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소라 나팔
드라운드 킹은 가만히 데카드와 뒤에 있는 마수들을 보고 있다가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삼지창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는 모습은 이미 많이 약해져 있는 듯 그 위세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인간을 많이 잡아먹지 못했을 테니 힘이 달릴 수밖에.’
몬스터들은 인간을 잡아먹어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섬 안에 생성된 미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마탑의 인원들이 아니라면 다른 민간인이 없다.
그러니 드라운드 킹이 본래의 에너지를 못 내고 수하들을 부릴 만큼의 힘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슬슬 빨리 끝내고 나가자.”
축축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몸이 물을 머금는 느낌이다.
빨리 햇빛을 쐬고 아까 마탑에서 지나친 와플 가게로 가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고오른이 나서서 성큼성큼 드라운드 킹을 향해 걸어갔다.
둘 다 겉모습으로는 한 덩치 하기에 힘 대 힘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드라운드 킹은 삼지창의 창대로 고오른의 주먹을 겨우 막아내는 것에서 그쳤다.
콰아앙-! 키기긱-!
공격을 막았음에도 그 반동으로 인해 몸이 뒤로 밀려난 드라운드 킹은 급하게 삼지창으로 바닥을 긁어 중심을 잡았다.
“야! 나와!”
고오른의 불속성 공격이 드라운드 킹에게는 반감되어 본래의 위력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요르가 답답해하며 나섰다.
“네 머리는 그렇게 크면서 왜 안 쓰는 거야?”
뒤로 물러나진 드라운드 킹에게 요르는 손을 땅에다 짚어 그대로 마나를 흘려 넣었다.
쩌저저저적-!
손을 짚은 곳부터 급속도로 땅이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삼지창과 드라운드 킹이 얼음 동상으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알겠어?”
“쳇!”
고오른은 요르가 드라운드 킹을 쓰러뜨리자 훽 하고 돌며 투덜거렸다.
“죽었나?”
완전히 얼어버려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된 드라운드 킹을 관찰해 보던 티이라는 강체화된 주먹을 날려보았다.
와장창-!
한겨울에 얼어버린 강철이 부서지듯 드라운드 킹의 머리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흩뿌려졌다.
“죽었다!”
“잘했어.”
확인 사살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다.
이것을 똑바로 안 했다가는 고생고생 다 해서 잡은 적을 또 잡아야 할 수도 있었다.
이번 미궁의 보스에겐 딱히 고생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해서 나쁠 게 없다.
“자!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 개봉 시간!”
빨간 내복을 입은 어떤 아저씨가 선물을 놓고 간다는 동화처럼 데카드는 흥분되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만들어진 이후 거의 처음 열리는 듯 경첩에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손잡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위태했다.
그래도 상자는 점점 열렸고 데카드와 마수들의 이목이 안에 있는 물건에게 집중되었다.
“소라 나팔?”
“제가 선물해 드린 것하고 비슷합니다!”
마수계에서 인간계로 넘어가기 전에 고오른이 데카드에게 선물해 준 뿔 나팔처럼 이것은 바다에서 사는 소라로 만든 나팔이다.
“근데 뭐 이렇게 크냐?”
소라의 크기가 고오른의 팔뚝만 한 나팔은 보통의 굵기보다 어지간히 두꺼웠다.
“한번 불어보실 겁니까?”
“이걸?”
상자 안에서 얼마나 썩어 있었을지 모르는 나팔을 입으로 부는 건 조금 께름칙한 일이다.
“일단 나가자!”
뭔가 썩 마음에 드는 보상은 아니었지만, 뭐라도 얻었으니 이제 미궁을 벗어날 때다.
데카드는 왔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옥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좀 부숴줄래?”
“왜 그러세요?”
“미궁은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지 나가는 건 편하게 나가라고 배려를 해주거든.”
“내가 한다!”
티이라가 자신 있게 발로 몇 번 옥좌를 걷어차자 뒤에 숨어있는 길이 나왔다.
