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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73화 (73/208)

073 달밤에 파도 속 산책

마탑의 교수들은 처음 보는 트리스의 모습에 말문과 사고 회로가 막혀버려 둘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흐아앙! 진짜 제가 얼마나 차원을 뒤져가면서…….”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뚝 그쳐.”

트리스는 품에 안긴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고 데카드는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크흠…… 일단 흑마법사들을 빨리 연행해 갑시다.”

다들 트리스와 데카드에게 집중된 시선 탓에 가장 관심받아야 할 흑마법사들이 묻히고 있었다.

시안이 헛기침과 함께 마법으로 온몸이 결박된 흑마법사들을 일으켜 마탑으로 돌아갔다.

시안이 먼저 움직이자 다른 교수들도 정신을 차리며 트리스와 데카드는 내버려 두고 흑마법사들을 감옥으로 옮겼다.

“흐으윽…….”

“이제 좀 그쳤어?”

트리스가 훌쩍이며 약간 부은 눈으로 데카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흐아아앙!”

“…….”

[마수왕님! 얘 울보다!]

[마음이 많이 여린가 봅니다.]

[쳇! 또 암컷이네!]

[…….]

[주인님이 말했던 그 후배로군요.]

이렇게 울다가는 몸에 있던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트리스의 눈물은 멈췄다.

“이거 꿈 아니죠? 훌쩍…….”

“꿈이었으면 좋겠어?”

데카드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트리스는 데카드를 잡고 있던 손의 힘을 꽈악 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그럼 궁금한 점이 많을 테니 얘기라도 해볼까? 아, 시간 없으면 나중에 해도 되고.”

마탑에 흑마법사들이 괴수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마탑의 총장 신분을 가지고 있는 트리스가 이렇게 놀 시간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저 시간 많아요. 아니, 없더라도 제가 만들 거예요.”

트리스가 급하게 대답하며 데카드의 품에서 조금 떨어졌다.

“나는 정말 괜찮아. 할 일 먼저 보고와도 돼.”

“저에게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요.”

아직도 목에 울음기가 남아있어서 떨리는 목소리와 부어서 빨개진 눈으로 이런 진중한 말을 하는 게 살짝 웃기긴 했다.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 데카드는 자신의 손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건 뭐야?”

트리스의 손목과 자신의 손목을 잇고 있는 항마력 소재 수갑.

집행관들이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열쇠 구멍으로 해제하는 게 아닌 수갑 주인의 마나로 해제되는 수갑이다.

“아직도 꿈같아서. 눈을 뜨면 선배가 사라지고 없을 것 같아서. 선배랑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어서. 선배가 도망갈지도 몰라서 하는 수갑이니까 너무 불평하지 마세요.”필립이 살짝 애가 이상해졌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트리스와 데카드는 해가 지려고 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가 철썩이는 해안을 걸었다.

“그래서 선배는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어요?”

“하나하나 설명해 줄게.”

데카드는 노을이 지고 있던 하늘이 밤으로 바뀌어 보름달이 휘영청 뜰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마수왕이요? 9서클이라고요?”

트리스는 데카드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수계에서의 1000년을 얘기하고 귀환한 이후 슬레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런 쓰레기통에서 기계를 고쳐 나올 생각을 하다니…… 선배는 역시 천재라는 소리가 아깝지 않네요.”

“걸어서 나가기에는 너무 오래 결렸으니까.”

루비아에서 집행부 전속 용병이 된 얘기.

흑마법사와 얽히고설킨 악연에 관한 얘기.

해리스 산맥에 있는 유적에서 유물을 찾아온 얘기.

퀘스트로 황녀와 놀아줬던 얘기.

모든 얘기들이 끝났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전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정말…… 엄청난 모험을 하셨네요.”

“그랬지.”

차원문 뒤에 마수계가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럼 지금은 4서클이라고 하셨죠?”

“어.”

