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다시 만난 원수
“하아…….”
데카드는 깊은 한숨으로 지금의 심정을 토로했다.
마수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렇게라도 표출해야 했다.
[마수왕님! 저런 건 그냥 부숴버려요!]
[힘내라! 마수왕님!]
[수세에 몰리시면 이 고오른의 힘을 꺼내 쓰십쇼!]
[…….]
“그럼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중앙에 있던 진저백 교수가 심판을 보기로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둬서 재밌겠다는 듯 둘을 지켜보았다.
“정말 괜찮겠어요? 하핫! 엄청 아플 텐데?”
“…….”
데카드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고 그저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익……!”
이런 수준 낮은 도발에 손쉽게 걸려든 누치는 양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출렁- 출렁-
그와 동시에 물길이 일고 그것이 곧 파도처럼 변하면서 실습실의 바닥을 축축하게 적셔갔다.
“이틀간은 못 일어날 겁니다!”
누치는 말하면서 점점 더 파도의 강세와 높이를 부풀려 나갔고 확실히 저런 것에 아무런 방비 없이 맞는다면 뇌가 다 흔들릴 것이었다.
아무런 방비 없이 맞는다면.
“당신도 마법사라면서요! 뭔가 좀 해보시죠? 이렇게 한 방으로 KO당하면 꼴사납잖아요!”
거대한 파도를 몰아치게 한 누치는 이제 완벽히 자신의 통제 안으로 들어온 전황에 만족하며 진저백 교수를 살짝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고 딱히 무언가 자신의 실력에 감명을 받은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뭐라도 해보라니까!”
누치는 이제 완전히 용병을 유린하는 모습을 보여서 교수에게 점수를 딸 생각인지 대놓고 조소를 내뿜으며 견제용 공격들을 날렸다.
몰아치는 파도에서 물의 화살 하나가 솟아나 데카드를 향해 쏘아졌다.
파악-!
물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은 금방이라도 데카드의 옆구리를 관통할 듯 그 속도가 빨랐다.
하지만 공격을 한다고 상대가 100% 맞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피, 피한 거야?”
데카드는 화살이 날아오자 동시에 옆구리를 꺾어 그대로 공격을 흘려보냈고 그대로 누치를 쳐다봤다.
뺨이라도 한 대 치고 싶은 썩은 미소는 덤.
맞출 수 있으면 맞춰 보라는 식으로 이제는 아예 손까지 주머니에 꽂았다.
“살살해 줬더니 누굴 바보로 아나!”
자존심 강한 누치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모욕에 얼굴이 붉어지며 아까보다 더욱 많은 양의 화살과 창을 쏘아 보냈다.
파바박-! 피융-!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데카드는 이미 어디서 공격 방향이 날아올지 다 아는 것처럼 공격받기 전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여 피했다.
그러니 늦게 출발한 화살은 데카드에게 털끝도 닿을 수 없었다.
“너무 대놓고 드러내고 있어.”
“뭐……?”
“공격이 사출될 때 네 파도 한 부분에서 마나가 역동하는데 그걸 감추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하지 않더군. 그러니 상대가 이렇게 피할 수밖에.”
멍한 표정으로 데카드를 바라본 누치는 말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요, 용병 따위가 어떻게 그런 걸 알지……?”
“그런 편협한 사고부터 버리라고.”
데카드의 양손이 주머니에서 빠지며 마나룸이 개방됐다.
댐이 열린 것처럼 마나는 회로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모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함이 몸 구석구석을 채웠다.
“이, 이런 양의 마나라고……?”
“선배 노릇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오직 양학의 시간이다.
“소환.”
데카드의 손이 옆쪽부터 오른쪽까지 무언가를 치워버리듯 움직였다.
파바바방-!
그와 동시에 팡파르가 터지듯 생겨난 소환 마법진이 실습실을 그림자 하나 없이 밝게 물들였고 평균 3서클의 마수들이 등장했다.
끼리릭-!
웨이브 돌핀 세 마리가 누치의 파도 안에서 춤을 추자 점점 그 주도권이 마수들에게로 넘어왔다.
