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회식
“어떻게…… 어떻게 해야 녀석에게 커다란 망신을 줄 수 있을까…….”
그놈에게 당하고만 살았던 지난날의 자신을 버리기 위해 그는 이름까지 바꿨다.
그렇다고 얼굴까지 바꾸진 않았는데 대놓고 보여줘도 데카드는 진저백이 누군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단 말이다…….”
진저백은 어금니가 부서질 듯 이를 악물었다.
“10년 전이라고는 하나 수없이 싸워왔던 나를 기억 못 하다니!”
그때의 진저백은 데카드의 기억에도 남지 못할 정도로 별 감흥이 없었기 때문일 테지만 사실 그건 모든 마탑의 학생들이 같았다.
누가 뭘 어떻게 싸운다 해도 데카드를 넘볼 수 없었고 그 역시 왕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놈에게서 느껴지는 서클은 기껏해야 4서클 정도.
최근 7서클에 올라선 진저백이 전력을 다한다면 새끼손가락으로도 이길 수 있었다.
확실한 무력의 우위에 있다는 것이 머리로 인식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을 유린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걸 내가 직접 해선 안 돼.”
직접 데카드를 찾아가 싸우는 건 마탑의 교수직에서 해임될 위험성도 있고 무엇보다 공개적이지가 않았다.
“이빨 빠진 호랑이쯤이야 언제든 죽일 수 있어. 중요한 건 그놈의 망신이야.”
상자 안에는 예전 진저백이 모아둔, 데카드의 약점들이 어떤 게 있는지 적힌 종이가 쌓여 있었다.
이런 걸 모은다고 해서 승패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기에 이런 저열한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기대해라, 데카드 아르마다.”
* * *
“엣취!”
숙소 1층, 공용 주방에 있던 데카드가 갑자기 생선을 굽다 말고 재채기를 했다.
“감기 걸리셨습니까?”
옆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빅터가 슬쩍 데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거 잘 안 걸리는데. 이상하네요.”
[추우시면 이 고오른이 마나를 좀 더 돌려 드릴까요?]
[아니지! 내가 안아드려야 해!]
코를 훌쩍거리며 생선을 뒤집자 노릇노릇하고 바삭하게 구워진 뒷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리를 생각보다 잘하십니다.”
“어느 정도는 하죠.”
오늘은 팀끼리 서로 수고했다고 회식을 하는 날이다.
데카드는 그런 것 없이 침대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첫 회식부터 빠져버리면 나중에 가서 몸을 빼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렇게 생선이라도 구우며 회식에서 뭐라도 하는 척 일조하는 것이다.
“데카드 씨는 용병이기 전에 뭘 하셨습니까?”
“흐음…… 뭐가 많긴 했죠.”
처음에는 마탑의 학생이었다가 시간이 흘러 2급 집행관이 되고 또 마수계의 왕이 되었다가 지금은 집행부 전속 용병을 하고 있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나열해 보니 참으로 근본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체감됐다.
“저는 평범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숲에서 영주의 허락을 잡고 사슴이나 토끼를 잡는.”
“근데 왜 용병이 되셨어요?”
빅터는 하핫 웃으며 그 이유를 말했다.
“이게 더 돈이 됐습니다.”
“확실한 이유네요.”
보수가 더 높은 일이 눈앞에 있는데 굳이 다른 것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용병이 좀 위험한 직업이긴 해도 저는 골렘 제조부 소속이라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거든요. 아! 데카드 씨는 집행부 소속이라 했죠?”
“그랬죠.”
집행부와는 인연이라도 있는 것같이 껌딱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럼 거기서 신문에 나오는 막 흉악한 범죄자도 봤습니까?”
아무래도 골렘 제조부에서는 따분하게 코어만 만지작거리고, 몸을 움직인다 해도 몸체를 깎고 조각하는 일만 하니 지루할 것이다.
빅터는 기대감 뿜뿜한 눈으로 데카드를 바라보며 평소 집행부에 대해 생각하던 로망 섞인 질문을 했다.
“흉악한 범죄자는 하루걸러 하루꼴로 보죠.”
