럼 으슬으슬하고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 라지오의 전신으로 번져갔다.
“밥 가져오랬더니 뭐 하는 것이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어디서 길이라도 잃은 게 아닌가 하며 나와 봤는데 처음 보는 남자가 요르를 겁박하고 있었다.
“뭐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데카드의 살기가 점점 더 기세를 높여 나가며 천장에 달려있는 전등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마, 마수왕님! 그것이 아니라…….”
천장의 전등이 깜빡깜빡 꺼졌다 켜지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살기와는 다른 위압감에 라지오는 순간 자신이 압도된 듯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는 왕자였다.
압도 당해야 할 건 자신이 아닌 저 남자다.
“저놈이 너의 임자냐?”
요르의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니 라지오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어이! 네놈의 여자를 내가 사겠다. 얼마면 나한테 팔 건가?”
데카드의 가라앉고 무거워진 눈에서는 이제 일말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 엄청 화나셨다……!’
평소 익살스럽고 여유로운 성격을 가진 데카드가 이렇게 눈에서 생기를 없애고 살기를 정제하지 않는다는 건 그가 정말 화났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화를 내는 건 1000년의 세월에서도 잘 없던 일이었다.
“귀머거리인가?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원래라면 너 따위가 나한테 말을 붙이는 게 쉬운 게 아니야. 그냥 이년을 뺏어갈 수도 있는데 값을 쳐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요르.”
“네, 네! 마수왕님!”
데카드가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밥을 가져오라 했지 외간 남자한테 붙잡히라 했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
데카드는 팔을 들고 검지를 펴서 라지오를 가리켰다.
“좋게 말하고 있을 때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뭐라고?”
“뇌가 딸리는 것 같아서 쉽게 말해 주자면 꺼지라고. 당장.”
데카드는 그 말을 끝으로 라지오의 손에 잡혀 있는 요르에게 팔을 벌렸다.
“헤헤헷!”
당연히 요르는 라지오 따위 뒤도 안 돌아보고 버리며 데카드의 품에 포옥 안겼다.
“저는 마수왕님이 제일 좋아요. 평생 안 떨어질 거예요.”
라지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눈앞에 있는 건 뭐든 부서버리고 싶은 듯 보였다.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데카드는 요르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준 후 귓속말을 했다.
귀 안으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오자 요르의 동공이 풀어지며 순간 기절할 뻔했다.
“아, 알겠어요.”
요르는 데카드의 품을 벗어나 복도의 어딘가로 뛰어갔다.
“네놈이 나를 결국 능멸하는구나!”
“네가 누군데.”
라지오는 듣고 놀라지 말라는 듯 짐짓 위엄 있게 목소리에 톤을 낮추며 말했다.
“나는 사라비의 셋째 왕자, 라지오다!”
“첫째도 아니고 계승권도 없는 셋째 따위가 이렇게 나대?”
데카드가 주먹을 움직일수록 뚜두둑 하는 무서운 소리가 나 점점 죽음이 엄습해 오는 기분이었다.
“계, 계승권이 전부인 줄 아느냐! 나에게는 막대한 양의 황금과 땅이 있다!”
“고작 그런 걸로 내 소유물을 뺏어가기엔 무리지. 그리고 한낱 재물로는 지금부터 벌어질 상황을 막을 수 없어.”
데카드는 천천히 라지오에게 다가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을수록 살기가 더 거세지자 라지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지, 지, 지금 나를 건드리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네가 나의 물건을 건드렸다. 그래놓고 무사할 것 같나.”
꽈아앙-!!
데카드의 일권이 그대로 라지오의 복부를 날려버렸다.
그대로 튕겨져 나간 라지오는 철푸덕 쓰러지며 망가진 엘리베이터 안으로 골인했다.
“마수왕님! 명령대로 CCTV라는 것은 전부 망가뜨렸어요!”
“잘했어. 그리고 잠깐 이리 와 봐.”
“왜 그러세요?”
요르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앞으로 달려왔다.
인간계로 넘어온 후 너무 요르에게 소홀해진 것 같았다.
그런 사과의 의미로 데카드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앞으로는 저런 놈들이 있으면 나한테 신호를 보내. 알았지?”
“헤으응…….”
요르는 대답하지 못하고 온몸에 차오르는 쾌감과 행복감에 기절하고 말았다.
“얘도 참.”
평소에는 그렇게 엉겨 오기에 한 번 해줬는데 이렇게 기절해 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데카드는 그녀를 다시 자신의 안쪽에 넣으며 망가진 엘리베이터를 보았다.
“쯧. 밥 먹으려면 또 기다려야겠네.”
그렇게 방에 다시 들어가려던 찰나 복도에서 들린 커다란 소리에 나온 트리스, 엘리스와 마주쳤다.
“방금 그 소리 선배가 낸 건가요?”
“그렇게 됐어.”
엘리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퍼질러진 자세로 기절한 보석 투성이 남자를 보았다.
“저 남자가 데카드와 관련이 있나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데카드는 애매하게 대답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호텔에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사고를 쳐버렸으니 혼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셨겠죠. 저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마탑은 전 세계로 마도구 유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왕자라도 그 점을 잘 흔들어주면 그곳의 왕은 알아서 꼬리를 내릴 것이다.
트리스가 수정구로 어딘가에 연락하고 있는 사이 엘리스는 아직 그의 얼굴에 남아 있는 미약한 분노를 느꼈다.
“화가 많이 나셨네요.”
“어쩌다 보니.”
데카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자신이 이렇게 화낼 줄 몰랐다.
“저 남자가 데카드를 깨워서 그랬나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것 가지고 내가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 놓겠어?”
엘리스가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단잠을 방해했단 이유로 상대를 원 펀치 KO시키다니.
세상에 그런 사이코가 어디 있나.
“저 남자가 그럼 뭘 잘못했는데요?”
“내 물건에 손을 댔어.”
“아아, 도둑이었군요. 생계가 딱히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 데카드의 물건이 엄청 귀해 보였나 봐요.”
“그럼. 귀하지.”
마수계에 네 마리뿐인 지배자급 마수로서 차원의 한 방향을 관리하고 신처럼 군림했던 마수다.
곧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호텔 측 인원들이 계단으로 부랴부랴 올라오며 라지오를 치우고 엘리베이터를 뚝딱뚝딱 고쳤다.
“정리는 제가 할 테니까 선배는 들어가세요.”
“미안. 수고 좀 해줘.”
“걱정 마세요.”
데카드는 방에 들어와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마수왕님! 밥하고 요르는?”
“아무래도 밥은 조금 있다가 먹어야 할 것 같아.”
엘리베이터가 고쳐지면 딱 배달이 가능한 8시 이후가 되니 방으로 직접 음식이 올 것이다.
“히이잉…….”
티이라는 밥이 늦게 온다는 사실에 침울해하며 그동안 주린 배를 달래줄 냉장고로 걸어갔다.
요르를 다시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고 서재로 가자 짹짹이가 의자에 앉아 옆에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책은 재밌어?”
“나쁘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읽던 책 중에 꽤나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짹짹이가 쌓여 있던 책 중 하나를 꺼내서 데카드에게 내밀었다.
[고대의 유물]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