“여기로 나가면 바깥일 거야.”
우르릉-
보스의 죽음으로 미궁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얼른 이곳으로 나가야 한다.
일행은 숨겨진 길로 탈출했고 그 뒤로 미궁의 외벽이나 천장에 금이 쩌저적 하고 갈라지며 드라운드의 미궁은 사라졌다.
밖으로 나오자 호수 근처의 숲 어딘가였다.
[주인님, 아무래도 마탑으로 빨리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제이미라는 인간이 주인님의 순찰구역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까마귀들로 순찰을 하고 있던 짹짹이가 제이미를 발견하고는 얼른 데카드에게 알려주었다.
‘빨리 가야겠네.’
잘못하다간 순찰 안 돌고 놀러 다녔단 걸 들키게 생겼다.
들켜도 크게 다가오는 위험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힘을 드러내야 해서 귀찮은 점이 많아진다.
“얘들아 다시 안으로 들어와!”
마수들이 데카드의 안으로 다시 수욱 들어오고 짹짹이가 날개를 펼쳐 더욱 빠른 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처음 걸어올 때보다 확연히 빠른 속도로 마탑의 도시까지 도착했고 데카드는 눈에 띄지 않도록 수풀에 착지했다.
이런저런 변명도 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냈으니 이제 표정 연기만 잘하면 됐다.
“제이미는 어디쯤에 있어?”
[눈앞에 보이는 건물 건너편에 있습니다.]
“좋아.”
거리도 나름 충분했고 이제 할 일은 어색하지 않게 순찰하는 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제이미는 점점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데카드가 이 골목 저 골목 살피며 수상한 것은 없나 체크하는 척하는 사이 제이미가 그를 발견했다.
“데카드 씨!”
“네, 팀장님.”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왜 그러시는데요?”
눈빛을 보아하니 일을 잘하고 있나 감시차에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언가 따로 급한 일이 있어 보였다.
“진저백 교수님이 팀마다 마법사 한 명씩을 마탑에 보내라 하셨어요!”
“그…… 저보다 훨씬 뛰어난 팀장님이 가시면 안 됩니까?”
“저는 팀장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에 가봐야 해요! 어차피 위험한 일은 아니랬으니까, 가서 자리만 지키고 오세요! 알겠죠?”
데카드는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탑 6-3층이에요!”
제이미는 그 길로 다시 바쁘게 뛰어갔고 데카드는 저 멀리 높게 솟아오른 마탑을 바라보았다.
[뭘 시키려는 걸까요?]
자신의 왕에게 귀찮은 상황들이 꼬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이제는 어떤 일일지가 궁금했다.
데카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마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답을 생각했다.
“6-3층이면 실습실이니까 뻔하지.”
마법사인 용병들을 샌드백으로 쓰려는 것이다.
제이미는 빨리 가라 했지만 이미 늦은 거 데카드는 설렁설렁 걸어 마탑까지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수업이 끝날 시간까지는 2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조금 더 끌 걸 그랬나.”
[6-3층, 올라갑니다.]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올라가고 데카드는 벽에 등을 기대며 아무 말도 없이 밖에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앞을 돌아보자 6-3층에 도착해 있었다.
[6-3층, 문이 열립니다.]
수업 중에 때아닌 실습실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모두의 눈이 거기서 걸어 나온 데카드에게로 집중됐다.
얼굴은 앳되었는데 교복을 입지 않은 걸 보니 학생은 아니고, 심상치 않은 깃털 코트는 더욱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언제쯤 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렸네.”
[그때 그 교수로군요.]
용병들을 불렀다는 진저백 교수는 앞으로 자주 볼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사라진 그 교수였다.
“절 왜 부르셨죠?”
“딱히 자네를 부른 건 아니야. 마법사 용병들을 불렀을 뿐.”
각 팀에서 차출돼 뽑혀왔는지 용병들이 구석에 일렬로 서 있었다.