“진도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귀환한 지 반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데카드는 범재가 평생을 노력해야 오를 수 있다는 4서클에 도달했다.

단순 속도로 놓고 보자면 아마 데카드보다 빨리 서클을 올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갔던 길이니까.”

남들은 처음 가본 길이나 데카드는 마수계로 가기 전에도 7서클에 있었던 남자다.

“근데 네가 무슨 별명이 있다던데?”

“제, 제가요?”

트리스는 별명이라는 주제가 꺼내지자마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어. 근데 그 별명이 내가 생각하는 너랑 아무리 봐도 매치가 안 되는 거야.”

그녀의 별명은 철혈(鐵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다가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귀여운 내 후배가 철혈이라니, 상상이 안 가잖아?”

데카드는 만질수록 쭉쭉 늘어나는 트리스의 볼 살을 잡아당기며 놀았다.

“크흠……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니까요?”

트리스는 천연덕스럽게 넘어가며 막 생각난 듯 목으로 손이 갔다.

“아아, 그리고 선배 돌려 드릴 게 있어요.”

트리스는 수갑을 풀고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뺐다.

마력석의 원석을 거칠게 조각해서 만든 이 목걸이는 그때 넣어놓은 데카드의 마나가 아직도 활발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데카드가 죽는다면 이 목걸이의 빛도 꺼지게 된다.

트리스는 인간계에서 매일같이 목걸이의 빛을 확인하며 그가 살아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었던 데카드에게 다시 걸어주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막았다.

“이건 네가 계속 끼고 있어.”

그대로 다시 트리스의 목에다가 목걸이를 걸어준 데카드는 싱긋 웃어 보였다.

달빛이 그의 웃음을 환하게 비춰주며 트리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잠시 데카드를 바라보던 트리스는 조금 더 그와 거리를 좁혔다.

“트리스……?”

이미 충분히 가까웠지만,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더 가깝게.

데카드의 흑색 눈동자와 트리스의 호박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트리스는 더 이상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데카드의 옷깃을 살며시 잡고 그대로 끌어와 입을 맞췄다.

귀로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와 부엉이 소리, 요르가 왁왁거리며 화내는 소리, 참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소리는 심장 소리였다.

데카드 자신의 심장은 아니었다.

앞에 있는 트리스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입을 맞추고 있는 데카드에게까지 들려왔다.

1분 아니면 5분,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둘이 느끼기에는 순간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하아…….”

트리스가 먼저 입술을 떼며 숨을 몰아쉬었고 데카드의 눈치를 보았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그냥 자신의 욕망에 따라 들이댄 키스였으니까.

“진짜 많이 컸네. 이런 것도 할 줄 알고.”

데카드는 트리스의 머리를 손으로 한 번 헝클이고 마탑으로 걸어갔다.

“가, 같이 가요! 선배!”

놓칠세라 트리스는 황급히 데카드를 쫓아갔다.

* * *

“아리안 교수님.”

“진저백 교수님?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마법부로 압송하기 위해 흑마법사들을 가두고 있는 마탑의 지하실에 진저백이 내려왔다.

아무리 결박되었다고 하나 위험할 수 있어 교수 중 빛의 속성학 교수인 아리안이 지하실을 지키고 있었다.

“총장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래요? 아, 그럼 잠깐만 교수님이 여길 지키고 있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마리안이 서둘러 지하실 바깥으로 나가고 진저백은 잠겨 있는 철창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 안에는 손과 발이 모두 묶이고 입이 막힌 흑마법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서 아직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대장이 진저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대장의 입을 막고 있던 결박구에 진저백이 약한 전류를 쏘여주자 그것은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무슨 짓이냐.”

대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진저백의 행동에 경계심이 먼저 일어났다.

“원래라면 너같이 더럽고 역겨운 놈이랑 이야기할 일이 없을 텐데 상황이 바뀌었다.”

진저백은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저주가 필요하다. 아주 강력한 저주가.”

