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67화 (67/208)

067 주사와 후회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데카드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엘리스의 손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더욱 힘을 주어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꽈악 잡았다.

“이제 들어가서 자자.”

데카드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엘리스를 자리에서 일으키려 했다.

제정신이 아닌 일류 암살자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여기서 술을 더 먹게 했다가는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은 직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어우, 엘리스가 힘이 이렇게 셌었나?”

마수계에서도 틈틈이 근력 운동을 해온 데카드인데 어찌 된 게 힘을 잔뜩 준 엘리스를 옮길 수 없었다.

[마수왕님! 이 고오른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이 암컷은 진짜 갑자기 민폐 짓이에요?]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어 줘.’

여기서 갑자기 마수들이 튀어나온다면 그걸 볼 수 있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엘리스, 이제 진짜 방으로…….”

“야! 데카드!”

데카드는 엘리스를 들어 올리기 위해 자세를 낮추던 도중 갑자기 들려온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올렸다.

“이익……!”

그곳에는 왠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무척 화나 보이는 엘리스가 반쯤 감긴 눈으로 씨익씨익거리고 있었다.

“너 이리 앉아!”

거의 짐짝 들듯이 양손으로 데카드를 들어서 의자에 앉힌 엘리스는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목소리도 왁왁 큰소리로 내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았다.

그 모습은 평소 진지하고 쑥스러움을 많이 탔던 엘리스와는 180도 달랐다.

“야! 데카드!”

“넌 빨리 들어가서 자야 한다니까?”

“조용히 해!”

“…….”

이름을 불러놓고 몇 마디 뱉으니까 바로 닥치라고 하는 엘리스의 모습에 데카드는 이 암살자의 주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너는 말이야…… 나를 뒤집어놨어…….”

작은 주먹으로 데카드의 가슴을 툭툭 치며 엘리스가 신세를 한탄하듯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를?”

데카드로선 전혀 영문 모를 소리에 반문하자 엘리스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래! 네가! 빨리 사과해!”

“미, 미안.”

일단 여기서는 하라는 대로 다 해주고 빨리 요구 조건을 맞춰준 다음에 방으로 데려가야 한다.

보통 술을 이렇게 마셨을 때는 절벽 끝자락에 선 사람처럼 누가 툭 밀어주면 그대로 잠에 빠져 버린다.

지금은 엘리스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일 뿐 슬슬 감기는 눈을 보니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때 동안만 버티면 돼.’

데카드는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가슴을 계속 치던 엘리스의 눈이 데카드의 웃고 있는 얼굴에서 멈추더니 갑자기 성을 냈다.

“그럼 어떻게 웃어야 하는데?”

“으음…….”

지금은 생각을 최대한 많이 하게 해서 잠에 빠뜨려야 한다.

“아, 몰라! 어쨌든 나한테 그렇게 웃지 마! 심장 아프다고!”

“그건 네가 지금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게 아니야! 이 눈치코치 다 팔아먹은 놈아!”

나름 길었던 인생을 살아오면서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참 여러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흐흑…… 왜 하필 네가 날 구해줘 가지고…… 심장을 아프게 만들어…… 흐흐흑…… 아니면 조금만 더 빈틈을 보여줬으면 내가 이러진 않았을 텐데…… 흐흐흑…….”아까는 분노에 빠져 뭐든 다 때려 부술 것 같던 엘리스가 이제는 데카드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실시간으로 바지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데카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그저 할 수 있는 건 자유로운 한쪽 팔로 그녀가 빨리 잠들도록 등을 토닥여주는 것뿐이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심장 아프다고!”

하지만 그것마저 막아버린 엘리스는 그렇게 5분을 울고 나서야 몸을 일으켜서 데카드의 상의를 잡았다.

“푸릉!”

“…….”

눈물을 닦고 코까지 힘차게 풀고 나서야 상쾌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엘리스! 술 먹지 마라! 다음부턴!]

[…….]

[이 암컷은 정말 그 술이란 거 입도 못 대게 해야겠어요.]

데카드도 미소 지으며 잠든 엘리스를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며 달이 예쁘게 뜬 하늘에다가 맹세했다.

“내가 다음부터 얘한테 술 먹이면 진짜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에휴…….”

방까지 올라와 발로 겨우 문을 열었다.

그녀의 침대인 위쪽에 엘리스를 올려주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아래층에서 엘리스가 자고, 위층에는 데카드가 올라갔다.

침대에 엘리스를 눕히고 데카드가 더러워진 옷을 재빨리 갈아입었다.

“이건 나중에 빨든가 해야지.”

아끼는 외출복이었지만 이걸 입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잘 자네.”

편안하게 자고 있는 엘리스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 같았고 데카드는 그녀의 신발 정도만 벗겨주었다.

그리고 이불까지 잘 펼쳐서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주려는 그때, 엘리스가 턱 하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흑……!”

순간 데카드의 심장이 아파왔다.

설레서는 아니고 너무 놀라서.

분명 엘리스는 잠에 빠져서 전혀 의식이 없을 텐데 정확히 데카드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잠자기 전에 한 번…….”

“뭐?”

데카드가 뜻을 파악할 틈도 없이 엘리스가 손목을 잡아당겨 그를 자신의 앞까지 끌었다.

화악-!

“으읍…….”

타겟이 반응할 타이밍은 없었다.

암살자의 공격은 정확히 데카드의 입술에 명중했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입맞춤은 엘리스가 다시 잠에 빠지면서 끊어져 버렸다.