흑마법사들을 그렇게 자주 볼 줄은 데카드도 미처 몰랐다.
루비아에서도 보고 산맥에서도 마주치고 어떻게 된 게 그 족속과 이어진 악연은 끊어질 줄 몰랐다.
“와아! 역시 집행부는 뭔가 이름도 멋있고 하는 일도 멋있네요!”
“이게 멋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막 영웅처럼 범죄자를 잡는 것 아닙니까!”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현장에서 뛰는 자신들이야 목숨도 걸고, 가족이 있으면 가족의 생계다 뭐다 전부 걸고 일을 한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느라 정작 그 멋있음을 본인들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알겠어요.”
잘 구워진 생선이 접시에 담겨 주방 건너편에 있는 책상으로 올라가고 데카드는 같이 챙겨온 그릇들을 각자 나눠주었다.
“오오! 맛있게 구워진 생선이구려!”
볼텍은 입맛을 싸악 다시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안에 있는 빅터가 조금만 기다리시랍니다.”
“빅터가? 쳇, 알겠소.”
기다리라고 한 말은 이걸 위한 것이었는데 볼텍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생선 옆에는 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술들이 그득그득하게 상자째로 놓여 있었다.
“데카드는 술 잘 먹어요?”
옆에 앉아있는 엘리스가 술 상자를 보고 살짝 긴장되는 듯 데카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다.
“나? 그냥 남들 마시는 것처럼 먹는 것 같은데.”
학생이더라도 음주가 합법이었기에 마탑의 도시에서는 술집도 무척 많았고 데카드도 친구들과 주말이면 술판을 벌였었다.
다 큰 성인들이 몇 병만 마시면 취해서 쓰러지기 일수였다.
그때마다 항상 마지막까지 산 데카드가 잠든 친구들을 기숙사까지 돌려보내 주고 했었는데 그건 집행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스는 잘 못 해?”
“네…….”
“어느 정돈데?”
“으음…… 알코올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빨개지고 살짝 어지러워져요.”
“…….”
이 소리는 한 잔 아니면 반 잔 정도가 주량이라는 소리다.
술 못 먹기로 집행부에서 가장 유명하던 필립도 한 잔은 넘게 마셨는데 오늘 그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버렸다.
“그럼 탄산으로 줄까요?”
제이미가 술과 함께 챙겨온 듯 사이다를 꺼내 보였다.
“딱 한 잔만 마시고 사이다 먹을게요.”
“그래요.”
“하핫! 여기 제이미도 어지간히 술을 못 먹으니 너무 상관하지 않아도 괜찮소!”
그래서 사이다를 챙겨온 건가 보다.
다행히 이 회식은 술 못 먹는 사람은 적당히 배려해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 게 없는 곳은 일단 술자리가 시작되면 모두 한 잔씩 먹고 술을 못 하는 사람이건 처음 하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그냥 막 먹여버린다.
보통 상하관계가 있는 직업들이 회식을 가지면 그러는데 이곳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팀원들이니 다행히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고기 다 됐습니다.”
접시 가득 고기를 쌓아서 오는 빅터를 볼텍이 누구보다 환영하며 상자에 있던 술을 한 병 꺼냈다.
“드디어 왔군! 자, 이제 모두 잔을 들어주구려.”
술은 역시 탈리스의 남녀노소 신분의 차이 없이 모두 좋아하는 소으쥬르.
초록 병이 조명에 비춰져 투명하게 빛나고 이슬 같은 색의 술이 각자의 잔에다 부어졌다.
“그럼 우리 건배사는 팀장님이 하시죠.”
첫 건배에서 빠질 수 없는 건배사를 데카드가 타이밍 좋게 제이미에게 떠넘기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제, 제가요?”
“데카드 씨의 말이 맞구려! 깔끔하게 한번 해보시게!”
제이미는 아무래도 이런 게 처음인지 어버버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잔을 들었다.
“모두 오늘 하루 수고 많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집으로 무사 귀환합시다!”
“건배!”
“건배!”
짜안-! 짠-!