대장은 눈치 빠르게 진저백이 뭘 하는 것인지 알아챘다.

그 이유는 살면서 진저백과 같은 눈을 한 자를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열등감에 인생이 절여져서 제대로 된 사고가 안 되는 놈들.

흑마법사가 되겠다는 마법사 중 99%가 저런 눈빛을 한 채 흑마법사가 되고 싶어 한다.

“고통은 주어도 절대 죽지는 않아야 하는군. 상대가 오랫동안 고통을 즐기도록 말이야.”

대장이 진저백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며 쇳소리가 나는 성대로 말했다.

“그래, 맞아. 절대 죽지 말아야 해. 마지막은 내가 장식해 줄 거거든.”

“크크크큭…… 대신 대가로 뭘 지불할 건가.”

“여기서 나가게 해주지. 그리고 추가로…….”

진저백은 대장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며 말했다.

“크흐흐흑! 좋다. 계약 성립이군.”

꽈아아앙-!!!

지하실의 천장이 지상까지 뚫리면서 대장 흑마법사가 부하들을 주머니에 넣고 도망쳤다.

“진저백 교수님! 괜찮으세요?”

천장이 뚫리면서 쏟아진 잔해 사이로 쓰러져 있는 진저백을 굉음이 들려오자마자 달려온 아리안이 일으켰다.

“으윽…… 죄송합니다. 녀석들이 저주를 건 탓에 해독하느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일단 사셨으니 된 거죠.”

아리안은 진저백을 쳐다보다가 천창에 난 커다란 구멍을 살펴보았다.

“이걸 뚫을 정도의 힘이라니…… 항마력 소재가 아니긴 하지만 저희가 흑마법사들을 너무 얕본 걸까요.”

아리안은 진저백을 부축하며 아까 하려 했던 말을 꺼냈다.

“총장님이 자리에 안 계시던데요?”

“그렇습니까? 아까는 있으셨는데 이상하군요.”

능청스럽게 피해 가는 진저백을 가라앉은 눈으로 한 번 쳐다본 아리안은 다 무너져 가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진저백과 함께 빠져나온 아리안이 지금 막 근처에서 소리를 듣고 온 데카드, 트리스와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데카드를 대할 때와 싹 바뀐 표정과 태도로 트리스가 아리안에게 물었다.

“그게…….”

“흑마법사들이 도주했습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진저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그런 듯 울먹이기까지 하며 고개를 숙였다.

“흐음…….”

지금은 트리스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녀와 떨어져서 울고 있는 진저백을 보고 있던 데카드는 팔짱을 꼈다.

“알았습니다. 상황 정리하고 추격대를 꾸리세요.”

“알겠습니다!”

아리안은 진저백을 마저 양호실로 데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죄송해요. 선배가 기껏 잡은 흑마법사들을 놓쳐 버렸네요.”

“괜찮아. 뭐 딱히 중요한 놈들도 아니었는데, 뭘.”

다시 잡을 기회야 얼마든지 있고 그놈들이 뭘 준비하든 데카드는 반격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이제 난 숙소로 가볼게.”

“벌써요?”

이래저래 둘이서 떠들다 보니 시간은 새벽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야지. 내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정말 말도 없이 어디 가면 안 돼요.”

“알았어. 걱정하지 마.”

트리스는 망설이다가 다시 한번 다가와 데카드를 안았다.

“너무 막 안기는 거 아니야?”

“기, 기분 나쁘시면 안 할게요.”

“아니 뭐 나쁘진 않은데.”

남자로서 기분이 좋으면 좋았지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 된 거죠.”

트리스는 데카드의 대답을 듣고 그걸로 됐다는 듯 떨어질 줄 몰랐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다시는 선배를 못 볼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럼 내일 봐요. 선배.”

마지막으로 트리스는 데카드의 볼에다가 입술을 맞춘 후 부끄러움에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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