“내, 내 마법이……!”
“마수 소환사를 상대할 때는 정신 꽉 붙들어 매라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마나 감응력과 지배력을 가진 마수들에게 잠깐 한눈팔다가는 마법 주도권을 뺏겨버리는 수가 있다.
“네가 뭐랬지? 이틀을 누워 있는다고? 너는 1주일을 못 일어날 거다. 어쩌면 영원히.”
이제는 데카드의 것이 된 파도들은 매섭게 몰아치며 누치에게 완전한 적의를 드러냈다.
“파, 파도를 더 만들면 돼.”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한다는 게 나름 똘똘한 놈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나빴다.
데카드는 그런 경우의 수조차 철저히 배제해 가며 싸운다.
“상대한테 마법을 쓴다는 걸 대놓고 보여주면 안 되지.”
그렇게 되면 상대는 반격할 타이밍을 아주 쉽게 잡을 수 있게 된다.
“아오, 또 말하고 있네.”
굳이 이런 팁을 줄 필요 없어도 잘 성장할 천재들이다.
“이제 꺼져.”
작은 해일이 밀려오듯 실습실을 가득 채웠고 다른 마법으로 방어할 생각도 못 하게 공격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쏴아아아-
“으아아아악!!”
파도에 휩쓸려 실습실 벽까지 날아간 누치는 조끼의 도움으로 내상이나 외상은 크게 없었지만, 충격으로 기절한 듯 보였다.
용병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연히 누치가 압승할 줄 알았던 학생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대련 중간중간 자신들을 가르치는 것 같은 그 말들은 실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조언이었다.
전문적으로 마법을 배우지 못한 용병 따위가 할 말들이 아니란 말이었다.
짝짝짝-
한 명의 박수 소리가 침묵으로 가득하던 실습실을 깨웠고 진저백 교수가 데카드에게 다가왔다.
“과연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그냥 절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었군요.”
“그런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지.”
삐죽삐죽한 살기가 날카로운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진저백 교수를 위협했다.
“너무 화내지는 말게. 내가 아까 보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
[마수왕님! 얘 죽이자!]
보상이고 나발이고 기분이 더러워져서 이 인간하고는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졌다.
그대로 돌아서서 실습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진저백이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훗, 자네는 역시 ‘그’ 데카드 아르마다가 맞군.”
잠깐 멈춰선 데카드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가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데카드의 얼굴이 바깥에 오래 놔둔 사과처럼 썩어있었다.
[주인님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것 같더라.’
하는 말로 봐선 그 교수는 자신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날 어떻게 알지?”
[마수왕님이랑 같이 학교에 다니었던 건 아닐까요?]
“나랑 동기라고?”
[굳이 동기가 아니라 선배나 후배일 수도 있지요.]
데카드는 눈을 감으며 진저백이란 이름을 깊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기억을 전부 뒤져보아도 진저백이란 이름은 재학생 때 들어본 적도 풍문으로 접한 적도 없었다.
[1층,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마탑에서 나갈 때까지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 봐둔 와플집이나 가자.”
더러워진 기분을 푸는 데에는 역시 단 걸 먹는 게 최고다.
제이미가 갑자기 불러서 잠시 건너뛰게 된 와플집으로 가던 와중에 지도를 보고 있는 엘리스가 보였다.
“엘리스!”
“데카드?”
아직 순찰 시간인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데카드를 보며 엘리스가 급하게 달려와 그를 가려주었다.
“뭐해?”
“남들이 보면 안 되잖아요.”
근무시간에 일 안 하고 노는 걸 들켜서 좋은 건 없긴 했다.
“괜찮으니까 나와도 돼.”
엘리스는 주변을 살펴보며 조금씩 떨어졌고 이제야 부끄러운지 데카드를 쳐다보지 못했다.
“순찰은 어때?”
“지도 덕분에 편하게 하고 있어요.”
초행이라면 마탑의 도시가 워낙 넓어 길을 잃을 수 있었지만, 실시간 위치 표시가 가능한 지도는 엘리스를 많이 도와주었다.