서로의 잔들이 방울보다 더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볼텍과 데카드는 원샷, 빅터와 제이미는 적당히 한 입만, 엘리스는 고양이가 물 먹듯 혀만 살짝 담그고 뺐다.
“으으…….”
그것만으로도 벌써 엘리스의 얼굴이 처음보다 빨개져 있었다.
“크하하핫! 데카드 씨는 역시 주도가 뭔지 아시는구려!”
“첫 잔은 원샷이 기본이지요.”
볼텍은 다시 한번 크하하하 웃으며 비어있는 데카드의 잔을 따라주었다.
“저도 따라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술과 함께 안주로 가져온 마른오징어와 방금 구워낸 생선과 고기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그와 비례하듯 상자 안에 있던 술들도 한 병 두 병 점차 사라지더니 어느새 반 이상을 해치웠다.
“흐흐흑! 토벤! 날 다시 받아줘! 흐흐흑!”
제이미는 떠나간 전 남자친구를 애타게 부르짖고.
“안녕하세요. 되게 제 스타일이셔서 그런데 저녁 같이 드실래요?”
빅터는 숙소 안에 있는 기둥에다가 계속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었다.
[마수왕님! 얘들 이상하다!]
[…….]
‘원래 사람이 술을 많이 먹으면 저렇게 될 수도 있어.’
그렇게 상자 안에 있는 술 절반이 사라질 때 엘리스도 잔에 있는 술 절반을 비워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직 완전히 취하지는 않았고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 줄타기 중이었다.
“허헛, 이거 민망하구려.”
자신의 팀 쪽에 있었던 인물들이 전부 한 마리의 개가 되어버리자 볼텍은 멋쩍게 웃으며 다시 데카드의 잔을 따라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딱히 뭐 피해가 오지도 않는데요.”
“우욱……!!”
하지만 그 피해는 생각보다 빠르게, 예상보다는 더욱 빠르게 데카드에게로 찾아왔다.
아까부터 기둥에게 계속 데이트하자고 하던 빅터가 결국 데이트 상대에게 오바이트를 한 것이다.
“…….”
그 모습을 직관한 볼텍과 데카드는 한숨을 쉬며 잔에 있던 술을 비웠다.
“저거 먼저 치우고 마저 먹어야 할 것 같소.”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아직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는 엘리스를 의자에 눕혀주고 볼텍과 데카드는 주방에서 물걸레를 가져왔다.
“다행히 이거 위에 엎어지진 않아서 다행이오.”
그랬다면 빅터를 만질 수도 없고 정말 상황이 난감해져 버린다.
물걸레로 둘이서 정신없이 바닥과 기둥을 닦아내자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후우…… 일단 내가 이놈들을 안에 눕혀놓고 오겠소.”
“그러세요.”
볼텍이 제이미와 빅터를 어깨에 업고 계단으로 방까지 올라갔다.
“엘리스는 자나?”
눈으로 보지는 못했는데 뒤에 있는 엘리스에게서 목소리나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걸레를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아까 눕혀놨던 엘리스는 멀쩡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 옆에 어질러진 텅 빈 초록 병들.
데카드와 볼텍이 꺼내지 않은 새로운 병들이었다.
“엘리스가 다 마신 거야?”
아까 술 못 먹는다고 하더니 짧은 시간 내에 다섯 병이나 비웠다.
그러면서 딱히 취한 것 같지도 않고 별 탈 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술잔을 든 채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는 점이다.
“이대로 자고 있는 건가? 엘리스? 깨어있어?”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턱 하고 잡으려 하자 엘리스가 빛살과 같은 속도로 데카드의 팔을 먼저 잡아챘다.
팔에서 느껴지는 엘리스의 악력은 생각보다 강했고 뭔가 장난의 느낌이 아니었다.
“엘리스……?”
조심스럽게 앞머리에 가려진 그녀의 눈을 보며 이름을 부르자 데카드는 상황을 파악했다.
눈을 평소처럼 뜨려고 하지만 무거워진 눈두덩을 이기지 못해 반만 겨우 뜬 이 모습.
아, 제정신이 아니구나.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