[놔 봐! 내가 저거 지금 죽일 거야!]

[참아라! 요르!]

[그래! 이 정도는 넘어가 줘야 하지 않겠나!]

[…….]

데카드는 아직 입술에 남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별생각 없이 위에 침대로 올라간 데카드는 술도 먹었겠다, 빠르게 눈을 감았다.

“내일은 주말이니까 늦게 일어나야겠다.”

* * *

학생들도 교수들도 모두 좋아하는 주말의 토요일.

시계는 여덟 시를 가리켰고 조금씩 침대에서 눈을 뜨는 한 남색 머리 여자가 있었다.

“아으…… 머리 아파…….”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햇살이 아침인 것을 알려주었고 깨질 듯 아픈 머리는 어제의 회식을 기억나게 했다.

“어제 뭔 일이 있었지?”

끊어진 필름처럼 단편적으로만 기억나는 어젯밤의 회식 자리는 딱히 많은 게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자신의 자리는 원래 2층이었는데 그곳엔 데카드가 자고 있었고 그의 자리에는 자신이 누워있었다.

“물 좀 먹어야겠다…….”

뭔가 정신을 깨우지 않으면 계속 어질해서 뭘 하질 못하겠다.

1층 주방으로 내려와 물을 꺼내 꿀꺽꿀꺽 들이켠 엘리스는 조금씩 기억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어제 뭘 저지른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물을 제자리에 두고 아직 치우지 않은 어제의 회식 자리로 온 엘리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 기억은 뭐야?”

분명 남의 기억 같은데 그 기억 속 주인공은 분명 자신이었다.

데카드에게 소리를 지르고…… 힘으로 옆에 앉히고…… 눈물 콧물 다 그의 옷에다가 짜내고…….

점점 늘어나는 죄목에 엘리스는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어제 자신이 했던 행동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요, 용서해 주실까?”

자신이 아는 데카드라면 혹시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영영 그와 멀어진 상태가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엘리스는 속죄의 의미로 어제 팀이 먹고 마시면서 어질러 놓았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웠다.

빈 병들은 모두 버리고 남은 병들은 공용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릇들은 전부 세제로 빡빡 닦아서 새것처럼 만들어 건조해 두었고 더러운 책상도 깔끔하게 치웠다.

“데카드가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줄까.”

청소가 끝나고 숙소 건물을 나와 도시로 나온 엘리스는 주말이라 사복을 입고 다니는 마탑의 학생들을 지나치며 계속 걸었다.

“선물을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사람의 기분을 빠르게 좋게 만드는 방법은 역시 선물만한 게 없다.

선물을 주며 용서를 구하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이제 어떤 선물을 골라야 하는지 고민했다.

엘리스는 평소 데카드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단 음식……?”

평소 데카드는 디저트 같은 종류의 달콤한 음식들을 즐겨 먹었던 것 같았다.

“평범한 걸로는 안 돼.”

자신이 어제 저지르고 말았던 행동들은 절대 길거리에서 파는 토스트 같은 걸로 용서할 만한 게 아니었다.

“도시에서 제일 귀하고 맛있는 디저트를 찾아야 해.”

이렇게 넓은 도시에서 그런 집이 어디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부끄럽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게 있다.

“저기…….”

엘리스는 길거리에 있는 테이블 벤치에서 하하호호 떠들며 브런치를 즐기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갔다.

“왜 그러세요?”

지금은 전부 사복을 입고 다니는 주말이라 귀족

같은 엘리스의 외모만 보고 같은 마탑의 학생들인 줄 안 여학생들이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여기 이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 가게를 찾고 있거든요…….”

후드라도 뒤집어쓰고 말을 걸까 했지만 자신이 너무 수상해 보일까 봐 그만뒀었다.

그래도 역시 후드를 썼어야 했던 건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가장 맛있는 디저트 가게요?”

“네…….”

“거기 아닌가? 페로쉐의 가게.”

“그곳이 제일 맛있긴 하지.”

여학생들은 저마다 의견을 모으더니 손가락으로 한 거리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쭉 가시고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나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친절한 여학생 덕분에 엘리스는 어지러웠어도 최대한 빨리 뛰며 페로쉐의 가게라는 간판이 써진 곳까지 도착했다.

“허억…… 허억…… 이곳인가?”

어젯밤 술을 진탕 마셔서 그런지 조금만 뛰어도 머리가 아파지고 숨은 더 빨리 찼다.

그래도 눈앞에 있는, 딱 봐도 ‘나 고급 디저트 가게예요.’라고 표현하는 페로쉐 가게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외관만 보아도 벌써 데카드의 용서를 구할 만한 디저트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딸랑- 딸랑-

싱그러운 종소리와 함께 엘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달콤한 설탕 냄새가 코를 강타했다.

계속 입에서 느껴지던 술 냄새 대신 냄새만 맡아도 당이 차오르고 기분이 좋아지는 초콜릿 냄새가 강하게 느껴졌다.

“여기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엘리스는 열심히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최고의 디저트를 찾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이 행사를 꼭 열고 싶습니다.”

“취지도 좋고 이걸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뭔지도 알겠는데, 진저백 교수가 이런 거에 관심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요?”

“최근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총장이 마탑에 없는 지금 그 대리인 부총장이 모든 실무를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

진저백은 자신이 계획한 행사를 부총장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진저백 교수가 일을 맡아서 진행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부총장실을 나온 진저백은 복도를 걸으며 일이 착착 진행된다는 생각에 입이 귀에 걸리도록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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