“데카드는 여기에 이러고 있어도 되나요?”
“원래라면 내 구역에 있었겠지만, 자꾸 귀찮게 하는 놈들이 있어서 말이야.”
상큼하게 미궁도 부수고 이제 디저트 타임을 즐기려는 자신을 자꾸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당연히 박살 냈지.”
그것이 운 없는 철부지이긴 했어도 이 정도 보여줬으면 이제 귀찮게 들러붙지 않을 것이다.
‘팀장한테까지만 이 얘기가 안 들어가면 좋을 텐데.’
팀 내에서 전면에 나서기 싫어 실력을 감추고 있었는데 오늘 일이 제이미의 귀로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하하핫! 역시 데카드네요.”
아직 여유로운 마탑의 거리를 걸으며 대화하던 둘은 어느새 데카드의 구역까지 도착했다.
“이제 나도 순찰하는 척을 해야겠네.”
“나중에 숙소에서 봐요.”
“그래.”
* * *
“설마 했는데 역시나 그가 맞았어.”
수업이 끝난 진저백은 평소 모습답지 않게 잔뜩 들뜬 표정으로 마탑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평소라면 웃는 표정은 아니었어도 살갑게 대답해 줬을 진저백이었지만 지금 그에겐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
학생들도 동료 교수들도 처음 보는 환한 얼굴로 계속 걸어가던 진저백은 창고 같은 곳에 도착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한 이곳은 정보 보관실.
학생들은 들어오지 못하고 교수 중에서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중요 정보가 모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항마력 보안은 기본이고 물건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습도 처리도 완벽하다.
이런 점들은 물건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이라는 것.
기록을 보관해 두는 상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숨겨둔 상자를 꺼낸 진저백은 그것을 열어보려다가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냐.”
“야아, 날카로우십니다. 진저백 교수님.”
“로베네 교수님이셨군요.”
불속성 강의를 주로 맡는 로베네는 그 속성처럼 불같은 성격과 단순한 스타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진저백은 평소같이 무표정으로 일어나며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톤으로 말했다.
“기록 보관실에 있는 자료 몇 개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요즘 학생들의 질문 수준이 날로 높아져서 말이죠.”
“크하핫! 언제나 열심히 일하시는군요! 저도 몇 개 가지러 갈 게 있어서 들렸습니다.”
로베네는 몇 가지 정보를 가지러 온 듯 손에 서류 더미가 들려있었다.
“그럼 수고하십쇼!”
“교수님도 수고하세요.”
로베네가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진저백은 다시 그 상자를 꺼내 열었다.
“솔직히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이렇게 덩굴째 들어온 호박처럼 마탑 안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처음 그를 봤을 때는 눈을 의심하고 정말 많이 놀랐다.
급하게 그런 표정을 감추고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점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혹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니 흥분되는 마음을 감추고 몇 번이나 시험해 보았지만 역시나 그가 맞았다.
남을 습관적으로 깔보는 태도.
압도적으로 상대를 이기는 파워.
그의 명령을 완벽히 따르는 마수들.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마나 감응력과 그 지배력.
그때 자신을 처참하게 짓밟고 올라간 악마 같은 놈을 드디어 다시 만났다.
모두의 앞에서 창피를 당했던 자신처럼 이제 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때는 전투력 평가.
동급생들끼리 대련하게 해서 종합 전투력을 환산하고 랭킹을 매기는 평가다.
언제나 데카드는 1등이었고 자신은 그 밑을 겉돌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놈을 이기고 싶었고 잠도 거르면서 수련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놈은 잠을 거르기는커녕 강의도 빼먹고 여자랑 질펀하게 놀았는데 언제나 닿을 수 없는 하늘에 있는 놈이었다.
“이제는 아니야.”
지금은 자신이 더 강하다.
하지만 약해진 데카드를 직접 노려서야 재미가 없다.
공개적으로 망신살을 주어야 한다.
아주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할 만큼 커다란 걸로.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