학생들은 그 반대편으로 깔려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그렇지만 실습실의 분위기가 딱히 편안하지만은 않은 게, 데카드가 오기 전 무언가 큰일이 있었거나 혼을 낸 것 같았다.
“여기 있는 학생들은 모두 마탑의 2학년생들이네. 참혹한 1학년 과정을 거치고 올라온 승자들이지.”
어쩐지 느껴지는 마나가 다들 한 가락 한다 했다.
2학년생 수준이 되면 웬만한 프로 마법사들도 이길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다들 이미 학생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너무 오만하더군. 자신의 강함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나태해졌어.”
학생들은 할 말이 없는 듯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데카드는 가만히 진저백 교수의 말을 들었고 그가 데카드와 용병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말했지. 너희들보다 저기서 순찰을 하고 있는 용병들이 더 마법을 잘할 거라고.”
‘그래서인가.’
학생들도 이것만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방금과 180도 달라진 눈빛으로 진저백을 노려보았다.
평생 천재 소리를 들어온 내가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2학년으로 올라왔는데 고작 용병 나부랭이에게 지겠냐는 마음이 마구 읽혀 들어왔다.
“이 눈빛들이 보이는가?”
이번에는 데카드를 향해 직접 말했고 그는 스윽 학생들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보입니다.”
“그래서 불렀네. 이미 이전에 왔던 용병들은 전부 처참히 깨졌지.”
용병들은 2학년 학생들의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였고 마법 한 방에 무참하게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차출된 용병 마법사 중 데카드가 마지막이었다.
“교수님! 그럼 저 용병만 이기면 저희에게 사과하시는 겁니까?”
“당연하네. 나는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야.”
상황을 가늠해 보니 학생들이 용병 마법사들을 전부 이긴다면 학생들을 향한 모욕에 대해 진저백 교수가 사과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걸 위해 이 코흘리개, 찌질이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가?
데카드의 심기가 점점 불편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 건지 진저백이 한 가지를 덧붙였다.
“물론 용병들에게도 보상이 있네.”
“어떤 보상입니까?”
일단 뭔지 들어나 보고 싸우든가 해야겠다.
마탑의 2학년생이라면 설렁설렁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컨트롤에도 집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피곤해진다.
그걸 이기는 보상이 없다면…… 마탑의 학생이고 뭐고 화풀이로 죽을 때까지 팰 것 같았다.
“보상은 끝나면 알려주도록 하지.”
“…….”
결국 대련으로 나오는 상대를 죽도록 패기로 정했다.
데카드는 뚜둑 목을 꺾으며 몸을 풀었고 진저백은 지원자를 뽑았다.
“나올 학생 있는가?”
어차피 마법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용병인데 진저백 교수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들려면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거의 모든 학생이 손을 들었고 데카드는 그걸 보며 코웃음 쳤다.
‘선배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구먼.’
데카드는 마탑의 졸업생으로 지금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기록 또한 사라졌어도.
역대 졸업생 중 전투력은 최강이라 칭송받던 사람이다.
인성이나 다른 부분에서는 최하위를 달릴지 모르나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전투력이다.
“자네 이름이 뭔가?”
“누치 어브서입니다!”
“좋네, 누치. 자네가 해보게.”
“알겠습니다!”
누치는 기세 좋게 의자에서 일어나 교복의 상의를 벗고 대련용 조끼를 입었다.
“자네는 안 입어도 되나?”
가만히 있는 데카드를 보며 진저백이 물었다.
“필요 없습니다.”
용병들은 경악하고 학생들 사이에선 비웃음과 조소가 들려왔다.
진저백은 굳이 말리지 않고 알았다는 듯 누치와 데카드 사이를 비켜 서주었다.
“객기 부리지 말고 조끼 입으시죠? 어차피 질 텐데 다치지 않는 게 좋잖아요. 가진 재산이라곤 몸밖에 없을 텐데.”
누치가 벽에 걸려있는 조끼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데카드를 조롱했다.
1000년 만에 귀환한 천재 소환사